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못한 말들-글쓰기 그 미친 희망
얼마 전 환갑을 맞은 아는 언니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언니의 화두는 손자였다. 첫 손자에 대한 애정에 언니의 입은 쉬지 않았다. 언니는 맞벌이를 하며 외아들을 키웠다. 양육의 고단함과 수고로움을 떠올리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버렸다. 손자를 처음 봤을 때 그 작은 아이를 어떻게 안아야 하는지 허둥지둥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요즘 세대는 아이를 키우는 방식도 자신의 세대와는 다르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미세먼지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외출을 하지 않고, 아이의 건강을 위해 집에 먼지 하나 없는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기본이며, 이유식을 시작하면서 모두 유기농 식자재만을 사용한다고 한다. 정작 본인들은 분식집에서 시켜 먹는다. 청소를 너무 많이 하고, 손을 수시로 씻어 젊은 부부의 손에는 습진이 생겼다. 보행기도 태우지 않는다고 한다. 아이를 재우기 위해 포대기를 두르지도 않는다. 언니는 예전 할머니들이 손에 침을 발라 아이 얼굴을 문지르는 일에 기겁했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정작 자신들도 지금 세대들에게 그런 대접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을 덧붙였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세상이 변하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다. 작은 조카가 태어났을 때 언니의 육아를 함께 했었다. 여자아이라 그런 것인지 예민한 것인지 잠든 조카를 이불 위에 내려놓자마자 아이는 칭얼대기 일쑤였다. 다시 아이를 업고 거실을 서성이거나 아예 밖으로 나가 재우고 들어왔다. 나 역시 아이를 등에 업고 포대기를 둘렀다. 엉덩이를 두 손으로 받히고 둥실거리면 어느새 고르게 숨을 내쉬는 아이의 체온을 등으로 느꼈다. 언니와 나나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다리에 힘이 조금씩 생기면서는 가끔은 보행기에 아이를 태웠다. 종일 태우는 것이 아니니 아이의 발육에 나쁘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요즘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보행기가 아이의 성장 발육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지며 기피하는 것이 트랜드라고 한다. 포대기에 아이를 업는 것도 안짱다리를 만들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사용하지 않는다고도 한다. 우리가 익숙하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일들이 어찌 양육의 문제만 있을까 싶다.
태어나 학령기가 되면 학교에 입학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으레 대학에 가며, 졸업하면 취업해 경제활동을 하고, 적당한 나이가 되면 결혼해 자식을 낳는 생애주기는 우리에게는 아직도 너무나 익숙한 당연함이다. 이 보통의 익숙함에서 벗어나면 생의 낙오자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나 역시 대학에 가는 일을 단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다. 졸업은 제때 하지 않았다. 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가는 일에 의미를 찾지 못했다. 4학년 1학기에 자퇴를 했다. 그리고 15년 뒤 재입학을 했다. 생활의 굴레에 갇혀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던 내게 복학은 도망갈 수 있는 구멍이었다. 뜻밖에도 공부는 재미있었다. 그 시간 동안 경험한 삶의 축적이 단순한 밑줄긋기 암기가 아닌 사유와 이해의 폭을 넓혀주었다고나 할까.
당연히 취업은 하지 않았다. 이미 사십 대로 접어든 나에게 취업의 문은 좁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교육의 현장으로 들어가 아이들과 사람들을 만났다. 최소한의 활동비를 받으며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도 그때의 경험이 내 글쓰기의 밑천이 되어주고는 한다. 박영택 미술평론가의 『예술가로 산다는 것』(마음산책, 2001년) 첫 페이지에 이런 문장이 있다.
특정한 형태로 굳어진 가치에 안주하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찾아나가는 것, 그러한 노력과 시도야말로 삶을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이자 예술가의 전제조건이다.
글을 쓰는 일도 마찬가지 아닐까. 매일 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일상에서 ‘왜?’라는 질문을 마음에 품고 사는 일, 그리고 그 과정을 기록하는 고단한 노동의 여정 말이다. 그 속에서 당연하고 익숙한 것들이 아니라 불편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진실이 무엇인지는 나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