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살아가는 일
가끔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아직도 혼자야?’라는 말이다. 오랜만에 만나거나 어렵게 전화 통화를 하는 지인들과의 대화의 시작은 늘 이렇다. 그럴 때면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게 그럼, 하며 별스럽지 않게 대꾸하곤 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게 뭐 어때서, 라는 다소 심술궂은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아직도 혼자야, 라는 말은 결혼을 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에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남자건 여자건 왜?라는 의문형의 시선으로 보는 경우가 대다수다. 뭔가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인가, 집안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나, 신체적 결함이 있나 등 온갖 의구심을 품는다. 당연히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 사회적 인식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태어나 정해진 의무교육을 받고, 취업을 하며, 적당한 나이에 결혼을 해서 가족을 꾸리고 자녀를 키우고 양육하는 일, 이 모든 과정이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규범임을 학습받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나의 질문은 여기서 시작한다. 왜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가 말이다. 물론 작정하고 결혼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수줍게 고백하자면 연애를 몇 번 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 연애라는 것은 늘 신통찮았고 연애가 주는 즐거움을 채 느껴보기도 전에 이별했다. 당연히 나에게도 이십 대에 첫사랑이 찾아왔다. 그 당시만 해도 가난한 지갑 사정과 학생운동을 하던 때라 같이 밥 먹고, 영화 보고, 여행 가는 그저 그런 평범한 연애는 하지 못했다. 자주 만나지 못했고 어쩌다 삐삐로 전하는 그 친구의 소식에 안쓰러운 마음만이 컸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흘러갔고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리고 더 몇 년 뒤 그 친구의 결혼 소식을 듣는 것으로 나의 첫 연애는 싱겁게 끝이 났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감정에 간절하기보다는 어떻게 숨 쉬고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실현하며 살아야 하는지가 더 조급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 알게 되었다. 사랑이 몸을 섞는다고 마음까지 섞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 후로도 몇 번의 연애를 했지만 저 사람과 남은 일생을 함께 해보자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연애와 결혼이라는 제도와는 점점 멀어지면서 어쩌다 비혼자가 되었다.
얼마 전 아는 후배의 결혼 소식이 들려왔다. 공무원인 후배의 결혼식에는 하객이 넘쳐났다. 난 그저 축의금만 보내고 참석하지는 않았다. 얼마 후 동생과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10년 연애를 하고 결혼한 후배이지만 막상 같이 살아가는 일은 조금 달랐다고 한다. 화장품이라고는 달랑 스킨과 로션뿐인 후배와는 달리 화장대를 점령한 아내의 화장품은 종류별로 넘쳐났다. 화장실에서 수건을 한 번 사용하면 반드시 세탁해야 하는 후배지만 아내는 두 번 사용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서랍에서 속옷을 꺼내고 서랍장을 닫지 않아 후배가 따라다니며 서랍장을 조용히 닫았다. 단독주택에 살고 싶어 하는 후배와 달리 아내는 아파트가 편하다고 했다. 이런저런 차이점을 파악하고 나니 후배가 할 수 있는 것은 참고 이해하는 일뿐이었다고 한다. 후배의 이야기를 들으며 결혼은 조율과 타협, 혹은 포기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비해 비혼은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40대 후반인 후배는 30대부터 비혼을 선택했다. 자유로운 연애는 즐겁지만 자신이 가족을 꾸린다는 것은 자신이 없다는 이유였다. 그런 후배는 자신이 떠나고 싶을 때 훌쩍 배낭 하나 들고 여행을 가고, 음악을 좋아해 인디밴드에서 베이스 기타를 친다. 그러나 프로가 되기보다 아마추어에 머물기를 원한다. 조만간 인디밴드에서 탈퇴할지도 모른다. 타고난 역마살로 인해 틈틈이 찾아오는 휴일과 연휴에는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지인들을 만나러 다닌다. 이렇게만 보면 그 후배를 부러워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후배의 내면에는 다른 이에게는 고백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 자신의 내면에 자라지 못한 한 아이가 있어 늘 그 아이와 씨름 중인 것이다. 그 이면에는 그녀의 가정적 환경과 성장과정에서의 정서적 문제가 있을 터이다. 하지만 그 문제까지 고백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순전히 그 후배의 자기 문제이니 말이다. 어찌 되었든 나로서는 든든한 비혼 동반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서로의 빈 시간에 만나 술 한 잔 하며 세상사를 나누는 말동무가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충분하다.
비혼으로 살기 위해서는 필요한 조건이 있다. 나이가 들어 말 그대로 혼자되지 않아야 한다. 적어도 말동무가 되어줄 친구나 이웃이 한 둘은 있어야 최소한의 독거사를 예방할 수 있다. 아주 오래전 대학 동기가 스님이 되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절을 찾아갔다. 차를 한 잔 앞에 두고 마주 앉은 스님의 눈빛은 말갰다. 왜 스님이 되었는지 묻지 않았다. 은은한 녹차 향에 스며들 듯 스님과의 대화는 잔잔했다. 스님은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건넨 말 한마디에 나는 빙그레 웃었다.
“나이 들면 옆에서 잡아주는 사람이 있는 게 최고야.”
그런 반면 사별 후 혼자 사는 노인의 경우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어머니가 아버지 작고 후 우리 남매에게 한 첫마디가 그랬다. 이제 나 혼자니 잘해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몸이 쭈뼛해졌다. 어떻게 해야 잘하는 것일까, 혼자 남은 어머니를 외롭지 않게 해 드리면 되는 건가 등의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한 사람의 죽음 뒤에는 정리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주민등록증을 말소하고, 사망 등록을 해야 하며 유품을 정리해야 했다. 아버지 명의로 된 부동산이나 재산이 없었기에 정리 과정은 크게 어렵지 않게 마무리되었다.
그 일을 처리하는 동안 당연히 하루 걸러 집에 들러 어머니와 정리를 함께 했다. 하루 걸러 방문한 집은 조금씩 달라졌다. 방충망을 새로 달았고, 어두침침했던 집안 분위기가 아주 미세하게 화사해졌다. 어머니는 당신이 편한 시간에 일어나 식사를 하셨고, 그때만 해도 걸어 다니는 것에 아무 문제가 없던 터라 자유롭게 동네를 다니며 사람들을 만났다. 아버지 작고 후 한 달도 안 되는 동안 어머니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딱 10년이 되었다. 이제 어머니는 지팡이 없이는 외출이 어렵고, 1m를 걷다가 10분 쉬어야 했으며, 싱크대에서 음식을 하는 일이 너무 지겹다고 한다. 뜬금없이 전화해서 표고버섯은 어떻게 먹으면 맛있느냐고 묻는다. 마늘만 넣고 소금 간해서 버섯이 숨 죽을 정도로만 살짝 볶아서 먹으면 된다고 했다. 카레를 했는데 일주일째 먹고 있다는 말도 한다. 엄마 혼자 사는데 음식 조금씩만 해서 여러 가지 골고루 드시라고 했다. 마늘 한 접을 싸게 팔던데 어떻게 가지고 와야 할지 걱정이 되어 살지 말지 고민하고 있단다. 무거운 거 어떻게 들고 오느냐고, 그거 다 사면 아마 썩어 버리는 것이 먹는 것보다 많을 텐데 사지 말라고 했다. 결혼하지 않은 딸이 오면 뭐 맛있는 거 해줄까 고민하면서 나이 들어 입맛이 변해버린 자신을 탓하기도 하며, 허리와 무릎이 아파 어디 나들이 한 번 가지 못하는 세월을 원망하며 텔레비전과 함께 하는 것만이 유일한 정보가 되었다.
어느 날이었다. 일요일 오전 9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다가 어머니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다. 식사하셨어요? 아니, 아직. 지금 일어났어. 늦었네? 일찍 일어나 봤자 밥 먹는 거밖에 할 일도 없는데 뭐. 하신다. 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렸다.
어느덧 나도 오십 대 중반을 넘겼다. 다가올 나의 노년을 생각하면 어머니의 모습이 자꾸만 오버랩된다. 평생은 아니지만 결혼 후 자식과 남편, 부모를 뒷바라지하며 살았던 삶에서 혼자된 늙어버린 나를 만나는 일은 누구나 겪는 과정 중 하나일 것이다.
비혼자라고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자식이 없고 동반자인 남편이나 아내가 없으니 그저 나 혼자만을 책임지고 선택하면 된다. 다행히도 언니들은 ‘넌 결혼 안 하니’라는 진부한 질문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도 그저 간간히 ‘너 운세에 남자가 있다고 하던데’라는 말로 얼버무렸다. 가까운 일가친척도 없어 결혼을 재촉하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되었다. 이런저런 상황들이 나의 비혼 생활을 더욱 안정되고 견고하게 만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