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원래 작년에 졸업했어야 했는데 한 과목을 더 들어야 해서 여름에 졸업하고 2월에 퇴소해야 해요. 퇴소하면 개인 공간이 생겨서 좋기도 하지만 스스로 먹고살아야 하니까 걱정이 되기도 하죠. 대학 다니면서 방학 때 알바를 해봤는데 시청이나 여름철 해수욕장 안내 같은 알바는 좀 괜찮았어요. 그런데 카페 같은 곳은 알바가 어렵더라고요. 일머리가 없어서. 실수를 많이 해서 오래 못 했어요. 작년 2월에 기업에서 학교로 신입사원을 몇 명 보내라고 연락이 왔어요. 그 명단 중에 제가 있더라고요. 깜짝 놀랐죠. 지원했다가 욕만 먹고 잘리는 건 아닐까? 잘할 수 있을까? 적응할 자신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포기했죠. 그때 저 빼고 9명이 지원했는데 전부 합격했어요. 만약 그때 했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도 하죠. 매일 생각하죠. 뭘 해야 하는지. 제가 하고 싶은 일은 유튜버예요. 주제는 게임과 소통인데 작년부터 채널 만들어서 조금씩 하고 있어요. 제 개인 공간이 생기면 게임 환경을 만들 생각이에요. 원에서는 애들이 맨날 싸우고 떠들어서 편집에 집중할 수가 없어요. 최대한 환경을 마련하고 실시간 방송하면서 부족한 부분도 채워나가야죠. 목소리나 발음 같은 거, 마이크 음질이나 이런 부분들을 보완해 나갈 생각이에요. 제일 답답한 건 게임하면서 소리 지르고 싶은데 못 하는 거? 제 컴퓨터가 있는데 제가 알바해서 산 거예요. 퇴소하면서 가지고 나가야죠.
잘하는 것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하나. 인생의 딜레마다. 잘하는 것을 찾아 일하는 순간 잘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자책감이 생기기도 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하자니 나의 가난에 빈곤을 더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된다. 무엇하나 속 시원하게 선택하지 못한다. 너는 혼자 고민한다. 그런 너를 보며 동생들은 무서워한다. 너는 그저 관심이 없을 뿐이다. 가끔 잠 못 이루는 밤이면 심심하고 외롭다. 새벽 2시 정도는 되어야 잠이 든다. 아침 6시면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이 일어나 화장실을 들락거린다. 모두 한 공간에 모여 있으니 개인 생활은 없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 큰소리를 내며 말하는 아이들, 싸우는 아이들. 너는 이불을 머리 위로 뒤집어쓴다. 모두가 등교하고 나면 너의 잠은 다시 시작한다.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불 밖을 벗어난다. 문득 너의 웅크린 잠을 다독이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괜찮다고, 아침에 일어나면 그저 또 하루가 시작될 뿐이라고. 그저 상상만 해본다.
자립이요? 무섭죠. 목장에 있던 양이 밖으로 나와 늑대가 있는 야생에 버려지는 느낌이랄까? 동시에 맛있는 풀도 있지만 사이사이 양을 헤치는 늑대도 있는 그런 상황? 가끔 자립청년들 자살 소식 들으면 저도 그렇게 되는 건 아닐까 싶어 무서워요. 굶어 죽어도 자살하지 않겠다는 신념은 있어요. 그래도 자살하는 순간까지 제가 몰락하지 않을까 생각하면 무서워요.
데이비드 허친스의 『늑대와 양에 관한 진실』(바다어린이, 2007)이라는 동화책이 있다. 늑대는 언제나 양을 잡아먹었고 양에게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이었다. 언제라도 늑대에게 잡아먹힐지 모르는 상태로 사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양들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양 오토는 늑대에게 더 이상 죽지 않는 꿈이 있었다. 오토는 말한다. 우리의 약점을 정면으로 바라보기 두려운 나머지 늑대의 수가 많다고 안도하는 것뿐이라고. 늑대들이 넘어오지 않게 울타리를 쳤지만 늑대는 울타리를 뛰어넘는 방법을 배워 양들을 잡아먹는다. 양들은 끊임없이 배우는 양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어느 날 오토가 사라진다. 다른 양들은 늑대가 물을 건너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큰 연못을 만든다. 늑대는 더 이상 오지 않았고, 양들의 두려움도 사라졌다. 마지막 페이지에 이런 문장이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 옆에는 늑대들이 연장을 들고 무언가를 개발 중인 그림이 있다.
작가는 어떤 진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늑대는 늑대일 뿐이고 양은 양일뿐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늑대는 야생동물이니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것일 뿐이고, 양은 무리 지어 살며 사람에게 가축화가 되어 있어 온순하게 길들이기 쉽다는 점이 있을 뿐이다. 나의 약점을 정면으로 바라보기 두려운 것은 양들만은 아닐 것이다. 나의 못남, 부족함, 어설픔을 탓하는 시간이 나를 몰락으로 몰아가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늑대는 핑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물네 살 어느 날이었다. 누군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나는 무작정 뛰고 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이마에서 흐르기 시작한 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며 목덜미가 뜨겁다. 이제라도, 아니 지금이라도 달려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달리는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 내일 먹어야 할 밥, 내 한 몸 누일 수 있는 따뜻한 집, 어디엔가 나의 노동력을 팔 수 있는 직장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다. 30분 넘게 달렸을까. 눈앞에 막다른 골목이 나온다. 뛰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면서 벽 앞에 서서 숨을 헐떡거린다. 막다른 골목에 선 채로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주문을 건다.
나는 가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쉬고 있을 뿐이다.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다만 버티고 견디어 낼 것이다.
제가 중학교 입학하고 한 달 정도 지나서 영어 선생님이 부르더라고요. 혼나는 줄 알고 쫄아서 갔는데 선생님이 제 주머니에 돈을 넣어주시는 거예요. 2~3만 원 정도 된 거 같아요. 왜 그러시냐고, 안 주셔도 된다고. 선생님이 원 생활하면서 용돈 부족할 텐데 쓰라고. 그런데 지금까지도 그러세요. 가끔 불러서 밥 먹자고 하시고, 가시면서 용돈 주시고. 선생님을 닮고 싶고, 꼭 보답하고 죽어야겠다 생각하죠. 그 선생님처럼 여유 있는 어른이 되고 싶어요.
너는 마음의 여유도 없고, 돈도 없고, 다방면으로 부족하다고 말한다. 청춘을 지나 어른이 된다는 것은 뭘까? 40평대 아파트에 거주하며, AI 가전을 사용하고, 지중해식 식단을 먹으면 어른이 되는 것일까. 그저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면서 늙어가는 것일 뿐인 것은 아닐지. 젊음과 늙음의 경계는 늘 애매모호하다.
너와 만난 뒤 나는 지독한 허기를 느낀다.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너는 시설에서 밥을 먹고 나온 길이라고 한다. 너를 데려다주고 후미진 골목의 한 허름한 식당에 들어선다. 낡은 식탁과 간이의자 몇 개가 있다. 육십 대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두 사람이 한 테이블, 반주를 곁들여 국밥을 먹고 있는 오십 대 중반 정도의 남성이 있다. 그 사이 나도 있다. 주방에서는 돼지고기 삶는 냄새가 진동한다. 돼지국밥은 평소 잘 먹지 않지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이 허기짐을 빨리 해결하고 싶었다.
부추가 듬뿍 들어간 돼지국밥 국물을 후후 불어 입에 넣는다. 목울대를 넘어가며 뜨겁다. 깍두기 한 입을 베어 문다. 아작 씹히는 소리에 고개를 든다. 반대편 식탁에서 혼자 밥 먹는 이와 눈이 마주친다. 국밥과 소주 한 병을 비운 사내는 웃옷을 집어 들고 내 옆을 지나간다. 술 냄새가 가볍다. 오히려 미혹한 삶의 흔적이 느껴진다. 문득 국밥에 소주 한 잔을 말아먹는 삶의 피로함에도, 콧등을 타고 흐르는 미지근한 땀에 삶의 기대감이 불끈 솟아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빛바랜 선팅을 비집고 들어오는 햇빛에 눈을 찌푸린다. 내 온몸을 비춰줄 햇볕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는 결의가 느껴진다. 국밥 건더기는 반 이상 남았다. 뚝배기를 수저로 휘젓다가 이내 내려놓고 만다. 점심도 저녁도 아닌 애매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