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첫 닭이 운다.
“꼬끼오~”
시골의 낭만적인 닭 울음소리를 생각하면 안 된다. 그때부터 양계장에서의 노동이 무한 반복된다. 사람과 똑같이 하루 세 번 사료를 먹는 닭은 아침 6시, 점심 12시, 저녁 6시에 사료를 줘야 한다. 틈틈이 계란-주민들은 주로 알이라 부른다-을 수거하고, 물통에 물을 주며, 계란을 저울에 달아 왕란, 특란, 대란, 중란, 소란, 경란, 등외로 구분한다.
난자(계란판을 말함)에 알을 담아서 도매 장사에게 넘기고, 계분을 말리는 일까지 해야 겨우 일이 마무리된다. 겨울이면 물통의 물이 얼어 맨손으로 얼음을 깨고 다시 물을 주며, 한여름에는 환기가 되지 않는 시설에서 더위와 싸워야 했고, 마당에 널린 닭똥으로 인해 파리와 함께 살아야 했다. 먹고사는 일이었기에 그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문제 제기하지 않았다. 서로가 배려하고 더불어 살아가던 시절이었다.
홍성읍 월산2리는 1990년대까지 양계마을로 유명했다. 1950년대 고(故) 장동환 씨가 만주에서 들어와 중국인들과 배추 장사를 하다가 1960년대 아들 고(故) 장관섭 씨가 양계를 시작하면서 25여 가구가 양계장을 운영, 계란과 노계, 계분을 생산해 판매했다.
1956년생 장두진 씨는 조모 고(故) 백흠열 씨가 양계장을 하던 당시를 기억한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할머니가 닭 60 만수를 키웠다. 흙벽돌로 창고를 만들어 알 창고로 사용하고 채소와 음식 찌꺼기 등을 사료로 줬다. 노계는 집에서 잡아 시장이나 식당에 팔고 닭똥은 마당에 말려 거름으로 판매했다. 할머니가 10년 정도 하다가 그만뒀다.”
천안 등지에 있는 부화장에서 병아리를 사 오면 초생추, 중추, 대추, 산란계까지 4~6개월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산란계가 알을 낳는 기간은 1년~3년으로 적절한 시기에 병아리를 교체해줘야 한다. 생산된 알은 난자에 담아 판매하고, 노계는 닭 중개인인 도북꾼에게, 계분은 마당에 말려 퇴비로 판매했다.
1943년생 엄희자 씨는 1968년부터 1997년까지 양계장을 운영했다.
“아까시나무 잎이나 멸치 등을 빻아 사료에 배합해 사용했다. 초창기만 해도 난자가 없어 짚꾸러미에 알을 넣어 판매했다. 홍성읍내, 삽교에서 아주머니들이 알을 사러 많이 왔다. 옛날에는 하루 종일 일해도 머슴 하루 품값이 300원이었다. 어렵지만 닭 키우는 것이 더 나았다. 우리 마을을 나는 어촌이라 부른다. 도시도 아니고 시골도 아닌 어중간 한해서 어촌 말이다.”
우리나라 양계는 1960년대 말 부업에서 시작해 산란계와 육계로 분리되면서 본격화되어 1990년대 초반에는 산란계 규모화가 이뤄졌다. 1990년대 3단 케이지가 도입됐고, 1990년대 중후반부터 창이 없이 환기구를 이용하는 사육시설인 무창계사에 적립식 케이지가 7단에서 9단까지 도입되면서 양계장의 규모화는 본격화됐다. 좁은 공간에 케이지를 몇 단씩 쌓아 사육을 하기 때문에 양계장의 사육 규모는 적게는 3 만수에서 10만 수 규모로 확대됐다.
1954년생 김완호 씨는 1982년부터 양계장을 운영했다.
“15년을 하다가 가금디푸스가 두 번이나 왔고 금마면에 가서 2년을 하다가 양돈으로 바꿨다. 내가 할 때만 해도 알을 저울에 무게를 달아 난자에 담았다. 특란이 60g, 대란이 54g, 중란이 47g으로 분류해 알창고에 보관했다. 계분은 겨우내 두면 4.5톤 트럭이 싣고 가 서산이나 태안 등의 마늘밭 퇴비로 사용됐다.”
닭똥은 마당에 모아 갈퀴로 여러 번 섞어 말린다. 비가 오면 덮어두고 해가 뜨면 말리기를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냄새와 파리는 당연히 따라왔다. 마을 안길을 다니면서 입 벌리고 다니면 안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978년부터 2015년까지 양계장을 했던 김택명, 조순년 씨는 가장 늦게까지 양계장을 운영했다. 현재는 김택명 씨 동생 김택성 씨가 금마면에서 청송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알 배달오라고 하면 가져다주고, 깨진 것은 덤으로 주기도 했다. 리어카에 난자를 실으면 7~80판이 들어간다. 리어카에 알을 담아 개미 마냥 매일 팔러 다녔다. 그러다가 경운기 빌려 다니고 좀 더 지나 화물차를 구입해 알 장사를 본격적으로 했다. 우리 것도 팔고 다른 사람 알도 가져다가 팔아줬다. 지금은 환경 등을 생각하니 냄새나면 바로 민원 들어오지만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가업을 이어받아 현재 3대가 양계장을 운영하는 1964년생 이환진 씨는 “그때는 그 때가 맞다”라고 설명한다. 1975년 이환진 씨 부친 고(故) 이기순 씨가 병아리 50 수로 시작, 1987년부터 이환진 씨가 양계장을 이어받았다.
“가금디푸스는 그 당시 백신이 없어 타격이 컸다. 알은 낳지 않고 그냥 죽었다. 그 당시 환경으로는 그런 사육 방법이 맞았다. 복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누구 하나 시스템이나 롤모델을 제시하는 사람도 없었다. 한여름에는 양계장 안이 더워 메리야스와 마스크만 쓰고 일했다. 그전에는 마스크도 없이 일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면서 관절로 인해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계분도 한 차에 5만 원이었지만 지금은 돈을 주고 버려야 한다. 계분을 만들 때는 삽으로 모아 비가 오면 덮고 2시간마다 갈퀴로 섞어줘야 했다. 여름에는 파리와 냄새 때문에 모기장도 쳐보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파리약 값만 100만 원을 사용하기도 했다.”
1993년 부친이 운영하던 양계장은 2000년대 초반 가축사육제한구역으로 지정되면서 현재는 홍성읍 신성리에서 닭 9700수, 청계 3200수를 사육하고 있다. 1987년 양계장을 이어받으면서 이환진 씨는 1990년에 양계4H를 조직했다. 월산마을 20여 농가들이 모여 사료, 약품, 기자재 등을 공동 구매하고, 사료 회사를 통해 정기교육을 진행하며 일본으로 선진지 견학을 다녀왔다. 4H는 실천을 통해 배운다는 취지로 설립된 세계적인 청소년 단체로, 머리(Head), 마음(Heart), 건강(Health), 손(Hands)을 의미하는 영단어의 머리글자를 의미한다. 로고는 네잎 클로버이며 각각의 잎사귀는 4개의 H인 지(智), 덕(德), 노(勞), 체(體)를 상징한다.
“1992년 농어촌청소년 대상을 받고 1998년까지 양계4H가 운영됐다. 4H의 정신이 좋아 농장 이름도 크로바 양계로 했다.”
크로바 양계는 2007년부터 가공에 도전해 맥반석 계란을 생산하고 있다. 구운 계란이 성공하기까지 2년의 시간이 걸렸다. 계란 2만 7000개를 처분하기도 했다. 현재는 클로렌란 계란, 구운 계란 등을 온라인과 오프라인 판매를 하고 있다.
“부친의 양계장으로 시작해 가공과 환경만 늘렸지 그 외 소득을 올리기 위해 한 것은 없다. 농업은 의식을 가지지 않으면 어렵다. 부친의 업을 이어받아 적어도 부친이 물려준 것을 보존하자는 생각이다. 가업을 승계해 지금 내 자식들이 함께 한다는 것이 그 무엇보다 자랑스럽다.”
현재 크로바 양계는 이환진 씨의 아들 1992년생 이민엽 씨가 농장을, 1994년생 이찬엽 씨가 가공공장을, 2000년생 이승엽 씨가 포장 및 판매 등을 책임지며 운영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가업승계를 만들기까지 쉬운 과정만은 아니었다. 닭의 생체리듬에 맞춰 새벽 4시에 기상해 밤 11시까지 배달을 해야 하루 일과가 마감됐다.
“지금까지 가족끼리 1박으로 여행 다녀온 적이 없다. 모든 일과가 닭에게 맞춰져 있으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부친은 생전에도 집에 손님이 오면 가장 따뜻한 계란을 골라 손님에게 드렸다. 사실 최고의 계란은 우리는 못 먹는다. 일하는 사람은 등외도 아닌 파란이나 오란을 먹는다.”
월산2리 양계장은 2014년 가축사육제한구역으로 지정되면서 대부분이 정리됐다. 자신의 집에서 계란을 먹기 위해 닭 몇 마리 키우던 시대에서 이제는 동물 복지와 건강한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 환경에 대한 부분까지 고민하며 가축을 키워야 하는 시대다. 변한 시대만큼 그에 맞춰 최신 시설을 도입하고, 친환경적인 방법으로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는 지금, 그럼에도 왜 우리는 소 한 두 마리, 돼지 한 두 마리, 닭 한 두 마리를 키웠던 그 때를 그리워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