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생 이선치 씨는 장곡면 옥계리 출신으로 열여덟 살에 가족 모두가 서울로 상경했다. 잇따른 사업 실패를 겪으며 서른일곱 살에 고향으로 돌아와 터를 잡았다. 고향에 돌아와 살아간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마음속 고즈넉한 풍경으로 자리하고 있는 그리움의 대상인 고향에서 노후를 보내는 일은 생각만 해도 마음 넉넉해지는 모습이다. 그러나 정작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금의환향해 고향에 돌아온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물론 그런다 해서 마을 주민들이 그를 터부시 하거나 외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자신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서울 삼양동에서 살았어. 안사람은 시골에서 부모들 허구 살고. 서울서는 부모 허구 동기간들이랑 싹 다 올라갔지. 그래서 호적을 다 파갔지. 그래 본적이 성북구로 되어 있어. 내가 하던 일을 5번이나 실패했어. 장사도 허구, 도시 생활을 못 하겠더라구. 온양으로 갈려구 근거도 없이 돌아다녔지. 근디 타 지역 가서 살기 힘들겠더라구. 돈이 있어서 고향 들어오는 건 들어올 만한데 살기 어려워서 돌아온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여. 보통 힘든 게 아니야. 서른일곱 살에 왔지. 다 넘어가는 초가집, 뗏장 넣어서 만든 집이었어. 비어 있어서 들어 왔는디 시골 오니 좋다 보니 온 거야. 시골 오기 2년 전에 부모는 다 돌아가시고 고향 와서 처음 일한 게 집 짓는 목수 일 했지. 허다 보니께 개장사를 하게 됐어. 개장사는 건달 아니면 못 혀. 소 장사는 할 만한데. 가시(텃세)가 쎄. 장에 갈려고 채비를 하고 나서는데 안식구가 어디 가냐구. 나 토끼 좀 가지고 올려 그래, 하구 나섰어. 첫날 염소 두 마리를 가지고 갔어. 먼저 개장사를 하던 사람 같은데 나이도 어려 보이더라구. 사람들이 워디서 왔냐구 하더라구. 그래 어디서 왔다구. 장사를 못 하게 하는 거야. 그러면서 이 아저씨 간댕이가 부었다구 그러더라구. 아, 이 사람아, 붓기는 내 간댕이 얌전허네. 그랬더니 내 오토바이를 쌔려 버리는 거야. 염소가 실려 있는 걸. 내버려 뒀어. 내가 그때 녹음기가 있어 가지구 녹음을 했어. 왜 녹음 허냐구. 자네들 혼 좀 내려구 한다구. 자네들만 건달 아녀, 그랬더니 이 아저씨 진짜 간이 밖으로 나왔대. 아, 이 사람아, 간댕이가 밖으로 나온 지 옛날일세, 그랬지. 그중 누구 하나가 눈치를 챘는지 뭐라 뭐라 하더니 한 씨라는 사람이 와서 텃세하는 거니 이해하쇼, 그러더라구. 텃세도 그렇게 하지 말고 나보고 얌전하게 술 한 잔 사달라고 혀 그랬어. 그건 살 수 있어. 자네들 전부 몇 명인가. 한 대 여섯 되더라구. 광천 술집에 가서 막걸리 한 말, 돼지고기 두 근 볶아주쇼 그랬지. 자네들 장사 그렇게 하는 거 아니여. 처음 온 사람을 가르쳐 줄라고 해야지, 누구는 베짱이부터 배워갔고 오는 거 아녀. 아, 쪼끄만 아저씨가 맹랑스럽네. 자네들이 맹랑스럽지. 내가 맹랑스럽게 한 거 아냐. 그렇게 한 식구가 돼서 몇 년 장사 잘했어. 그러다 보니 개장사들이 평이 나쁜 거야. 개를 사러 오라고 하믄 잔뜩 맥여서 비계가 잔뜩 찐 놈을 팔아. 돼지비계는 먹어도, 개 비계는 못 먹어. 장사 처음 할 때는 나도 그런 거 모르고 했지. 짐승은 차에 실으나 오토바이에 실으나 멀미를 많이 하는데 사람보다 몇 배를 해. 가면서 차에다 쏟는 거야. 다 싸. 예를 들어 50근 개 한 근이면 7~8근은 그냥 없어져. 그때 개 한 근에 300원인데 50근이면 만 오천 원 아녀. 남는 게 아니라 밑지는 거야. 다 쏟아냈으니까. 그러니까 생산자가 나쁘다는 거야. 개장사가 저울로 속임수를 쓰는 거야. 어느 날 광천 도매집에 개를 사 가지고 갔는데 젊은이 둘이가 40근을 싣고 와서 2만 원이 남았다고 그려. 내가 의문이여. 슈퍼로 델고 가서 맥주 다섯 병을 사서 물어봤지, 워떻게 했냐구. 방법 좀 알려줄 수 있나? 저울 꼬다리 50근짜리는 구멍이 커. 거기 목구녕을 딱 잘라서 때웠더라구. 이놈에 올리면 많이 올라가잖아. 살펴서 보는 사람이나 알지 모르잖아. 이렇게 해서 가지고 다녀야지, 안 그러믄 적자라구 하더라구. 50근이면 4근은 더 옵니다 그러는데, 그 말이 맞더라구. 옛날부터 어른들 말씀이 저울을 속이면 삼대를 빌어먹는다는 말이 있어. 난 그걸 못하겄어. 집에 와서 밤새 생각하다가 새벽에 방법이 떠올라. 주인 보고 저녁을 일찌감치 맥이고 아침을 주지 말라고 하고, 한 마리에 두 근씩 빼달라고. 그래야 내가 가져간다고. 두 근 빼주면 반 근만 빠져도 한 근이고 한 근 반이면 두 근이고 그렇잖여. 그 이튿날부터 그렇게 한 겨. 저울은 정확허지. 그러니까 안 밑지더라구. 손해 나는 사람 손해나고, 덕 보는 사람 덕을 본다고 하잖어. 그 말이 맞는 거여. 한 10년 했나? 우리 애들이 다 공부를 잘했어. 전부 충남대 보냈어. 근데 내가 나쁜 이름을 가진 장사를 하다 보니 그게 좀 걸리더라구. 우리 애들도 말은 안 하지만 좀 위축을 받더라구. 그래 내가 사람은 된 대로 사는 것이다. 아버지가 그런 장사를 했다고 조금도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아라. 아버지가 장사를 했어도 남한테 손가락 받을 짓은 한 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구 했지. 우리 작은애가 미국 가서 공부를 하는데 졸업식에 오라고 해서 갔지. 미국 가느라 싹 다 팔았어. 염소 40마리, 개 80마리, 소 17마리. 맥일 사람이 없잖어. 한 달 갔다가 오는디. 맡길라믄 사람 사서 하믄 돈이 문제가 아니라 소 한 마리 잘못돼 죽으믄 그 먼데서 내가 으떡할겨. 오도 가고 못허구. 그날로 장사도 그만두고 다 그만둔겨. 안식구가 왜 소 사러 안 가냐구. 이제 그만두고 놀러 다녀야지. 내가 뭐하러 혀. 당신도 나도 고생인디. 그 뒤로 소 하나 안 맥이는겨. 10년 좀 넘었지. 작은애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한국 나와 4년 일하다가 아예 이민 갔어. 작년 4월 19일에 갔어. 작은애 하는 소리가 저희 따라가자는 겨. 저희 형이 있는데 두고 가는 것두 그렇고 말은 고맙지. 근디 ‘난 아버지처럼 안 살어’ 그 말을 하더라구. 내가 들을 때 너는 공부한 놈이 아버지처럼 살아서 되겄니, 말이 아니잖어. 근데 그다음에 또 그 소리를 혀. 그때도 그냥 넘어갔어. 작년에 왔는데 또 하는겨. 저는 아버지 보구 일허지 말라구 하는 소리지. 그거 못 알아들어서 서운한 것두 아니구. 점심 먹고 나서 그 소리를 허길래 너희 다 들어와 봐. 내가 헐소리 좀 해야겠다. 니들이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해 한 소린데 그런 말을 그렇게 쓰는 게 아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뭐 잘못 살아서 그런 표현 그렇게 쓰는 것 아녀. 안타까우면 그 뜻을 듣기 좋게 말해야지. 아버지처럼 안 산다고 하믄 아버지가 어서 도둑질해서 니들 맥여살렸니, 어디 사기를 쳐서 먹고살았니. 왜 표현을 그렇게 쓰냐. 앞으로는 그런 말 당췌 조심해라. 손자 놈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손바닥을 치면서 ‘아!’그러더라구. 걔가 지금 10살인가. 할아버지 말이 옳다는 거지. 잘못했다구는 허지. 뜻은 그게 아닌데. 표현이 잘못됐다는 겨. 말이란 건 항시 조심해야 된다구 허는 얘기지. 작은애가 아버지 일 좀 줄이세요. 근데 그게 그만두는 것도 아니고 줄여지는 것도 아니여. 내가 버릴 수는 있지만 내가 고생 고생해서 장만한 건데, 그거를 묵힐 수도 없고 누구보고 허라고 그러는 것도 쉽게 안 되고. 딴 사람보다 내가 생각하는 범위가 좀 넓어. 내가 농사처는 적지만, 나이 먹을수록 기계가 있어야 돼. 좋고 나쁘고를 떠나 내가 기계가 다 있다구. 그러니까 생활하는데 넘의 것 빌릴 게 없어. 다 내 기계로 하지. 전기나 기계 만지는 것도 남의 손 빌릴 게 없구. 내가 이럭저럭 해서 쓰니께.
현재 우리 사회에서 아버지라는 이름은 사회적 변화와 함께 그 의미가 달라졌다. 근대화 이전에 아버지라는 존재는 학식과 명망이 있는 자를 아버지로서 존경하고 섬겼다. 가부장적인 유교전통 사회에서 경제적 관점보다는 명예를 중요시한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를 오롯이 책임지는 역할을 부여받게 된다. 또한 예전에 아들을 앞에 앉히고 글을 깨우치게 한 것도 아버지였지만, 이제 가정에서 아버지가 담당하는 교육의 역할도 사라졌다. 아버지와 아들이 공감하는 폭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이다. 아버지가 늙어가면서 아버지와 자식 간의 삶에 대한 공감이 사라진 부분에는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는다’는 원망 아닌 원망만이 남게 됐다. 자식을 향한 이 씨의 마음속 응시는 이 씨 자신의 기억을 전달함과 동시에, 자신의 과거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계획이 들어 있다. 이제 그 응시에 자식이 보답해야 할 차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날, 이 씨가 마루에 앉아 고장 난 시계를 잔뜩 늘어놓고 앉았다. 한때 마을에서
일명 맥가이버로 불렸던 이 씨의 손을 거치면 새 물건이 됐다. 이제는 귀농한 양현모 씨에게 맥가이버 자리를 물려줬다. 서운할 일은 없다. 지금까지 차고 다녔던 손목시계가 개갈 안 난다고 했더니 누군가 손목시계를 하나 줬다. 그런데 이도 초침이 정확하게 가지 않는다. 가지고 있던 손목시계를 모두 분해해 이리저리 짜 맞춰 본다. 되면 좋고, 안 돼도 상관없다. 그저 그렇게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마을 주민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