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곡면 대현리가 고향인 이백규 씨는 아홉 살이 되던 해 청양군 원당마을로 이사를 갔다. 이후 1969년 옥계2리에 들어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1939년생 부인 이의구 씨와 혼인했다. 해방과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가난하게 살았던 이 씨는 학교 문턱도 넘지 못했지만 마을에서 똑똑하고 총명한 어르신으로 통한다.
나는 학교도 못 댕기고, 다행히 아버지께서 어떻게 구구단도 배우시고 구구단, 육갑, 언문 이 세 가지를 아버지한테 배워서 열한 살 먹어서 천자문 뗐어. 글씨 공부를 못했어. 왜냐, 분필 사야지, 먹 사야지, 붓 사야지, 이걸 무슨 돈으로 사? 천자문만 그냥 읽기만 했지. 글씨 공부를 못했지. 객지 생활헐 적이 친구들이 그려. 속았다는 겨. 아니, 말을 허는 거나, 보고 허믄 한문공부 많이 헌 걸로 알았다는 겨. 우리네 말이며, 언어가 다 천자문에서 나온 거여. 말 그대로 천자, 글자 천 개여. 글씨 써 가면서 배웠어야 글자도 다 알아보고 헐 테지만 그렇지 못해서 대충 기억만 하지. 우리네 말 다 천자에서 나온 겨. 천자문은 다른 분한테 배웠어. 그때 당시 육갑만 알아도 아는 게 많아. 난 육갑을 지금꺼지 딸딸 외어.
보령 객지 돌아다니면서 궁합 보는 것도 배워서 궁합도 봐줬네. 돈은 안 받고 궁합을 방식대로 해 보니까 소용없어. 안 맞아. 똑같은 게 나와도 이 사람은 괜찮고 이 사람은 나쁘거든? 똑같이 나빠야 하는데 그게 아니야. 안 맞아.
우리 아버지께서는 양반 행세만 하시느라고 논 한 마지기 못 얻었어. 한산이씨거든? 다른 동네에서 넘의 논 못 얻는 사람은 우리 집 밖에 없었어. 그때 논 허는 사람헌테 가서 아부해야 하거든? 명절 때 굴비 사다 주고, 술 사다 주고, 굽신굽신 해야 허는데, 내가 열여덟 먹어서 이노무 가난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다가 열아홉 살에 넘의 집 갔어. 음력 정월 열셋 날에 갔는데 하필 6·25 사변 만났네. 가물어서 밤이나 낮이나 물 품어서 논 일곱 마지기 농사지었는데, 볏모가지(이삭)가 나왔어. 반장 보는 사람이 그러대. 보국대 가야겠다고. 대전 보국대로 가서는 며칠 일 허다가 도망쳐서 왔더니, 또 의용군 가랴. 난 의용군은 못 가겠다고. 그러면 여기서 나가야 한대. 말은 지원인데 강제로 지원시키는 겨. 주인네에게 말했더니 피하라고 허대. 집에 와서 이랑고랑 산고랑 밥 먹고 가서, 풀 벼서 만지고, 그럭저럭 15일 지나니께 냅다 6·25 사변이 뒤집혔네. 주인네 한테 갔지. 나 일 해야겠다고 허니께 그만두랴. 농사는 다 지었거든? 이저 피살이 하고 관리하고 벼서, 바심 허면 되는 겨.
집에 와 가지고 아버지 보고 반계 출장소 가서 이야기 허야겄소. 아서라. 얘기 허믄 그 사람들 결단 나. 6·25 사변 때 의용군 안 가려고 주인 보고 얘기 허고서는 나가서 피허다가 수복돼서 다시 일하려고 하는데 그만
두라고 허니 결딴나지. 반계 출장소 거 가서 얘기허믄 절단 나지. 그때 살얼음판이거든. 좌익 사상 허는 분들 대끗 허믄 모가지 잘랐는디. 아버지 말씀 거역 못 해서 가을에 열아홉 살 먹은 놈이 쌀 두 짝 받으러 갔어. 볏모가지 나왔으니께. 쌀 한 짝 받아왔지. 그것도 못 준다고 허믄 고발하지. 까짓 거. 그때 쌀 한 짝이 150근. 90키로. 내가 그렇게 고생한 사람이오. 양친 부모 슬하에 크기만 했지 열아홉 살부터 가난 피허려고 돌아댕겼어. 배운 거 없으니까 농사일했지. 넘의 집 살고. 지금 같으면 어디 공장이고 회사고 들어갈 테지만 그때는 그런 것도 없고.
이 소류지 관리를 내가 34년 했슈. 여든네 살까지 했어. 한 해만, 한 해만, 좀 해달라고 해서 한 해, 한 해 한 것이 또 한 4년 했어. 팔십 먹어서 그만두려고 했는데, 그래서 팔십 넷까지 하고 내놨는디. 생각혀 봐요. 잘 못 허는 놈은 한 해 허고서 말아. 그렇게 하려면 보수나 많이 주나. 쌀 두말 값 받고서 18년 했어요. 1년 물 보는 것이 한 5개월, 6개월 따져야 혀요. 그게 말이여? 도저히 안 돼. 이 물 가지고는. 이 동네서 이러저러 허는 사람이 하나 있어. 야. 안 되겠다. 저 아래 집구석 관정 있으니 모다(모터) 사서 물 품어서 신작로에 그런디는 그 놈으로 허고 여기 것은 이 앞에 하고 그렇게 허자. 그려요. 근데 당장 어떻게 모다를 사. 내가 외상혀서 살게. 그려 그럼.
그 사람하고 같이 가서는 외상을 해서 가을에 가 주기로 하고 2만 원짜리를 하나 얻어 왔어. 그것 가지고 해 봤더니 좀 부족혀. 그래서 또 하나 사 왔지. 가을에 논 한 마지기에 2천 원씩 걷었네. 그러니께 이 너머 등대실 동네 사는 사람이 이 앞에 논이 있어. 그 사람이 그려. 나보다 한 살 더 먹었지. 어차피 돈 걷으니 10만 원씩 보수비 주자고 혀. 아니여. 나는 이제 그만 혀. 내일부터 줘. 그렇게 모여서 수세를 받았는디, 한 해만 더 하랴. 그러고서 10만 원 떼 주는 겨. 그렇게 그렇게 허다가 34년을 했어요.
물 관리여. 물 따 놔주고, 물 됐다고 허면 잠그고. 그거여. 큰물 날 때 물 넘는 거 조정해서 물문을 활딱 열어 놓고. 그 안이 두 사람을 시켜 봤는디 안 되지. 그니께 그만두라고 허고서는 나보다 6살 더 먹은 친구가 그려. 내 앞으로 오더니 안 되겄어. 자네가 아주 종신제 하세. 종신제라는 게 죽을 때까지야. 그래. 허마. 내가 배움도 없고, 있는 것도 없고, 동네 다 뭐 헐 것도 없고 그거라도 그냥 한다 그랬어. 쌀 두 말 값도 싫어. 안 된댜. 이거라도 받아야지. 동네 사람들이 걷어 주는 거지. 밑 자본이 있었지.
수리계에서 원래 남은 돈이 있어서. 그래서 받기 시작해서 내내 했는디. 물속 옹벽에 적어 놨어. 그런데 내가 잊어버렸지. 오래돼서 글자가 잘 안 보일 텐데, 거기 가야 알 수 있어. 물고개로 내려가서 좌편이여. 대구뚝 편이여. 높은 옹벽에 연도가 적혀 있슈. 굳기 전에 막대기로 써 놨슈.
장곡면 옥계2리 자연마을인 우렁배에는 예나 지금이나 이백규 씨 집, 한 가구만이 거주하고 있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은 이백규 씨를 우렁배 아저씨라 불렀다. 기역자로 굽은 이백규 씨가 지팡이를 들고 저수지로 성큼성큼 나선다. 높이가 높아 위험해 보이는 둑을 다니는 이백규 씨의 뒷모습이 거리낌 없다. 34년 동안 물 관리를 했던 별티저수지의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는 이백규 씨의 옆얼굴에 오래된 세월의 흔적이 보인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세상의 현재와 미래에 참여하고, 궤적을 남긴다. 비록 그것이 별 볼일 없는 하찮은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지금은 누구의 도움 없이는 마을회관에 가는 일도 힘들어졌지만, 이 씨의 마을에 대한 애정과 노력을 기억하는 일은 마을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