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살아가는 일
혼자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다른 사람과 어울리거나 함께 있지 아니하고 그 사람 한 명만 있는 상태를 말한다. 사전적으로 보면 타인과의 관계 맺음을 스스로 거부하고 홀로 떨어져 있는 상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렴 어떠랴. 혼자 있다는 것은 나를 돌아보고, 성찰하며, 격려하고 위로하는 시간이기도 하며, 나의 부족함을 질책하며, 꾸짖고, 반성하는 일들의 연속에 있음을 말한다. 단지 나만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어느 날이었다. 늘 한가했지만 유독 한적했던 주말, 미장원에 가기 위해 읍내를 갔다. 단골로 다니는 미장원은 골목 안쪽에 있어 평소에나 주말에나 왕래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길이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인파에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했다. 코로나로 인한 거리두기가 완화되면서 골목상권에서 주말 행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혀 정보를 알지 못했던 나는 급기야 사람들의 물결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러 멀리 돌아서 미장원에 갔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코로나로 인해 그동안 지켜왔던 거리두기에 너무 익숙했던 것일까, 아니면 원래 사람 많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나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잠깐 쓴웃음을 지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줄을 서고, 흥행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 예매를 하고, 백화점 깜짝 세일에 그 물건을 사기 위해 오픈 전부터 가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일상생활을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혼자 산지 30년이 넘었다. 대학교 2학년 때 집과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동기와 함께 자취를 시작했다. 전남에서 올라온 동기는 나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컸고 어깨도 떡 벌어져 있어 여자였지만 왠지 듬직했다. 아무래도 가족이라는 둘레에서 처음 벗어나 혼자 살아가는 일은 조금은 두려웠던 마음을 떨쳐내기에 든든한 동기였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자취방은 새시로 되어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가로로 길쭉한 부엌이 나온다. 연탄을 갈아 사용하는 화구가 있고 석유곤로 하나와 찬장 하나가 전부인 부엌이다.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면 방 한 칸이 있다. 화장실은 공용 화장실을 사용했다. 샤워실이 따로 없기 때문에 부엌에서 대충 씻는다. 동기는 외동딸로 어릴 적부터 집안일을 도우며 살아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자취 살림을 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아침에도 꼬박꼬박 양은냄비에 쌀을 씻어 석유곤로 위에 밥을 하고, 김치와 김 등을 꺼내 밥을 먹고 등교했다. 나도 덩달아 옆에서 밥 한 술을 뜨고 함께 등교했다. 물론 설거지는 내가 한다. 수업이 끝나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날이거나 선배들과의 술자리가 있는 날이 아니면 자취방에서 둘이 밥을 함께 해 먹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술자리로 이어졌기 때문에 저녁밥을 먹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말이다.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으로나 공간적, 시간적으로 타인과 떨어져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혼자 산다고 해서 친구, 가족, 이웃, 세상과 교류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규범적으로 얽매인 것들로부터 보다 더 넓게 그 관계를 유지하고 이해하려는 것은 아닐까 싶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족을 가지게 된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것이 때로는 굴레가 되기도 한다. 가난하거나, 불우하거나, 부자이거나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오로지 가족이라는 사적 공동체는 책임, 신뢰 등이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오게 마련이다. 내가 너의 엄마니까, 내가 당신 자식이니까, 같은 말들이 무조건적인 돌봄의 관계를 만들고 만다.
서울에서 인천으로 가는 1호선 지하철에서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우르르 탔다. 그중 한 가족이 눈에 들어왔다. 아들은 엄마 옆에, 딸은 아빠 옆에 앉았다. 어디를 놀러 갔다가 집에 돌아가는 중인 것 같았다. 아빠와 딸은 눈을 맞추며 웃었고, 엄마와 아들은 어깨를 잡고 미소 지었다. 지하철이 출발하고 10여 분 정도 지났을까. 딸은 아빠의 어깨와 팔 중간 어디쯤에 기대어 졸기 시작했다. 그런 딸을 바라보며 아빠는 고개를 받혀주었다. 아들도 잠시 후 꾸벅꾸벅 졸았고 엄마는 한 팔로 아들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그 사이 엄마와 아빠는 서로를 마주 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내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것에 흠칫 놀랐다. 저 소녀의 나이 때 즈음 나는 어떤 마음으로 부모님과 소풍을 다녔을까, 그리고 어머니의 병원에서 밤을 새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지금의 내 가족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마음의 고뇌가 넘쳤던 까닭이다.
어머니의 무릎 수술을 전후로 우리 가족은 이런저런 잔치레를 겪었다. 형부는 10년 동안 해오던 식당을 정리했고, 그곳에서 일하던 남동생도 실업자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나 역시 함께 작업해오던 단체와 결별했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내가 어머니의 병간호를 맡았다. 어머니 혼자 수술을 결정했고 우리는 통보만 받았다. 뭐 대단한 일을 한다고 어머니 혼자 병원에 가게 했을까 싶었다. 아침 일찍 수술이 잡혀 오후 5시에 병실에 도착해 입원 수속을 했다. 7인실 병실을 사용했다. 입구를 제외하고 복도를 중간으로 침대 3개와 4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간이침대까지 펼치면 보호자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마치 도데끼시장 같았다. 간병인과 보호자, 환자, 그리고 주말이면 찾아오는 손님들 때문에 병실은 늘 수선스러웠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는 수술 후 진통제 없이는 잠을 자지 못했다. 수술 후 투여되는 항생제에 밥도 제대로 넘기지 못하였다.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곤두서 옆 침대에서 말소리가 커지면 칸막이로 사용되는 커튼을 신경질적으로 쳤다. 그리곤 몸을 모로 누워 눈을 감아버렸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간이침대에 어정쩡하게 앉아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이 주일 정도로 예상했던 병원 생활은 한 달이 되어서야 퇴원할 수 있었다. 워낙 고령이기도 했고 이 주가 지나서야 겨우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삼 주차가 되어갈 무렵부터 저녁에는 집으로 퇴근하고 아침 식사가 나오기 전에 병원에 도착하는 생활을 했다. 한 달 만에 돌아온 어머니는 집에서의 지나버린 비움에 다시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추위를 타지 않았던 어머니는 집이 춥다며 보일러를 빵빵하게 돌렸다. 도시가스 값을 걱정해 저녁에만 잠시 돌렸던 어머니였다. 밥도 안 넘어간다면 밥공기 언저리를 배회하다가 이내 수저를 놓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어머니는 본래 자신의 생활 라이프에 적응해갔다. 그리고 두 달 뒤 나는 직장을 찾아 시골로 내려갔다.
나에게 가족은 언젠가는 떠나고 싶은 곳이었다. 다시 돌아갈 곳이지만 한 곳에 모든 식구가 복작거리며 사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 서로가 나이 들어감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각자 살게 되었지만 그러한 경험은 어릴 적 기억만으로도 충분했다. 반드시 모여 살지 않아도 서로의 안위를 살피고, 각자의 영역을 인정해주며, 다툼과 화해, 오해와 이해 사이를 반복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관계가 가족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런 가족이 되어가고 있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