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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 체크의 중요성
(2) 미디어의 거짓말.4

4. 그 밖의 이야기들

4. 그 밖의 이야기들


(1) 의자왕과 3천궁녀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단군 할아버지가 터 잡으시고

홍익인간 뜻으로 나라 세우니 대대손손 훌륭한 인물도 많아

고구려 세운 동명왕 백제 온조왕 알에서 나온 혁거세

만주 벌판 달려라 광개토대왕 신라 장군 이사부

백결선생 떡 방아 삼천 궁녀 의자왕

황산벌의 계백 맞서 싸운 관창 역사는 흐른다’



우리에게 무척 유명한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하지만 ‘삼천 궁녀 의자왕’이라는 의자왕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심어주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아무리 역사는 승자를 위해 쓰인다지만 이정도는 거의 날조에 가깝습니다.

우선 가장 기본적으로 삼천 궁녀가 뛰어내렸다는 낙화암의 높이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낙화암-1629179202162.jpg

위의 사진과 같이 낙화암의 총 높이는 약 106m이고, 궁녀들이 뛰어내렸다는 백화정이 있는 곳의 높이는 약 60m입니다. 그럼 한 사람 당 높이를 30cm만 잡아도 3천 명이니 90000cm, 미터로는 900m가 됩니다. 물론 차곡차곡 떨어져 쌓이지는 않았겠지만, 106m에서 뛰어내렸다고 해도, 도저히 3천명이 뛰어 내려 죽을 수 있는 높이는 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상상을 하면 좀 잔인하지만, 단순 계산을 해 봐도 이건 억지스러운 내용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밖의 역사적 사료를 토대로 추론해 보아도 의자왕과 3천 궁녀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조선 시대의 평균 궁녀 수는 600명(왕이 있는 대전 외에도 왕대비, 또는 대왕대비, 동궁, 그 밖의 왕자와 공주궁, 그리고 후궁과 각 별궁에 소속된 여인까지 포함)이었다.

- 이익, <성호사설>


한반도 북쪽을 빼앗겼다고는 하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합쳐져 만든 조선의 궁녀 수가 600명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백제에만 3천의 궁녀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무엇보다 당시 수도인 사비성의 인구가 약 5만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럼 단순하게 여성 인구를 2만5천 명으로 잡고, 여기서 결혼한 여성을 다시 반 나누면 1만2천5백 명, 아이를 다시 반 나누어 제외하면 6천2백5십 명인데, 그중 절반인 3천 명이 궁녀였다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 노인 숫자까지 생각한다면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성은 모두 궁녀였다는 결과 밖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엄청난 거짓말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요? 삼국시대 전쟁에서 승리한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것이 조선에 이르러 드러납니다.

조선 명종 때의 호조판서 민재인은 자신의 시 <백마강부>에서 ‘구름처럼 많은 삼천의 궁녀들(三千其如雲)’이란 시어를 넣어 시를 지었고, 이것이 마치 정설처럼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해동증자’라 불리던 의자왕이 말년에 엇나간 부분이 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이상한 누명까지 씌우고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2) 민족대표 33인은 민족을 대표할 수 있을까?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의 자주성과 독립을 선언한 3·1 운동은 1919년 3월 3일 고종 장례식에 맞춰 전국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른 사건입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뒤처리를 위해 열린 파리 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은 한 민족이 그들 국가의 독립 문제를 스스로 결정짓게 하자는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웠고, 이것은 우리나라와 같이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과 독립을 열망하는 약소 민족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일본 유학생들은 1919년 2월 8일, ‘2·8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였고,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와 2 · 8 독립 선언서의 영향으로 국내에서는 3·1 운동이 전개된 것입니다.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은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으며, 탑골 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 3·1 운동에서 3개월 동안 무려 200만에 가까운 우리 민족이 봉기하였는데, 이중 7천 5백여 명이 사망하고, 1만 5천여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5만여 명이 투옥당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처럼 3·1 운동은 민족 모두의 염원이 담긴 범민족적 항일 독립 운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3·1 운동을 주도했던 33인의 민족 대표는 어떤 결말을 맞이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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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길선주는 부흥회를 인도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유여대는 의주에서 독립 운동을 주도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태화관에 가지도 않았으며, 김병조는 지방에서 올라오지도 않았고, 정춘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불참했습니다.

박희도, 정춘수, 최린은 훗날 명백하게 친일파로 변절까지 합니다.

물론 이들이 왜 애초의 모임 장소였던 탑동(탑골) 공원이 아닌 태화관에 모였는지, 태화관이 요릿집인지 기생집인지 등에 대한 논란은 각설하고, 그들이 받은 벌은 무엇이었는지를 보겠습니다.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한용운,이종일, 최린, 이승훈 - 징역 3년

이갑성, 오화영, 김창준 - 징역 2년 6개월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권병덕, 김완규,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박희도, 최성모, 이필주, 신석구, 박동완, 신홍식, 양전백, 이명룡, 유여대 - 징역 2년

정춘수, 백용성 - 1년 6개월

양한묵 - 재판중 사망

길선주 - 무죄

김병조 - 체포되지 않음


앞서 살펴 보았던 것처럼 7천 5백여 명이 사망하고, 1만 5천여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5만여 명이 투옥당했던 거사의 주도자들이 받은 형량치고는 참으로 낮다고 할 것입니다.

3.1 운동이라는 역사적인 큰 사건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운동을 주도한 것이 33인의 민족대표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정말 우리 민족을 대표할만한 지도자였을지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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