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어른의 맛

by 김보리

사무실에 출근 인사를 하고 방에 돌아오니 D가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학교 안 갔네?

-오늘 치과 가야 해서 안 갔어요.


방 청소를 마치고 D가 학습지 공부하는 것을 도와준다. 학습지에는 부모님에게 선물 받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적는 칸이 있었다. 아이는 화장품이라고 적는다. 왜인지 물었다. 화장하면 예뻐지고, 그러면 친구가 많이 생겨서 좋다고 말한다. 나는 선물보다 부모님에 더 마음이 쓰였다. 정작 아이는 누구에게 선물 받는지가 아니라 어떤 선물인지가 중요해 보였다. 지금의 모습에 충실한 아이의 모습을 보며 나의 속 좁은 선입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얼마 전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아이는 부모의 죽음보다 현재의 욕망에 충실했고 나는 그 솔직함이 부러웠다. 아이는 본능과 욕구에 충실하다. 어른은 참고 견디며 억제하고 분투한다. 성실함과 책임감으로 무장된 어른에게 욕망은 감춰진다. 나는 아이에게 지금도 예뻐,라는 말 이외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아이가 피~하며 입을 삐죽거린다.


오늘따라 D의 모습이 조금 달라 보인다. 살짝 고개를 숙인 아이의 머리가 찰랑거린다. 보건 선생님이 매직기로 곱슬머리를 펴줬다고 한다. 반곱슬이나 곱슬머리인 사람은 나름 스트레스를 받는다. 파마와는 다른 단정하지 못한 곱슬거림 때문이다. 습기가 있는 날이거나 비가 오면 사정없이 휘어지는 머리카락을 아무리 매만지고 빗어도 생머리가 되지 못한다. D는 자신의 헤어스타일이 마음에 드는지 연신 손으로 매만진다. 어른이 되면 매직스트레이트를 해서 생머리로 다닐 거라고 한다. 그러라고 했다.


열한 살인 D는 어른이 되면 헤어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했다. 왜냐고 물었다.


-예쁜 머리 만지면 기분 좋잖아요?


열한 살 아이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정하는 것은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현실이 아닌 상상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 어른이 되면 꾸준하게 질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쉽지 않다. 헤어디자이너는 만성적인 위염과 다리 부종, 허리 통증에 시달린다. 제시간에 맞춰 밥을 먹기 어렵고, 하루 종일 서 있어 다리와 허리가 아프다. 그럼에도 다른 이의 머리를 만지는 일이 즐겁다면 그저 먹고사는 일을 넘어 아이의 천직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소박하고 작은 꿈이 이 거대하고 흉포한 세상에 휘둘리지 않기를, 그래서 십오 년 뒤 찰랑거리는 생머리를 한 아이와 조우해 아이의 마음과 말을 다시 듣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식사하세요,라는 진성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린다. 식당에 들어서니 삼겹살을 굽기 위해 모두가 분주하다. 위생 선생님이 한 보따리 가져온 상추를 먹기 위해 원장님이 삼겹살을 샀다고 한다. 각자의 수저와 젓가락을 챙기고 집게와 가위를 들고 테이블에 앉는다. 불판에 삼겹살이 지글지글 익고 있다. 명이나물 장아찌와 파김치만으로도 충분한 밥상이었다. D는 선생님들 사이에 앉아 알맞게 구워진 고기와 밥을 야금야금 먹는다. 다 먹은 D가 내 옆에 와 앉는다. 상추에 쌈장을 바르고, 노릇하게 구운 마늘과 고추, 삼겹살 두 점을 넣어 입안에 밀어 넣고 있었다. D가 빵빵한 내 얼굴을 보며 묻는다.


-맛있어요?


입안 가득한 쌈 때문에 고개만 끄덕인다. 마무리로 고추를 쌈장에 찍어 씹어 먹는다.


-안 매워요?

-아니, 이게 어른의 맛이지!


나는 눈을 찡긋했다.


언젠가 언니와 술을 한 잔 마시는 자리가 있었다. 번데기에 마늘과 고춧가루, 청양고추를 넣어 칼칼하게 끓인 번데기탕을 안주 삼아 먹었다. 옆에 있던 조카가 말한다.


-벌레를 왜 먹어요?


언니와 나는 킬킬대며 번데기 하나를 이쑤시개에 콕 찍어 조카에게 건네었다. 조카는 질색하며 도리질을 친다. 그 조카가 이제 서른네 살 아이 아빠가 되었다. 지금도 번데기는 안 먹는다. 어른이 되었다고 모두 입맛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어느 순간이 되면 구수한 시래기도 먹게 되고, 삭힌 홍어의 톡 쏘는 맛도 알게 된다. 맛의 감각이 확장되고 변하는 만큼 어른으로 가는 길도 자연스럽고 수월하면 좋으련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어른으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많은 굴욕과 비굴함과 서글픔을 견디어 냈던가. 수없는 상처에 진저리를 치며 빈 벽을 마주 보고 돌아누울 때도 많았다. 매일이 그날이고, 변하지 않는 상황과 애옥한 살림에 한숨을 내쉬어도 하루치의 위안을 밥그릇에 섞어 먹을 수 있고, 나눌 수 있음에 충만하기도 했다. 습관적으로 묵묵하게 살아내는 것 이외 다른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의 더께가 어깨에 쌓여 있다고 해서 모두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청춘의 토막들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어른’이 되어가고 있음에 안도했다. 그때야 비로소 어른의 맛을 아는 때가 되니까.


한편에서는 선생님들이 마무리 볶음밥을 하고 있었다. 그날만큼은 진성도 움직이지 않고 먹는 일에 열중했다. 남자 선생님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남은 고기에 잘게 썬 김치와 고추장, 참기름을 넣어 야무지게 볶았다. 알맞게 눌어붙은 밥 위에 김가루를 솔솔 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볶음밥을 한입 크게 넣으려고 할 때 D가 식당으로 다시 들어왔다.


-볶음밥 먹어.

-안 먹어요, 양치하고 왔어요.


D는 볶음밥에 손도 대지 않고 의자에 앉아 다른 사람들이 먹는 모습만을 지켜보고 있다.

이전 27화3. 우리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