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보리 Oct 05. 2022

숨어 있는 집

혼자 살아가는 일

어질러지는 나이가 있고 치워지는 나이가 있다. 이십 대에는 삶이 어지럽고 주변 정리도 잘 안 되어진다. 오십 대가 되면 자신이 정해놓은 규칙에 의해 모든 사물이 리듬 있고 질서 있게 배열되며 번잡스러운 관계들을 만들지 않게 된다. 그저 그런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자신에게만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규칙이 정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버리거나 다른 것을 취하는 일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게 된다. 집이 그렇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전셋집이다. 아주 운 좋게 단독주택을 구할 수 있었고 주인은 서울에 거주하고 있어 간섭받을 일도 없었다. 앞전에 서 너 가구의 세입자를 거쳐 갔는데 미처 2년이라는 기간을 모두 채우지 못하고 나갔다. 겨울을 나고서야 알았다. 집이 너무 춥다는 것을 말이다. 


다소 번화하다고 할 수 있는 읍내에서 샛길로 접어들면 5가구가 거주하는 아담한 터가 나온다. 1990년대 빨간 벽돌식 주택의 전형적인 농가주택이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보일러실 겸 창고가 마당에 있고 오래된 은행나무가 가을이면 미칠 듯한 노란색으로 불타오른다. 은행 냄새는 덤이다. 집 내부는 넓은 거실과 방 2개에 화장실이 있다. 기존 세입자의 짐이 모두 빠지고 빈약한 내 짐을 풀어놓으니 말소리가 웅웅 울렸다. 방문 손잡이는 언제 적 인테리어 소품인지 모를 옥색 동그란 손잡이가 달려 있고 화장실과 부엌 벽면은 오래된 하늘색 타일로 도배되어 있었으며 아직도 형광등이 덜렁거리며 달려 있었다. 세입자이다 보니 거의 손을 대지 않고 살았던 것이다. 대략 난감했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페인트와 재활용 소품 등으로 나만의 집안 규칙들을 만들면 되었으니까 말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거쳐 간 집이 거의 20여 집 정도다. 우리 가족은 여섯 식구로 난 늘 언니들과 함께 방을 썼다. 부모님의 부단한 노력으로 집을 장만하기 전까지 방 2개인 집에서는 늘 문제가 발생했다. 여자 형제 3명에 남자가 한 명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 당시만 해도 남동생이 어렸으니 부모님과 함께 방을 썼지만 남동생의 뺨에 여드름이 나면서부터 남동생에게 방 하나쯤은 내주어야 했다. 당연히 작은 방 하나에서 여자 셋이 복닥이며 생활하는 것은 거의 전쟁과도 다름없었다. 사이좋게 이불을 나눠 덮는 것 정도를 상상하면 안 된다. 좁다, 저리 가라, 내 옷인데 왜 너가 입냐, 머리카락 떨어진 것 주워라 등등 하루에도 수십 번 언성을 높이게 되는 것이 세 자매의 현실이다. 


그 현실에서 벗어나 비록 방 한 칸이지만 나 혼자 뒹굴뒹굴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축복이었다. 심심하지도 않았다. 심심하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학교 주변이라 늘 친구들과 마신 막걸리 냄새로 방안은 넘쳐났다. 졸업 이후에도 방 한 칸짜리 월세방을 전전했지만 지금처럼 영끌해서 집 장만에 모든 영혼을 갈아 넣을 만큼 아등거리지 않은 세월이었다. 대신 내가 살았던 주변, 그리고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우리의 평범한 이웃들에 대한 호기심과 사회적 대의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화려한 옷이나 칠첩반상, 내 집 장만 같은 오래된 미래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정부미에 김치나 라면 정도면 넘치도록 충분했고, 내 한 몸 뉘일 수 있는 방 한 칸이 있음에 감사했다. 


삼십 대 후반이 되었을 무렵 그제야 나는 전셋집을 얻어 생활하기 시작했다. 전셋집이래야 역시 방 한 칸과 부엌, 화장실이 있는 빌라거나 오피스텔이었다. 셋집을 전전하며 살면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주거의 조건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도 조금씩 알아갔다.  


집은 면적이나 거래 금액 등과는 비례하지 않는다. 면적이 적어도 가족이 충분히 효율적으로 생활할 수 있으면 충분하며, 실 거래금액이나 투자 상품으로써의 부동산 가치보다 거주하고 있는 이의 만족감이 더 중요한 요건으로 작용한다. 비록 셋집이어도 정 붙이고 살면 내 집처럼 여겨진다. 단 주인의 갑질이 없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어야만 한다. 


혼자 사는 사람도 이런 집의 요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혼자 사는 사람도 살림살이는 있을 건 다 있게 마련이다. 혼자 산다고 이불 빨래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니 세탁기도 큼지막해야 하고, 혼자서도 잘 먹어야 하니 냉장고 용량도 기본 용량은 되어야 한다. 텔레비전은 자취를 하면서부터 한 번도 사들인 적이 없어 지금도 없다. 집에 거주하는 최소한의 동안만큼은 누군가에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살지 않을 권리 같은 것이 나에게도 있는 것이다. 단조로운 생활이 주는 조촐한 삶의 맛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겨울이다. 겨울이 되면 단조로운 생활이 되고, 게을러지며, 생각의 방이 늘어나 우울해지며, 모난 돌이 되어가면서 반성을 하게 된다. 어쩌면 그래서 봄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거처하는 집은 사위가 고요하다. 여름과 겨울이건 말이다. 이웃이라고는 앞집 작은 절 스님과 그 옆집 아주머니와 노부부 외에는 없다. 재개발을 앞두고 그나마 있던 한 가구도 떠났다. 내가 오기 훨씬 이전에 살던 주민들은 보상을 받고 모두 떠났고, 이제는 네 집만이 재개발 영역에서 제외되어 그 자리에 남았다. 


인천에 살 때는 골목길 안쪽에 있는 단독주택 1층에 세 들어 살았었다. 여름의 골목길은 분주하고 요란스럽고 다투기도 하며 울기도 하고 싸우기도 한다. 겨울의 골목길은 조용했다.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바람 소리와 종종거리는 발걸음만이 들려왔다. 저녁 8시 30분이 되면 삼겹살 굽는 냄새가 창턱을 넘어 고스란히 내 방 창가에 앉고는 했다. 소주 한 병을 마주한 채 창밖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느 겨울날, 시커먼 어둠이 고요를 잠식해왔다. 문득 인천의 그 골목길이 못 견디게 그리워졌다.  


가끔은 어딘가로 도망쳐 숨고 싶은 순간이 온다. 누구나 인생이 버겁다고 느껴질 때 혹은 관계의 포위망에 묶여 숨 쉬기 어려울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여행을 택하기도 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집으로 숨어든다. 아무도 침범하지 않는 이 고요한 공간에서 문득 박경리 선생의 ‘꿈’이라는 시(詩)가 생각난다.      

원주 와서

넓은 집에

혼자 살아온 것도 칠팔 년

늘 참말 같지가 않았다     

방문 열면 마루방

덧신 발에 걸면서 한숨 쉬고

댕그머니 매달린 전등불

믿기지 않는다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정수리 자르며

지나가는 시간

저승길

헤매고 있는거나 아닐까

글을 쓸 때는 살아 있다

바느질할 때 살아 있다

풀을 뽑고 씨앗 뿌릴 때

살아 있는 것을 느낀다     

서쪽에서 빛살에 들어오는 주방

혼자 밥을 먹는 적막에서

나는 내가

죽어가는 것을 깨닫는다     

작가의 이전글 오늘도 자~알 먹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