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배웅하러 갑니다

by 김보리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 죽는다. 살아 있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러니 죽음에 그리 연연하거나 슬퍼할 일은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나의 가족과 이웃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애통해한다. 당연하다. 그 애통함을 달래주고 망자의 저승 가는 길을 배웅하는 일, 바로 상여다.


2020년 7월 1일 마을 최고령자였던 1926년생 고(故) 지진섭 씨가 영면했다. 지진섭 씨의 큰아들 지대성 씨는 “아버님이 편찮으시면서 고향에 돌아와 모셨는데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셔서 슬픔을 금할 길이 없다”라며 “마을에서 구장(지금의 이장)과 노인회장을 오래 보셨던 분이다”라고 말한다.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고 자택으로 와 발인제를 지낸다. 당연히 마을 주민들이 모여 고인을 떠나보내는 슬픔을 함께 한다. 장지로 운구를 나르는 일에 마을 청년들이 함께 한다. 마을의 전통이다. 상여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동안 임시로 거처하는 중간 집의 역할을 한다. 단순히 주검을 운반하는 도구가 아니다. 상여는 망자가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동안 겪을 불안, 두려움, 아쉬움, 슬픔 등을 밝고 아름다운 색깔과 여러 가지

모양의 형상으로 장식한 상여를 통해 위로하고 배웅하는 일이다.


과거 상여는 마을에서 직접 제작해 보관하기도 했고, 상여를 제작하는 기술자에 의뢰해 마을기금으로 구매해 사용했다. 이를 보관하는 곳이 바로 상엿집이다. (사)나라얼연구소 황영례 연구소장은 “혼자 왔지만 마을 동네에서 한 사람의 죽음에 상여를 매고 장지까지 갈 때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왔다. 상여 뒤에서 손을 흔들어주고 그 사람의 삶을 이야기하고 동네 사람들이 거기에서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면서 오늘 또 우리 한 사람을 잘 모셨다 했다”라며 “일반 서민들은 상여를 타고 장지까지 가는 것이 사실 꿈이었다. 살 때는 비록 양반처럼, 임금처럼 살지 못했지만 내가 죽어서 갖는 집, 무덤은 천년 집이라고 하는데 천년 집으로 갈 동안에는 상여를 타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그래서 동네에서 합의를 한 것이다. 누구나 우리 삶과 죽음은 함께 하니까 이 죽음의 문화를 우리가 죽어서도 상여를 탈 수 있게 공동으로 제작을 하자. 그래서 마을에서 공동으로 상여를 만들었고,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상엿집이다”라고 설명한다.


상여가 나갈 때 부르는 노래를 '상여소리'라 한다. 상여소리는 망자의 입장에서 이별의 슬픔과 회환, 산 사

람에 대한 당부를 엮어 나가는 소리다. 상여소리는 평지, 경사길, 다리, 장지에서 등 상황에 따라 선율과 사설이 다르며 지역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선소리꾼이 요령을 흔들며 “북망산천이 머다더니 대문 밖이 북망일세”등으로 소리를 메기면 상여꾼들이 “어허 어허 어 거리 넘차 어허” 등으로 소리를 받는다.


구항면 오봉리 봉지마을은 상이 발생할 경우 마을 대대로 지금까지 상여를 메고 있다. 봉지마을 상엿집은 큰말 버스정류장에 위치했는데 1990년대 말 도로가 나면서 없어졌다. 이후 꽃상여가 등장했고 마을에서는 상이 발생하면 꽃상여를 구입하고, 마을 청년들이 상여를 맨다. 단 결혼을 하지 않은 청년은 상여를 맬 수 없다.


마을에서 지금까지 상여소리를 하는 이는 1947년생 김황식 씨와 1954년생 김중시 씨다. 김황식 씨는 “어디서 배운 적은 없다. 내가 원래 청이 좋은 편이고 글씨는 잘 모르지만 두서너 번만 보면 다 하는 편이다”라고 말한다. 김중시 씨는 “젊을 때 국악에 관심이 있었고 판소리나 베뱅이굿 같은 것을 들었을 뿐이다”라며 “나 역시 특별하게 배운 적은 없다. 어르신들이 하던 소리를 듣고 느끼는 대로, 그때 그때 흥에 겨워 나오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서른 살이 넘으면서 김황식 씨의 뒤를 이어 마을에서 상여소리를 하는 김중시 씨는 상여가 나가는 날, 주민들과 상주들이 건네는 술 한 잔에 망자의 슬픔을 담아 요령을 흔들며 상여소리를 한다. 그때마다 상황은 다르지만 “백월산 줄기에서 조촘조촘 내려와 명당자리인데 누구누구 후손 대대손손 자손만대 하소”라고 선소리를 하면 상여꾼들이 “어허 허허허 어허 허허허”의 후렴 소리를 한다.


김황식 씨는 “돌아가신 양반인데 최준갑 씨가 우리 마을에서 소리를 잘했다. 회심곡 같은 것을 응용해 소리를 한다”라며 “간가 간다 나는 간다 꽃 피고 춘삼월에 다시 올까 명사십리 해당화야, 이런 식으로 상여소리를 하며 구체적으로 전해져 오는 것은 없다”라고 말한다.


시신을 모신 뒤에는 회닫이를 한다. 흙을 다지며 내는 소리다. 이 또한 특별히 정해진 소리는 없으며 상황에 따라 “어허허 허허 어기여차 갈꼬” 등의 소리를 내며 내광을 돈다.


상엿집에 상여를 보관할 당시에는 자택에서 장례를 치르고 상여를 조립, 요여가마에 영정을 모셨다. 요여(腰與)가마는 주검을 묻고 혼백과 신주를 모시고 돌아오는 작은 가마다. ‘영여’ 또는 ‘영거’라고도 한다. 요여가마가 앞서면 그 뒤를 상여가 따른다. 봉지마을에서는 호상일 경우 사위를 상여에 태우기도 했다. 상여는 고인의 자택을 출발해 고인이 농사를 짓던 논밭을 돌아 장지로 향했다. 마을에는 과거 염습을 하던 이가 있었는데 고(故) 김용재 씨와 김종환 씨의 부친인 고(故) 김정용 씨다.


상여 앞에는 만장이 들린다. 만장에 적는 문구도 그때마다 다르지만 거의 대부분 망자의 저승 가는 길을 염원하는 문구를 적는다. 만장은 삼베 만장과 붉은색 만장 두 종류를 준비한다. 삼베 만장은 매장하면서 시신 위에 덮고 다시 그 위에 빨간색 만장을 덮는 폐백을 한다.


김중시 씨는 “우리 마을에서는 만장을 품앗이로 했다. 가령 내 부모가 돌아가시면 지난번 돌아가신 누구누구 집에서 만장을 만들어 주는 방식이다”라고 설명한다.


전 세계적으로 병원에 장례식장이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고 한다. 1980년대 일부 병원에서 시체안치소를 장례식장으로 불법으로 바꿔 영업을 시작하면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생각해 앞다퉈 장례식장을 만들기 시작해 지금에 이른다. 2006년 한국갤럽 발표 자료에 따르면 지난 1994년까지 70% 이상은 장례를 집에서 지냈는데 11년이 지난 2005년에는 6.9%로 떨어졌다. 장례문화가 집에서 전문장례식장으로 넘어간 것이다.


봉지마을에서는 집에서 장례를 치르지는 않지만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른 후 발인하는 날, 자택에서 발인제를 지내고 상여가 나간다. 마을 어르신들이 상여를 없애면 안 된다는 말에 주민들이 합의를 했다. 꽃상여를 사용하되 없는 집이나 잘 사는 집이나 꽃상여 비용을 동일하게 적용해 마을기금으로 구입, 사용하기로 했다. 더불어 마을에서는 광내에 시신만 모시고, 관은 태운다. 장례에 들어갔던 모든 물건과 음식은 장지에서 모두 처분하며 돌아올 때는 빈 상만 들고 오는 것이 원칙이다. 마을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합의다.


‘토지’의 박경리 작가는 생전에 ‘작가세계’와의 대담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죽지 않는다면 절대로 살아 있다는 것을 인식 못해요. 죽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 있다는 인식을 하거든요. 영원히 사는 거 같으면 시간도 인식 안 하고 우리가 살아 있다는 생각도 못 할 거예요. 죽기 때문에 새로운 탄생을 인식하고 우리에게 형벌을 신이 주었다고 임의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축복이기도 한 거죠. 내가 이런 얘기를 했어요. 이 세상에 제일 무서운 것은 안 죽는 것이다. 아무리 지독한 박테

리아도 그게 생명일 때는 그것을 죽이는 약이 있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해결책이 있다. 그런데 안 죽는 것은 영원히 사는 건데 영원히 산다는 것은 정지다. 정지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끝이다. 우리가 비닐이 무섭다는 것은 안 죽거든요. 쇠뭉치고 핵이고 뭐고 다 죽지 않거든요. 영혼이 없단 말이에요. 영혼이 없다는 것, 능동성이 없다는 것 그게 제일 무서운 거다. 능동성이 없다는 것은 생명이 없다는 것이고 그 자체가 영원한 죽음이죠. 동시에 영원한 존재이지요. 죽어 있는 것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


비록 몸은 그 생명을 다해 흙으로 돌아갔지만 영혼을 달래고 위로해주는 일이 상장례다. 고인이 평소 생활하던 자택과 논밭, 마을 주변을 돌며 망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저승으로 가는 망자를 배웅하는 일이 상여다.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봉지마을 주민들이 모두 모여 어제를 함께 한 고인을 배웅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