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보리
인터뷰의 시작은 할머니들이었다. 도시에 살면서도 삶의 근간이 되는 흙을 허투루 보지 않는 할머니, 당신에게 허락한 시간을 최선을 다해 버티어왔던 할머니들이었다. 흔히 노인을 생각하면 근력이 없고, 말도 어눌하고, 일도 잘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하다. 그것이 내 미래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지만 할머니들과의 대화를 마친 뒤에는 그들 인생의 절박함과 애틋함에 기어이 할머니의 손을 잡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만다. 적어도 누군가를 인터뷰할 용기를 내볼 수 있게 해 준 그녀들이었다.
인천에서 만난 할머니들 중 빼빼할머니와 마늘할머니가 있다. 빼빼할머니는 몸에 기름기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빼빼 말라 ‘빼빼할머니’라 불렀다. 마늘할머니는 마늘을 까서 생계를 이어가는 할머니라 그렇게 불렀다. 일종의 애칭이며 별명이다.
빼빼할머니는 무당이었다. 마흔 살 무렵 신내림을 받아 무당의 길을 걸었다. 하고 싶지 않은 결혼을 해서 딸을 하나 낳았다. 신내림을 받은 뒤 혼자 나와 살기 시작했고 인생은 늘 질곡의 삶이었다. 이제는 늙어 찾아오는 손님도 없는 법당을 홀로 지키면서도 일 년에 한 번씩 산에 가서 기도를 하고 온다. 자식이 있으니 같이 살 법도 한데 그녀는 끝내 자존심을 지키며 산다. ‘서로들 신경 안 쓰고 잘 살면 되는 거고 나쁜 일 안 생기면 되는 거지, 무슨 욕심을 바라느냐’며 ‘나 주어지는 대로 순리대로 사는 거야’라고 말한다. 신랑이고, 애인이고, 자식 같은 담배를 피우는 것과 텔레비전 보는 것이 늙은 무당의 일상이 되어버렸지만 목소리만큼은 누구보다 쩡쩡했다. 두 팔을 앞뒤로 휘적휘적 저으며 몇 발자국 걷다가 뒷짐을 쥐곤 했다. 근력 없는 몸을 지탱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팔을 내저으며 법당 안으로 쓰윽 들어갔다. 빼빼할머니의 법당은 겨우 사람 한 명이 오고 갈 수 있는 좁은 골목길에 위치했다. 햇빛 한 줌도 허락하지 않는 법당에는 익숙한 향냄새가 났다. 대문이자 현관문을 열면 좌측으로 화장실이 있고 바로 법당이다. 우측으로 작은 싱크대와 냉장고가 있는 부엌이 있다. 그녀는 법당에서 텔레비전도 보고, 밥도 먹고, 누워서 잠도 잤다. 할머니의 표현대로라면 신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작고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마늘할머니는 인천에서 태어나 장봉도로 시집갔다. 농사도 짓고, 배도 부리고, 나무도 하러 다녔다. 인천으로 나와 호떡장사, 옥수수 장사, 구루마에 고동, 번데기, 뻥튀기를 전철을 타고 서울 노량진에서 받아와 팔았다. 자식들 가르치며 사느라 부지런히 일했지만 남은 것은 몸뚱이뿐이다. 2년마다 계약 기간이 끝나는 전셋집으로 이사를 다닌다. 수십 번 이사를 다녀도 할머니는 작은 자투리 땅에 작물을 심어 이웃들과 나눈다. 천막을 씌운 지붕에는 어김없이 호박과 박이 주렁주렁 열린다. 가을이면 이웃들과 수확의 기쁨을 누린다. ‘나이가 들었으니 놀아야 하는데 놀면 심심하고 미친 사람 같다’며 ‘마늘 까는 일이라도 하면 세금 걱정 안 하고 애들이 안 줘도 먹고 산다’고 말한다. 간혹 어쩌다 일이 없을 때면 마늘할머니는 뒷짐을 지고 동네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오히려 그 모습이 낯설다. 한시도 쉬지 않고 밭에 물을 주고, 집 앞을 청소하고, 호박을 적당한 두께로 썰어 소쿠리에 담아 지붕 위에 말리던 할머니다. 일거리가 떨어진 것은 아닐까 슬그머니 걱정이 되기도 한다. 마늘할머니가 거주하는 집에 들어서면 널찍한 마루가 온통 비닐로 덮여있다. 마늘을 까기 위한 용도의 비닐은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막아주기도 한다. 한편에는 연탄이 쌓여있고 그 옆으로는 박스 등이 잡다하게 놓여있다. 알고 지내던 분들이 종종 재활용이 되는 것들을 직접 가져다준다. 잘 모아서 고물상에 판다. 마루와 이어지는 주방으로 들어가면 양쪽으로 방이 있다. 한쪽 방은 장롱만이, 한쪽 방에는 물건들이 박스에 그대로 쌓여있다. 언제라도 이사할 준비를 하고 산다. ‘내년에도 여기 살게 되면 고추 말려야지’라고 말하던 할머니는 다음 해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3년 뒤에 작고하셨다.
빼빼할머니와 마늘할머니와의 인터뷰는 작정하고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공공예술프로젝트를 하면서 늘 동네에서 만났던 할머니들이었다. 그 동네에서 처음으로 반바지를 입었던 반바지 할머니, 우리들에게 농사를 가르쳐주신 농사샘 할머니, 키가 작고 몸집도 작은 쬐끄만 할머니 등 동네 할머니들은 마실 장소가 없어 도로 한 편에 모여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평상을 만들어드리겠다고 하니 노숙자들이 모여서 안 된다고 한다. 불편해도 차라리 이편이 낫다고 했다. 가끔은 할머니들 주변으로 비둘기들이 모이곤 했다. 할머니 중 한 분이 쌀알을 줬기 때문이다. ‘난 별로 안 먹고 싶으니 너네들 많이 먹고 너희들이나 살 폭폭 쪄라’고 말했다. 그저 옆에 가만히 앉아 할머니들 이야기를 듣고, 물어보는 말에 답을 하면서 맞장구치면 할머니들의 영역에 포함시켜줬다. 애초부터 목적을 가지고 만난 것이 아니었기에 자연스럽게 인터뷰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에 비하면 할아버지들과의 만남은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다. 자주 보던 할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있었다. 그도 아니면 낯선 이들에 대한 경계심이 할머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았다. 이유는 좀 더 지나 알게 되었다. 나 스스로가 무르익지 않았고, 나의 내면이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자신이 읽고 싶은 대로 읽고, 보고 싶은 것만을 보며, 말하고 싶은 것만을 말한다. 그러나 타인이 하는 말에 온 힘을 다해 귀 기울이고,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봐야 하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꺼내기 전에 타인이 하는 말을 먼저 들어야 한다. 첫 인터뷰에서 내가 배우고 익힌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