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2002년생인데 5살 때 원에 들어왔어요. 저는 부모님 하고 왕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정확한 이유는 모르고 제가 들은 이야기는 아버지가 외도를 해서 어머니가 경제적 이유로 키우지 못했고, 할머니 손에 맡겨졌어요. 근데 할머니가 나이가 많으시니까 시청 통해서 들어왔다고 알고 있거든요. 부모에 대한 기억이 진짜 아예 없고, 할머니만 어렸을 때 연고자 외박이라고 해서 몇 번 나갔다 왔는데 그것도 엄청 흐릿해요. 할머니 돌아가실 때도 기억 없어요. 저는 명절 때도 항상 원내에 있었거든요. 연고자 기간에 다른 친구들이 나가면 처음엔 ‘나는 왜 없지? 왜 안 가지?’ 하다가 어느 순간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오히려 원 생활에 더 몰두했던 것 같아요. 원에 있으면서 조금 방황했던 친구들도 많거든요.
어렸을 때는 그냥 궁금하다 정도? 내 부모님이 어떻게 생겼고 나는 어디를 닮았을까, 이런 게 궁금했어요. 만나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죠. 근데 퇴소한 한 오빠가 부모와 왕래가 없었는데 어느 순간 부모가 찾아왔대요. 근데 자기가 보고 싶어서 찾아온 게 아니라 오빠한테서 뗄 수 있는 서류가 필요해서 왔대요. 다른 언니 오빠들도 비슷한 상황이어서 오히려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궁금증이나 이런 것들을 조금 삭혔던 것 같아요. 저는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 외동이라고 생각하고 살았거든요? 대학교 입학할 때 가족관계증명서를 처음 떼 봤는데 아버지는 사망하셨다고 되어 있고 어머니 밑에 자녀가 있고 제가 막내로 뜨더라고요. 그때 저랑 동갑인 남자애는 몇 년 전에 선생님 몰래 서류를 열람했는데 자기도 형이 있었다고 하면서 ‘너 외동 아니면 어떡할 거냐?’고 하더라고요. ‘내가 왜 외동이 아니야?’ 이렇게만 했는데 정말 딱 그거 보는데 ‘3남매 중에 막내인데? 어머! 진짜!’ 하면서 둘이 봤었거든요. 조금 오래 근무하신 선생님들 추측으로는 아버지가 외도를 했으니까 새엄마 쪽 아이들이 아니지 않을까 하셨거든요. 가장 첫째가 남자 이름이었고 둘째가 여자, 그다음에 막내가 저였어요. 그때 감정을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요. 친구랑 같이 있을 때는 내가 외동이 아니라고 하면서 어이가 없어 친구랑 둘이 막 웃었거든요. 그러다가 외동이 아니면 어쨌든 나한테 가족이 더 있다는 얘기인데, 이름도 되게 비슷하더라고요. 조금 잊고 살았던 감정이 더 올라왔던 것 같아요. 궁금하긴 해요. 근데 언니 오빠들 얘기를 들어보면 거의 상처를 많이 받는다고. 잘 지내고 있는데 내가 거기에 끼어드는 것 같아 자꾸 피하게 되는 마음이 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내 부모지만 오히려 후원자님들이 더 편하더라고요.
오래전 전신마취를 한 적이 있다. 수술 뒤 8시간 만에 깨어나니 극심한 육체적 통증이 밀려온다. 진통제를 맞고 정신을 차리고 나니 8시간 동안 기억이 부재하다. 소름이 오소소 오르는 수술실의 차가운 냉기, 눈이 부시도록 환한 형광등 불빛조차도 마취 전의 기억인지 가물거린다. 완전히 소실된 기억이 불안함으로 다가온다. 내가 무엇을 했는지, 어떤 자세로 있었는지, 수술실 밖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 의사들이 어떤 메스로 내 신체를 가르고 헤집어 놓았는지, 나는 정말 많이 아팠는지……. 너의 가족에 대한 부재의 기억에 적절한 비유가 될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것이 겨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밖에 되지 않는다. 가족에 대한 얄팍하지만 당연한 기억이 나에게만 허용된 것 같다. 그런 내 마음을 너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 나는 애써 생긋 웃어 보이며 시설과 학교생활이 어떠했는지 물어본다.
제가 2006년에 입소했는데 2010년 전까지는 원내 분위기가 조금 폭력적이었던 부분이 있었던 거 같아요. 원내 가장 맏언니 맏오빠 이때가 조금 심하고 그 언니 오빠들이 퇴소하고 괜찮았어요. 저랑 동갑인 남자애가 있는데 그 친구도 오빠들한테 되게 많이 맞았거든요. 근데 걔도 동생들을 안 때리진 않았단 말이에요. 저는 친구니까 볼 때마다 엄청 뭐라고 했어요. 네가 맞았어도 우리라도 이걸 멈춰야지 않겠냐고 얘기를 했었거든요. 우리가 이런 마음이 드는 것처럼 얘네를 이렇게 해버리면 얘네도 나중에 커서 그런 마음이 들 텐데 계속 악순환이지 않냐. 어쨌든 우리가 살아왔던 공간인데 우리라도 이거 멈추자 했었거든요. 그 이후에는 때리지 않더라고요. 저도 맞아보긴 했어요. 언니들이 저한테 심부름을 너무 많이 시키니까. 그때 당시에 제 또래가 많았거든요. 여자애들이 저 포함해서 5명 있었는데 저한테만 시키는 거죠. 제 불만이 애들이 많은데 왜 나만 시키냐, 나 언니 하인 아니다, 이렇게 얘기를 했는데 언니들은 제가 말귀를 제일 잘 알아먹고 시켰을 때 빨리빨리 하니까 너를 시키는 거라고. 중학생 때였어요. 어느 날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언니들이 불러서 갔는데 언니들이 치킨을 먹고 있었고 음료수를 따달라고. 손에 양념이 묻어서 병을 못 따니까 따달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너무 화가 나서 소리 지르면서 언니랑 싸웠어요. 처음으로. 그땐 저도 너무 화가 나서 기를 안 죽이고 싸웠거든요. 그러다가 가장 큰 언니가 너 나와, 이렇게 한 거죠. 나왔는데 언니가 저쪽에 있었는데 제가 언니를 째려보니까 언니가 저에게 발차기를 하더라고요. 그냥 제 몸을 이렇게 발로 찼어요. 그래서 그때 언니들한테 까불면 안 되겠다. 나도 내 얘기는 하되 좀 적당히 까불어야겠다. 사실 그때 느꼈던 게 뭐냐면 단체 생활은 어쩔 수가 없다는 거. 다 같이 생활하려면 분명 규칙과 위계질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학교생활은 그렇게 어렵진 않았어요. 중학교 때까지는 동네가 작아서 초등학생 때 9명이 졸업했는데 6명이 우리 동네 친구들이었고, 중학교는 그 초등학생 애들이랑 다 같이 갔어요.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다 같은 반이었고. 고등학교 가서가 문제였는데 중학교에서는 친구들이 그냥 자연스럽게 알았는데 고등학생 때까지는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그 상황을 몰랐었거든요. 근데 제가 말하지 않았는데 제가 원에 산다는 걸 친구들이 알고 있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저랑 중학생 때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저랑 다른 반이 됐는데 고등학교 올라오면서 그 친구가 얘기하고 다닌 거죠. 나중에 물어보니까 저랑 같은 반이 됐던 어떤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랑 제 중학교 때 친구가 친해지고 싶었던 거예요. 중학교 때 친구는 이 친구가 저랑 친하게 지내는 게 질투가 나서 그랬다고 얘기하면서 사과하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친구들이 그 얘기를 듣고 ‘우리는 그걸 알기 전이랑 후랑 다른 게 없다’, ‘너는 그냥 박지수다’, 이러면서 편지도 써 주고 그랬어요. 그때 집 가는 길에 엄청 울었어요. 버스에서 너무 우니까 기사 아저씨가 버스 세우고 ‘학생 왜 그래?’ 하는데도 막 눈물이 났어요. 지금 그 친구들하고 자주는 못 봐도 어제 만난 사람처럼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