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살아가는 일
자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양념치킨을 먹을까. 후라이드 치킨을 먹을까. 먹기 위해 살까, 살기 위해 먹을까. 난 살기 위해 먹는다. 술을 마신 다음날에는 속을 풀어줄 얼큰한 짬뽕을 먹고, 현장에서 작업을 할 때는 뜨거운 햇살을 피해 그늘에 앉아 배달된 자장면을 먹는다. 퍽퍽한 후라이드는 누가 시켜주면 먹고 매콤 달콤한 양념 맛에 양념치킨을 먹는다. 지금은 이 모두를 안 먹는다. 그러나 이 모두가 선택의 문제이기만 할까.
첫 자취생활을 시작하면서 룸메이트인 동기와 얼굴을 맞대고 앉아 석유곤로에 밥과 국을 끓여 먹었다. 반찬이라야 콩나물이나 어묵볶음, 계란 프라이 정도였다. 동기는 때가 되면 김치를 담갔다. 집에서 엄마가 김장을 하는 날이면 잔심부름 정도는 했지만 내가 직접 담그는 일은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동기를 따라 배추를 절이고 속을 만들어 버무리는 그 노동의 과정이 신선하게만 느껴졌다. 다음에는 오이소박이도 만들어 먹었다. 아삭아삭한 식감의 오이소박이 하나면 여름 반찬은 충분했다. 냉장고가 없으니 그때마다 먹을 정도만 조리해서 먹었다. 그래도 부족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가끔은 학생회관에서 파는 100원짜리 라면을 사 먹었다. 당시 학생회관에서 판매하는 라면은 학생들에게 인기 메뉴였다. 똑같은 양은냄비 100개 정도가 화구에 일렬로 늘어서 팔팔 끓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내 라면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주방 너머 양은냄비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워 올라오는 모습을 넋 놓고 구경하기도 했다. 부엌 바닥에 엉거주춤 웅크리고 앉아 석유곤로에 끓여 먹는 라면과는 다른 맛이었다. 밖에서 사 먹는 라면이 더 맛있는 이유가 화력에 있다는 것은 좀 더 나중에 알았다.
생각해보니 그 좁은 부엌에서 참 많은 것을 했다. 그 뒤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도 부엌은 늘 내게 단지 일용할 양식을 주는 공간만이 아니라 생활을 영위해 가기 위한 필수 노동의 필요성을 알게 해 줬던 공간이었다. 내 몸과 마음을 풍요롭게 해 줄 음식을 위해 식자재를 구매하거나 가꾸고, 정성스럽게 요리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먹는다는 일의 수고로움이 나를 늘 부엌에 머물게 했다.
그렇지만 자취 생활을 하면서 먹는 밥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집밥에 가까워진 것은 마흔 살이 넘어서부터다. 지금처럼 편의점에서 도시락이나 삼각김밥을 사 먹을 수 없었던 이십 대와 삼십 대에는 라면이 주 음식이었다. 어쩌다 콩나물이나 생선, 혹은 두부 등으로 밥상을 차리는 일은 누군가 집을 방문하는 날이 아니면 좀처럼 접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 생활이 이어지다가 어쩌다 부모님 댁에 방문하는 날은 허겁지겁 밥을 먹어 치웠다. 혹시라도 밖에서 밥도 못 먹고 다니냐는 말을 들을까 싶어 밥상에 눈치 한 대접을 함께 올려놓고 먹었다.
사십 대가 되었을 때 마치 신고식을 치르는 것처럼 온몸에 통증이 몰려왔다. 병원을 다니며 이런저런 검사를 다 해 봤지만 모르겠다는 말 뿐이었다. 나름 내가 내린 결론은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먹을거리를 바꾸는 일 이외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먼저 자취방에 있는 가공식품을 버렸다. 그래 봤자 라면과 소시지가 전부였다. 대신 브로콜리나 당근 등의 채소를 찌거나 삶아서 먹었다. 최소한의 밥상을 차려 나의 몸을 채우고 내 몸이 나에게 거는 말들에 집중했다. 그렇게 6개월을 지나고 나니 내가 느꼈던 통증이 조금씩 사라졌다. 내가 먹는 음식이 곧 나를 만든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일이었다.
자취의 개념에서 살림의 개념으로 변하게 된 것도 그즈음이다. 김장을 직접 하게 되면서 김치냉장고가 필요해졌고, 제대로 밥상을 차려 먹기 위해 식탁과 의자를 샀으며, 궁중팬과 프라이팬을 구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달랑 도마, 칼, 냄비 하나로 시작했던 자취 생활용품이 가정집 살림살이로 변하게 된 것이다. 먹는다는 일 하나로 짐이 조금씩 늘어났다.
몸이 아팠던 그때 결혼해서 강화로 이사를 간 선배 언니를 만났다. 강화는 지리적으로 인천과 가깝지만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선배는 집 앞마당에 이런저런 채소를 텃밭에 심고 가꾸고 있었다. 텃밭에서 방금 뜯은 상추와 큼지막한 고추가 삼겹살과 함께 차려졌다. 촉촉한 물방울을 머금은 상추와 고추는 달았다. 그렇다고 전원생활을 꿈꾸지는 않았다. 그러나 선배의 말 한마디만큼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이 땅이 깃들만한 땅인 거 같니?”
오랫동안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난 늘 어딘가를 헤매고 다녔고,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했다. 그러나 보드랍고 촉촉함이 느껴지는 흙을 만지는 일만큼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아스팔트 위에서 태어나 성장한 내가 흙을 만지며 느꼈던 감정은 안정감과 위로였다. 굳이 어딘가에 정착하지 않아도 이 땅 위에 발붙이고 살고 있다는 안정감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의 정직한 노동으로 나의 먹을거리를 해결할 수 있다는 위로가 그것이었다.
시골에서의 삶을 시작한 순간부터 텃밭에 이런저런 작물을 심는 일이 일상화되었다. 혼자 사니 넓은 면적도 필요가 없다. 조금만 심어도 풍성해지는 작물에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먹는다. 충북 보은에 거주하면서 옆집 아주머니와 함께 봄이 되면 나물을 뜯으러 다니던 때는 아마 내 인생에서 경험한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어디에 무엇이 올라오는지 모르는 나를 데리고 옆집 아주머니는 잘도 다녔다. 아주머니가 먼저 앞장을 서니 당연히 나물도 아주머니가 먼저 캔다. 그리고 뒤돌아보며 이거 캐, 하며 내 몫을 남겨준다. 뒤를 따라가며 아주머니가 남겨 놓은 나물을 덥석 캐어내 바구니에 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수줍은 듯 올곧게 쭉 뻗은 몸매를 자랑하며 올라오는 고사리, 야리야리한 몸짓이지만 액젓 하나만으로도 새순의 깊은 풍미를 느낄 수 있는 혼잎 나물, 입맛 없는 봄에 먹으라고 하늘이 내려주는 가새 씀바귀 등이 내 입맛을 고급지게 해 주었다. 나물이라고는 도라지, 취나물, 콩나물, 미나리가 전부였다. 역시 서울 사람이었던 어머니가 내게 해주던 나물은 그게 다였으니 나 역시도 그 정도가 나물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묵나물의 맛도 시골살이를 하면서 처음 알았다. 고사리, 호박, 가지 등을 말려 겨우내 먹는 묵나물을 어머니에게 해드렸더니 이런 말을 했다.
“묵으로 나물도 해 먹어?”
텃밭에 콩을 심고 처음 싹이 올라와 콩 머리가 나 있소,라고 봉긋 솟아오를 때, 쑥갓이 그 생명을 다하고 꽃봉오리를 맺을 때 저절로 감탄의 소리가 나온다. 농사를 지은 지 30년이 넘은 농부는 아직도 작물이 처음 땅에서 솟아오를 때의 그 벅찬 감정을 느끼기 위해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어쩌면 먹는다는 일은 그저 맛있는 것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한 그 일련의 노동의 과정을 온전하게 내 노동의 기쁨으로써 느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오늘 뭐 먹지’가 아닌 ‘오늘 하루도 자~알 먹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하루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