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라는 이름으로

by 김보리


한 아이가 있었다.


열 살이 되면서부터 아이는 지게를 지고 매일 아침과 저녁, 땔감으로 사용할 나무를 하기 위해 오서산으로 갔다. 혼자 가면 어렵지만 친구들도 산에 가면 다 만난다. 아침에는 더 바쁘다. 한 짐이라도 더 해서 지게에 지고 집에 가져다 놓은 뒤 학교에 가야 한다. 밤새 짚을 삼아 만든 짚신을 발에 꿰어 차고 산길을 오른다. 간혹 산길을 오르다 짚신이 떨어지면 맨발로 걸어올 때도 있다. 여름에는 상관없지만 겨울에는 쌓인 눈에 발이 푹푹 빠진다. 동상에 걸리기 일쑤다. 콩자루에 발을 넣고 자면 조금 따뜻해지기는 하다. 먹을 콩도 없는데 꼬랑내 나는 발을 자꾸 넣는다고 어머니에게 혼나는 것은 덤이다.


산에 올라 가시덤불이나 아까시나무 등 잔가지들을 지게에 차곡차곡 담는다. 눈에 보이는 대로 솔방울을 포대와 주머니에 넣는다. 주머니가 금세 불록해진다. 장작 같은 큰 나무들은 어른들이 지고 온다. 아버지는 마당 한 편에 장작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기를 좋아하신다. 우리 가족이 한겨울 추위에 떨지 말라고, 배곯지 않게 언제라도 따뜻한 밥을 해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니 새삼 아버지가 위대해 보인다.


집에 지게를 내려놓고 보리밥에 고추장을 넣어 쓱쓱 비벼 먹은 뒤 책보를 들고 학교로 뛴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는 길, 도시락도 없는데 야속하게도 꼬르륵 소리가 난다. 도산리에서 하풍으로 가는 길, 김 씨 아저씨네 밭에 무수가 이제 막 얼굴을 내밀었다. 사방을 휘휘 둘러보니 아무도 없다. 흙에서 무수를 쓱 뽑아 바지에 문질러 깨문다. 아삭 거리는 소리가 밭에 울린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내심 김 씨 아저씨가 뒷덜미를 잡을까 싶어 냅다 뛴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다. 당연히 밭에 가셨을 게다. 우리 가족 소유의 논과 밭이 없으니 다른 사람 집에 가서 일을 해주고 대신 쌀이나 보리를 받아온다. 어른들은 이것을 곱장리, 오부장리라 부른다. 곱장리는 쌀을 한 짝 가져다 먹으면 다음 해 두 짝을 가져다줘야 하고, 오부장리는 한 짝 반을 갚아야 한다. 내 땅이 없으니 이렇게 해서라도 먹고살아야지 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빈집에는 동생들이 마당에서 자치기를 하고 있다. 부엌에 들어가 가마솥을 열어보니 텅 비어있다. 저녁거리를 찾으러 집을 나선다. 논으로 가니 논둑에 논지기가 있는 것이 보인다. 논지기는 논냉이를 말한다. 바구니에 한 움큼 캐어 담는다. 집으로 가기 전 바가지 샘에서 깨끗하게 씻어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온다. 어머니는 머리에 똬리를 얹고 잘도 걸어가건만 논지기가 혹여 떨어질까 뒤뚱거리는 꼴이 우습기만 하다. 역시 아무나 머리에 지고 다니는 것이 아닌가 보다.


봄이 되면 춘궁기다. 추수 때 걷은 농작물 가운데 소작료 내고 빚 갚고, 이자와 세금을 내고 나면 남은 식량을 가지고 초여름 보리 수확 때까지 견뎌야 한다. 학교 월사금 내는 날은 어찌나 빨리 돌아오는지, 그때가 되면 어머니는 월사금 대신 옥수수나 고구마, 무 등을 책보에 넣어준다. 이마저도 없으면 선생님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죄송하다는 말을 읊조려야 한다. 먹을 것이 없으니 봄에는 쑥 뜯어 쪄 먹고, 가을에 밀을 수확 하면 밀 껍데기를 까불려 죽 쒀서 먹는다. 쌀밥 구경한 적이 언제인가 싶다. 보리밥이라도 먹으면 다행이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는 더 심각했다. 학교 안에서 듣는 폭격 소리는 무서웠다. 선생님을 따라 신풍1리 느티나무 아래에 모여 앉아 책을 읽었다. 폭격 소리에 친구가 책 읽는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어느 날 집에 가니 일하러 가셨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짐을 싸고 있었다. 상송리에 인민군이 들어왔다고 하니 잠시 피해 있자는 것이었다. 동생들을 챙기고 피난 간 곳이 겨우 신풍2리였다. 신풍2리는 오서산 산자락에 마을이 둘러싸여 있어 밖에서 봤을 때 마을이 잘 보이지 않아 피난민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골짜기에 들어가 싸 가지고 간 옥수수를 먹으며 이틀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 아무 일이 없어 김이 샜다.


집에 돌아와 아궁이에 불을 지피니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간다. 숨겨뒀던 보리쌀을 꺼내 가마솥에 안치는 어머니 뒷모습이 어쩐지 아슬해 보인다.




군대를 제대하자마자 아버지를 도와 담배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조금씩 도와드렸던 터라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친구들은 간혹 서울로 가서 공장에 취직하거나 공부를 잘한 녀석들은 대학교에 진학하기도 했지만 100명 중 1명 있을까 말까였다. 우리 집 형편도 그렇지만 공부머리가 없는 나로서는 굳이 학업에 대한 꿈은 꾸지도 않았다. 다만 동생들은 공부머리가 있어 뒷바라지할 생각이다. 시골에서 논농사만 지어서는 모갯돈을 모을 수 없다. 동생들 공부시키고 결혼시키려면 도둑질 빼고는 어떤 거라도 해야만 한다.


담배농사는 어렵다. 담배 종자를 받아와 잎이 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고생길이다. 담뱃잎을 만지면 손도 끈적거리고 가장 더운 6월에서 7월에 담뱃잎을 수확하니 그야말로 중노동이다. 거기에 담뱃잎을 목 지어 포장하는 일은 밤 11시를 넘기기 일쑤다. 담뱃잎을 말리기 위해 건조장을 만들기도 하지만 우리는 건조장이 없어 나무를 X자로 걸고 담뱃잎이 겹쳐지지 않게 널어놓았다. 담뱃잎이 누렇게 말라가기 시작하면서는 비와의 전쟁이다. 행여 비가 내리기라도 하면 밭에 나가 일하다가도 잽싸게 뛰어 들어와 담뱃잎이 젖지 않게 해야 한다.


담뱃잎은 하얗고 보드라운 것이 하엽, 잎이 두껍고 붉은 것이 상엽이다. 담뱃잎 중에서는 중엽을 최상품으로 쳐준다. 담뱃잎이 마르면 목 짓는 일을 한다. 담뱃잎을 묶는다는 말이다. '포 짓는다'라고도 한다. 담뱃잎을 목 지어서 하얀 끄냥이로 한 포, 두 포씩 포장한다. 이를 '하꼬'라 부른다. 한 포의 무게는 대략 23~25kg이다. 흠집이 없이 노랗고 긴 것이 최상품이다. 담배 꺼치에 담뱃잎을 네 켜까지 쌓은 뒤 나무판으로 누른다. 잘 포장한 담뱃잎은 광천에 있는 엽연초조합에 납품해야 한다. 버스도 없고, 자전거도 없으니 15리를 걸어간다. 나무지게에 머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담뱃잎을 싣고 장곡면 화계리를 지나 광천으로 가는 봄티고개를 넘어가는 길에 콧노래라도 흥얼거리지 않으면 지치기 십상이다. 그래도 담뱃잎 출하 후 주머니에 들어올 두둑한 모갯돈으로 동생들 학비 낼 생각을 하면 나무지게를 진 발걸음이 마냥 무겁지만은 않다.


벼농사가 마무리되면 짚을 갈무리 해야 한다. 초가집에 지붕을 엮는 용도, 논에 퇴비로 만들어 사용할 짚, 나머지는 담뱃잎을 엮는 용도 등 사용처에 따라 분류하는 일이다. 길고 긴 겨울밤, 등잔불 아래 머리를 조아리고 짚을 엮어 짚신을 만들고, 빗자루를 만들며, 대나무로 갈퀴를 만드는 일 모두 이맘때 하는 일이다.


그렇게 틈틈이 모은 돈으로 동생들 학비 대고, 나도 예쁜 색시와 결혼도 했다. 부모님 환갑잔치도 떠들썩하지는 않아도 마을 어르신들 모시고 국수 한 그릇씩 대접했다. 땅에 뿌린 대로 거둬들여 거짓 없이 사니 농촌에서 사는 일이 그런대로 살아진다.




3월과 7월에는 누에농사도 지었다. 누에는 깨끗한 환경에서 자라기 때문에 담배와 상극이라지만 조심해서 하면 별 탈이 없다.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대나무를 걸치고 잠박을 건다. 뽕잎을 아주 작게 잘라 누에가 먹을 수 있도록 넣어준다. 다 먹고 애기잠을 자고 나면 4일 지나 두 번째 잠을 잔다. 또 뽕잎을 잘라 넣어 주는데 처음 넣을 때보다는 조금 큰 크기로 잘라 넣어준다. 막잠을 잘 때는 뽕잎 크기를 좀 더 크게 잘라주고, 막잠을 자고 나면 뽕잎채 넣어주면서 뽕나무를 가지치기해서 준다. 누에가 고치를 짓도록 짚으로 섶도 마련해 놓는다. 누에가 고치를 만들면 누에고치를 출하하면 되는 것이다. 농사일이라는 것이 손이 가지 않으면 농사라 할 수도 없다. 누에는 최대 6장까지도 쳤다. 아내는 누에가 징그럽다고 쳐다도 보지 않더니 자꾸 보니 귀엽다고 한다. 담배농사와 함께 쏠쏠하게 돈을 모을 수 있는 방편이었다.


논이라고 겨우 5마지기를 얻기는 했지만 소출이 시원치가 않았다. 정부에서 통일벼를 생산하라고 보급한다기에 받았다. 농부들 말이 통일벼가 밥맛이 없고 쭉정이가 많으며 짚도 쓸모가 없다고 하는데 수확량만큼은 두 배라고 한다. 일단 통일벼를 가져와 심어보기로 한다. 벼 바심을 하고 수확해보니 과연 듣던 대로 두 배로 늘었다. 평균 소출이 321kg인데 656kg이나 되었다. 지화자 얼씨구나 좋다가 절로 나온다. 벼를 수확하고 받은 돈으로 소 2마리를 샀다. 그동안 쟁기질을 하려면 빌려서 사용했는데 이제야 내 소와 쟁기질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을에서는 지하수를 개발하고, 마을 안길을 넓히느라 남정네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마을에 모인다. 내 땅 남의 땅 가리지 않고 조금씩 내어 마을 안길을 만들고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슬레이트 지붕을 얹는다. 등잔불 아래서 담뱃잎을 목 지었는데 환하게 전기도 들어오니 그야말로 신세계다. 아무래도 세상이 조금씩 변해가는 모양이다.



모갯돈이 조금씩 모아지면서 논도 조금 더 사고, 소도 6마리를 더 샀다. 다만 논 면적이 넓어지다 보니 농약을 하게 되면서 뽕나무에 농약이 묻어 그 해 누에농사를 망쳤다. 누에농사를 지을 때는 약이 묻었을까 옷도 갈아입고 양말도 새로 갈아 신고 잠실에 들어가야 한다. 나만 약을 안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고심 끝에 누에를 접기로 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을 내 다른 이들도 하던 누에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누에농사가 정리되고 얼마 안 있어 조합장의 권유로 신풍리 농부들 70가구가 모여 꽈리고추 작목반을 만들었다. 정부에서 보조를 받아 하우스를 만들고 꽈리고추를 재배해 농협에 출하했다. 제일 더운 7월과 8월에 하우스에 들어가 고추를 따자니 죽을 맛이었다. 더위를 피해 꼭두새벽에 일어나 꽈리고추를 따기도 했지만 여간 고되지 않았다.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꽈리고추 가격도 점점 떨어졌다. 사람들이 하나둘 씩 떨어져 나가고 결국 10년 만에 작목반은 해체됐다.


내가 배운 것이 없으니 자식들만은 대학까지 공부시키기 위해 악착같이 일해 돈을 모았다. 하지만 대학 하나 보내기가 어디 그렇게 쉬운가 말이다. 딸까지는 공부 못 시켜도 아들만큼은 공부시키려고 소 한 마리 팔아 큰 녀석 대학은 보내고, 둘째 녀석 대학 갈 때 또 한 마리를 팔아 등록금을 대줬다. 아무래도 녀석들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이놈의 땅을 더 파봐야 할 것 같다.


아버지가 작고하셨다. 평생 배부르게 먹어보지도 못하고 일만 죽어라 하다가 돌아가신 양반이다. 죽어서는 아무 걱정 없이 편하게 지내시기를 바란다. 생전에 두 분 사이가 그렇게 좋더니만 그다음 해 어머니도 아버지를 따라가셨다. 줄초상을 치르고 나니 온몸에 기운이 쪽 빠진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논에는 모를 심고, 밭에는 고추도 심어야 자식들 여우살이 시키고 먹고살 수 있으니 인간 세상살이가 별 거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꽈리고추도 접으니 적당한 작물을 재배해 판매해야 하는데 마땅한 품종이 뭐가 있을까 요리조리 고민해본다. 그래도 콩 종류가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누구나 다 먹는 것이고 시세 변동은 있지만 그나마 좀 수월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먼저 3월에 완두콩을 심어 6월에 수확하고, 시간차를 두고 호랑이 강낭콩을 심으면 7월이나 8월에 수확할 수 있다. 고추, 옥수수, 깨 등은 늘 하던 것이니 기존대로 하면 될 것이다.

800평에 호랑이 강낭콩을 심어 장사꾼에게 넘기니 그런대로 괜찮았다. 농사짓는 일이 별거던가. 땅이 있으니 작물을 심고, 작물이 자라나니 잡초를 뽑아주며, 잘 자란 작물을 걷어내는 것이 농사다. 그저 자연의 이치대로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문제는 내가 조금씩 몸이 어려워진다는 것에 있다.




자식들 공부시키느라 장만했던 소도 여든 살이 되던 해 모두 처분했다. 예정에는 여물을 쒀서 먹이고, 새로 장만한 짚으로 잠자리도 봐줬다. 요즘은 간편하게 사료를 먹이지만 병들지 않게 소 잠자리도 보살펴주고, 수시로 영양가 있는 것도 챙겨줘야 한다. 그런데 이제는 그 모든 일이 힘에 부친다. 자식들은 진즉에 처분했어야 한다 하는데 말이 어디 그렇게 쉬운가. 내 자식처럼 돌보던 소를 처분하는 일은 눈물겨운 일이다. 트럭에 실린 소의 눈에서 주먹만 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자니 마음이 무너진다. 흙먼지 날리며 떠나가는 트럭을 보고 밤새 깡소주만 마셨다.


60년을 땅에 의지해 살았다. 지금도 땅에서 뽕긋하게 솟아오르는 작물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뛴다. 자기 스스로 살기 위해 이렇게도 어렵게 움을 틔우고자 몸부림치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인간이나 작은 작물이나 세상살이가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닐 것 같다는 동지애마저 느껴지니 말이다. 자식들은 이제 좀 편하게 살라고 하지만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평생 몸을 써서 일해왔는데 두 손 놓고 집에 들어앉아 있으면 마음이 어수선하다. 밭에 잡초가 무성할 텐데, 남들은 고추 모종을 가식 했을 텐데 등등을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호미 자루를 쥐고 밭둑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한다. 내 몸이 아주 움직이기 어려워지기 전까지라도 조금씩 움직여 적어도 내 먹을 것은 스스로 만들어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나. 남들이 뭐라 그러든 말든 말이다.




아이의 이름은 농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