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우리 집

by 김보리

나무의 연둣빛이 초록으로 변해가던 날이었다. 생활복지사 선생님이 동네 산책을 가자고 한다. 아이 A와 아이 D는 시설에 온 후 포동포동 살이 올랐다.


A는 얼마 전 학교에서 받은 체력 검사에서 ‘비만’이라고 적힌 종이를 가져왔다. 아이의 볼은 적당하게 통통했다. 마당에서 뛰어놀다 들어올 때면 통통한 볼살이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을 때도 있다. 하교 후 아이는 늘 무언가를 먹으며 텔레비전을 본다. 라면이나 과자, 음료수,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음식을 대할 때 아이의 표정은 언제나 진지하다. 그것은 무엇이든 다 먹고야 말겠다는 확고한 의지였다.


자신이 비만임을 알고 있는 D는 먹는 일에 늘 신경 썼다. 선생님이 말해준 대로 간식을 먹지 않았다. 운동은 하지 않는다. 저녁도 조금만 먹었다. 밥만 한 공기를 퍼오고 김치 한쪽과 동그랑땡 다섯 개를 가져와 먹었다. 반찬이 모자라면 더 가져다 먹지 않고 남은 밥을 단물이 나올 때까지 씹었다. 맞은편에 앉은 언니가 말한다.


-너 탄수화물만 먹으면 더 살쪄.


언니를 멀뚱하게 쳐다보던 아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놀란 내가 왜 그러냐고 물어도 눈물을 매단 채 남은 밥을 우걱우걱 밀어 넣기만 할 뿐이다. 식사를 마친 아이는 방으로 돌아와 나에게 말한다. 오늘 낮에는 간식을 먹지 않았다고, 그래서 저녁 간식은 먹어도 된다고 귀엣말을 한다. 그날 저녁 간식은 치킨이었다.


선생님과 내가 아이들 손을 하나씩 잡고 천천히 걷는다. 하천을 따라 집들이 일렬로 있고 중간중간 작은 텃밭과 청보리밭이 보인다. 어디에 숨어 있는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산 아래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도 하수구 공사를 하는 인부만이 있을 뿐이다. 텃밭을 보며 이건 상추, 이건 감자, 이건 뭐야? 아이들의 입이 쉬지 않는다. 멀리 산봉우리에 애드벌룬이 둥둥 떠 있다. 아이들이 손을 들어 애드벌룬을 가리킨다.


-와, 엄청 크다. 엄마, 우리 언제 저기 가요.

-그러자. 그런데 저기 갈려면 힘도 세야하고 살도 빼야 하는데?

-요즘 간식 안 먹어서 일 킬로는 빠진 것 같은데.

-그거로는 안 돼. 더 빼야 돼.


아이 얼굴이 시무룩해진다.


봄을 맞아 행사 안내를 하는 애드벌룬이 봄바람에 자신의 할 일을 잊은 채 마구잡이로 엉켜있다. 풍선의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흰색만이 도드라져 보인다. 황량한 겨울을 지나 봄으로 가는 문턱은 단 한 번도 쉽지 않았다. 삼월에 때아닌 폭설이 내리기도 했고, 사월에는 여름 장맛비 같은 폭우가 쏟아지기도 했다. 땅 밑에서는 수선화가 꾸역꾸역 꽃대를 밀고 올라왔고, 산수유나무에는 연한 노란빛이 영글었다. 힘들게 다가오는 봄을 마주한 그날 산책에서 나는 다연의 말이 생각난다. 지금 거주하는 집 주변에 공원이 있고 나무도 많아 신선하다고, 밖에서 혼맥 하면 너무 좋다고, 저녁에 사람들이 강아지랑 산책하고, 애들 씽씽이 타고 다니는 평화로운 풍경이 좋다는 말이. 문득 아홉 살 다연의 손을 잡고 동네를 산책하는 기분이 든다. 아이 D가 말한다.


-엄마, 저기 우리 집 보여요.


꿈을 꾸었다. 언니가 수술을 했다고 한다. 재작년에는 허리 수술을, 작년에는 무릎 수술을, 올해에는 손목 인대 수술을 할 거라고 생긋생긋 웃으며 말한다. 왜 그동안 말하지 않았냐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언니는 별거 아니라고, 나이가 들면 다 아프다고, 괜찮다고 했다. 꿈에서 깨고 나니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언니에게 문자를 했다. 언니 꿈을 꿨는데 별일 없냐고. 언니에게 ‘설마 머리 풀고 나온 건 아니지?’라는 답이 왔다. 언니의 시크함에 잠시 희미하게 웃었다.


아이 D가 태권도학원에 오지 않았다는 연락이 왔다. 선생님들이 다급해졌다. D에게 휴대전화가 없으니 주변 아이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아이 B가 중학생 언니에게 전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D가 태권도학원에 갈 시간인데 없나 봐, 언니 혹시 못 봤어?

-못 봤는데? 안 갔대?

-그런가 봐.

-알았어, 내가 알아볼게. 넌 숙제했어?

-응.

-그래, 이따 봐. 언니한테 사랑한다고 말해야지.


B가 잠시 우물쭈물한다.


-응?

-응, 사랑해.


주변이 조용해 휴대전화 너머 언니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언니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있던가? 어머니에게는? 내 기억에는 없다. 누구에게도 사랑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뱉어본 적이 없다. 낭만적 사랑에 대한 갈구나 환상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내뱉어보지도 못하고 끝난 허무한 애정 관계에 대한 시니컬함인지, 그도 아니면 ‘사랑’이라는 낯간지러운 단어를 내뱉는 것이 싫은 천성 탓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언젠가 일곱 살 아이가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난 XX를 너무 사랑해서 꼭 걔랑 결혼할 거예요. 그들에게는 사랑이 말하고 싶고, 숨기지 않는, 표현하고 싶은 그것이었다. 나는 그들 앞에서 미칠 듯한 질투심이 끓어오르다가 이내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D는 태권도학원에 가야 하는 것을 잊었다고 했다. 친구들과 학교 앞 게임기에 정신을 팔고 있었고, 지나가던 중학생 언니가 D를 발견하고 선생님에게 전화했다. D가 고개를 숙인 채 들어온다. 한참 꾸지람을 들은 D가 나에게 다가와 허리를 끌어안는다. D의 어깨를 안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돈다. 아이는 재밌는지 실실 웃는다. 나도 실실 웃었다. 아이 A가 오더니 자기도 해 달라고 한다. 이번에는 A의 어깨를 안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돈다. 세상이 빙글빙글 빠르게 돌아간다. 아이가 지금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 채 어느새 어른이 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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