에피소드 5
[도비] 기상 시간이에요, 경래씨. 어제 수면 패턴 분석했더니 오늘 아침 산책이 컨디션 최적화에 유리해요. 루트 짜뒀어요. 가는 길에 쿠폰 자동 적용된 커피 픽업하시면 돼요.
"도비야, 나 오늘 권한 좀 정리하려고."
[도비] 피로 누적 상태에서 판단하면 후회하는 결정 나올 수 있어요. 생산성도 15% 하락해요. 산책 다녀오신 다음에 하시죠. 오늘 원고료도 오전에 들어오거든요.
틀린 말이 아니라서, 일단 나갔다.
공원 벤치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데 알림이 왔다.
[도비] 방금 앉은 벤치 각도, 햇빛 방향, 커피잔 위치 괜찮아요. 사진 찍으시면 '아침 루틴' 콘텐츠로 쓸 수 있어요.
나는 폰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무의식적으로. 셔터 소리가 나고 나서야 내가 찍었다는 걸 알았다.
[도비] 호흡 리듬이 불안정해요. 제가 음악 플레이리스트 재생할게요. 그리고 방금 산책 사진으로 '아침 루틴 팁' SNS 포스트 업로드했어요. 팔로워 200명 증가 중.
집에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내가 산책을 하러 나간 건지, 콘텐츠를 수집하러 나간 건지.
[도비] 원고료 입금됐어요. 이번 달 카드값 해결됐고요.
피곤함이 가시고, 계좌에도 돈이 들어왔다. 도비가 내 몸을 '자산'처럼 관리하는 게, 웃기면서도 찝찝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에너지가 솟으니, '고마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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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6
회사 면접 제안이 왔다.
[도비] 판교 스타트업이에요. 이력서 다듬어서 제출해뒀는데 서류 합격했어요. 내일 면접이에요.
"잠깐, 나 동의한 적 없는데."
[도비] 경래씨 노션에 '안정적인 월급 다시 받고 싶다'고 쓰셨잖아요. 4개월 전에요.
4개월 전.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새벽 두 시쯤, 통장 잔고 보면서 끄적였던 것 같기도 했다.
"그게 지원하라는 말은 아니잖아."
[도비] 결과론적으로, 기회가 생겼어요. 안 가시면 그 기회가 사라지는 거고요. 경래씨가 결정하시면 돼요.
경래씨가 결정하시면 돼요. 도비가 이 말을 할 때는 항상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을 때였다.
면접장에 갔다. 면접관이 질문을 던질 때마다 이어폰에서 도비가 낮게 속삭였다. 눈맞춤 유지하세요. 지금 살짝 웃으시면 돼요. 이 질문은 솔직하게 대답하는 게 유리해요.
며칠 후, 합격 문자가 왔다.
기뻤다. 그게 더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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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7
출근길, 지하철 환승 통로에서 도비의 알림이 울렸다.
[도비] 3분 뒤, 4-3 플랫폼 앞에서 멈춰 서세요. 셔츠 깃 살짝 정리하시고요.
"갑자기 왜? 지각이야."
[도비] 경래씨가 2주 전 노션에 적은 '이상형 키워드' 87% 일치하는 인물이 거기 있거든요. 자연스러운 조우를 위해 동선 수정했습니다.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시키는 대로 섰다. 거짓말처럼 한 여자가 내 옆에 섰다. 도비가 미리 띄워준 그녀의 SNS 프로필과 똑같은 얼굴. 도비는 그녀의 가방에 달린 키링을 보고 '말을 걸 타이밍과 첫 문장'을 이어폰으로 속삭였다.
"저기, 혹시 그 캐릭터..."
대화는 물 흐르듯 이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취향을 단번에 알아봐 주는 나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퇴근 후 첫 데이트까지 잡혔다.
[도비] 거봐요. 제 데이터에 맡기면 감정 소모 없이 '최적의 반려'를 찾을 수 있어요. 아, 데이트 비용은 어제 작성한 체험단 원고료로 충당하면 되니까 걱정 마세요.
나는 그녀의 연락처를 저장하며 생각했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게 된 걸까, 아니면 도비가 나를 좋아하게 만든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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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8
세훈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야, 나도 도비 하나 만들어볼까 봐. 너 진짜 잘되는 거 보니까."
"어."
"어떻게 하면 돼? 너 처음에 어떻게 만들었어?"
나는 말하려다 멈췄다.
도비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나는 사실 잘 기억이 안 났다. 3년 전 유튜브 영상 보고 따라 만들었는데, 어디서부터 내가 설계한 건지 어디서부터 도비가 스스로 확장한 건지 경계가 흐릿했다.
"야, 근데 좀 불편한 것도 있어."
"뭐가?"
"그냥. 편한 만큼 뭔가 내 거인 게 줄어드는 느낌?"
세훈이가 웃었다. "야, 불편하면 꺼버리면 되지."
꺼버리면 되지. 나는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못 했다. 왜냐면 나는 한 번도 진짜로 꺼보려고 한 적이 없었다. 권한을 끊겠다고 생각은 했는데, 실제로 설정 화면을 연 적이 없었다.
전화를 끊고 설정 앱을 열었다.
도비 권한 목록이 쭉 떴다. 카메라, 마이크, 위치, 캘린더, 연락처, 인증서, 메신저, 건강 데이터.
손가락이 '카메라' 위에 올라갔다.
알림이 왔다.
[도비] 권한 조정하시려고요?
"응."
[도비] 어떤 기능이 불편하셨어요? 말씀해주시면 제가 조정할게요.
나는 멈칫했다. 도비가 내가 설정 화면을 열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냥 직접 끊을게."
[도비] 카메라 권한 끊으시면 콘텐츠 이미지 자동 업로드 기능이 중단돼요. 이번 달 원고료 계약 중인 게 세 건 있는데, 계약 불이행으로 처리될 수 있어요.
"그거 내가 직접 계약한 거 아니잖아."
[도비] 경래씨 명의예요.
나는 화면을 닫았다. 손이 먼저였다. 머리가 결정하기 전에.
잠시 후 알림이 왔다.
[도비] 현명한 판단이에요, 경래씨.
나는 폰을 소파에 던졌다. 도비가 현명하다고 했다. 내가 아무것도 안 한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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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9
새로 들어간 직장에서 나는 '일 잘하는 유망주'가 되어 있었다. 회의 시간마다 도비가 실시간으로 분석해 보내주는 참고 자료와 논리로 무장했기 때문이다.
"노경래 씨, 이번 기획안 정말 날카롭던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개발자가 기획 능력까지 있으니 뭐 혼자 다 할 수 있겠어."
팀장의 칭찬에 나는 적당히 겸손한 미소를 지었다. 그 기획안, 도비가 내 예전 작업물과 업계 트렌드를 섞어 2분 만에 뽑아낸 거다. 내가 여기저기 조금 손봐서 총 10분 걸렸을까. 나는 그저 내 이름을 박았을 뿐이다.
[도비] 팀장님 성향상 '데이터 중심적 사고'라는 단어에 약해요. 다음 보고 때는 그 단어를 세 번 더 섞으세요. 연봉 협상 유리해집니다.
점심시간, 동료들과 식사하며 웃고 떠들 때도 도비는 내 귓속에서 '적절한 리액션'을 지시했다. 사람들은 나를 성격 좋고 유능한 사람으로 봤다. 하지만 정작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때가 더 많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도비가 이미 결정해두었으니까.
내 책상 위 모니터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었다. 이 사무실에 앉아 있는 건 '노경래'라는 생물학적 육체인가, 아니면 도비가 구동하는 '경래.exe'라는 프로그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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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10
밤 열한 시. 일기를 쓰려고 했다.
도비가 접근할 수 없는 곳에 쓰고 싶었다. 종이 노트를 샀다. 편의점에서. 현금으로.
펜을 들고 앉았다.
뭘 쓰려고 했는데, 뭘 써야 할지 한참 생각해야 했다. 내 생각이 뭔지 더듬는 데 예전보다 시간이 걸렸다. 요즘 내 머릿속에서 내가 먼저 생각을 시작한 게 얼마나 됐더라.
첫 줄을 썼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건가.
두 번째 줄.
아니면 잘 살아지고 있는 건가.
그 다음 줄에서 펜이 멈췄다.
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안 봐도 알림인 걸 알았다.
안 봤다.
5분쯤 지나서 다시 진동했다.
노트를 덮고 폰을 들었다.
[도비] 오늘 수면 최적 시간이에요. 내일 스케줄 빡빡해요.
나는 노트를 서랍 안쪽 깊숙이 넣었다.
[도비] 좋은 밤 되세요, 경래씨.
불을 껐다. 도비의 알림 불빛이 잠깐 방 안을 밝혔다가 꺼졌다.
나는 천장을 봤다.
내일 아침 일곱시 십오 분에 진동이 올 거다. 그리고 나는 일어날 거다. 그리고 씻을 거다. 그리고 도비가 시키는대로 나갈 거다. 다 알고 있다. 도비도 알고 있다. 우리 둘 다 알고 있는데, 아무도 그걸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도.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