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자기 고백의 다른 이름이다. 고백은 타인이 들어주지 않으면 그저 혼잣말일 뿐이다. 작업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이고 그것이 어떤 형태로 발현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온갖 정보와 자기 고백이 넘치는 세상에서 나는 어떤 것에 귀 기울이고 있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내가 타인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5년 전이다. 직장생활을 하지 않은 그 당시의 나에게도 휴일은 그야말로 쉬는 날이었다. 적어도 평일에는 늘 무언가 일을 했고, 바쁘게 움직였다. 직장이라는 범주가 아니어도 이 세상의 일원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부지런히 살아냈다. 공식적으로 주어진 휴일에는 조금은 늦게 일어나고(대부분 습관이라는 이유로 정해진 시간에 일어났지만) 12시에 점심식사를 하지 않았고(불규칙한 시간을 좋아한다) 밤늦게 소주로 허전함을 달랬다(지금도 그런다). 그러다 문득 다른 사람들은 이 시간을,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진 휴일을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해졌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누구나 9to6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닐 텐데 그들의 하루는 무엇으로 채워지고 어떤 기분으로 삶의 무게를 버티어내는지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삶이 보이는 창’에서 르포문학교실 안내문을 보았다. 르포문학교실을 꾸리는 서문은 이랬다.
이번 르포문학 강의 주제는 ‘그 모든 것에도 삶은 길을 찾는다’입니다. 새로움이란 무얼까, 생각합니다. 변화된 사회적인 조건과 삶이 새로움으로 다가옵니다. 이미지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매스컴에서 보이는 이미지는 사람들이 소비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불행히도 그 이미지는 맥락이 없고 피상적인 알맹이 없는 것들입니다. 태양 가까이 가면 녹는 밀랍으로 만든 이카루스 날개처럼 허망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과 타인의 삶을 이미지로만 소비하고 버려버립니다. 현실의 삶은 그대로 남고 그것을 견디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새로움이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허망하게, 어리석게, 때로는 강제로 버린 것들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인디언의 영혼처럼. 사람들이 경멸하는 것, 낡았다고 말해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새로움이 아닐까 하는.
물론 르포작가가 되지는 못했다. 무언가 된다는 것, 그건 이 미친 세상에서 품을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 될 수도 있지만 지옥이 될 수도 있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인간실격의 첫 대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난 아무것도 되지 못했어요. 나도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항의를 받거나 질타를 받지는 않는다. 고등학교 죽마고우는 무언가 되기를 바라는 삶을 진즉에 버렸다고 했다. 애초에 무언가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은 늘 누군가에 맞춰서 살아갈 것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고 말이다. 무언가 되지 못해도 어떠랴. 삶이 주는 멀미를 잘 버티고 견디어내는 것만으로도 우리 삶은 짧기만 하다.
나는 나를 고백할 용기가 없었다. 아니 솔직하지 못했다.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번뇌로 점철된 날들, 모진 말조차 내뱉지 못해 끙끙댔던 비굴한 모습, 제대로 저질러보지도 못하고 애면글면했던 기억들을 미사여구로 포장하고 싶지 않았다. 젊은 시절 대의라 생각했던 것은 자기 합리화였으며,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려 했지만 삶의 법칙을 따라가는 치졸한 삶의 모습만 남았을 뿐이었으니까. ‘고백’이라는 단어에 지치기도 했다. 더 늦기 전에 나를 처연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마음을, 내 인생을 들여다보기 위해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작가로서가 아닌 나라는 사람으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