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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내가 조선의 국모다!

3. 내가 조선의 국모다!


2000년 대에 들어서면서 드라마는 물론 뮤지컬과 조수미 씨의 뮤직 비디오를 통해 갑자기 영웅이 된 또다른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조선의 국모다”를 외쳤다고 전해지는(실제로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다고 합니다) 명성황후입니다.

명성황후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임오군란을 이해해야 합니다.

ha5_53_i1.jpg 구한국군과 별기군(1890) 출처: 한국근현대사사전

임오군란은 1882년(고종 19) 6월에 일어난 구식 군대의 군변으로 당시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5년 이상, 구식 군대의 군졸들은 13개월 동안 급료를 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13개월 만에 1달치 급료로 준 쌀이 절반 이상 모레가 섞인 것이었고, 이로 인해 구식 군대의 군졸들은 반란을 일으켰지만 청나라의 개입으로 실패한 사건입니다.

임오군란의 배경에 바로 명성황후와 그 친족인 민씨 일파가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정권을 잡으면서 덩달아 명성황후와 민씨 일파가 힘을 얻게 되는데, 이들은 온갖 비리를 저질렀고, 임오군란 당시 군인들의 급료를 빼 먹은 것 역시 이 일파의 소행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명성황후는 무당에 빠져 무속 행위를 벌이는 데 엄청난 돈을 사용합니다. 그 내용이 드러난 문헌은 다음과 같습니다.


‘원자가 탄생하고 궁중에서는 복을 비는 제사를 많이 벌였는데, 팔도 명산을 두루 돌아다녔다. 임금도 마음대로 잔치를 베풀었으며, 하사한 상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임금과 민후가 하루에 천금을 썼으니, 내수사의 재정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어서 결국 호조나 선혜청에서 공금을 빌려 썼는데도 신하들 가운데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아뢰는 자가 없었다.’

- 황헌, <매천야록>




‘민비가 정권을 장악하고 큰 돈을 쓴 것은 그 아들을 위한 것이 처음이었다. 세자 책봉 문제로 여간한 경비가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세자를 책봉한 이후에도 공신들에게 상금과 청국에 보내는 예물, 사절의 왕복 비용 등 두 살의 왕자를 위해 민비는 수백만 금의 국고를 낭비하였다. 그 밖에도 세자가 약간의 탈이라도 나면 전국의 명산과 대천에 기도를 드리는 한편, 홍재학이 밝혔듯이 무당, 맹인을 궁중에 끌어들여 많은 비용을 지출했다. 그 심한 예로는 금강산 1만 2천 봉의 봉우리마다 돈 1천 냥과 쌀 1석, 베 1필을 바쳐 세자의 장수를 빌었다고 한다. 궁중에서는 무당, 잡배의 굿놀이가 끊이질 않았으며, 특별한 무녀에게는 수천 냥에서 수만 냥까지의 상금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여왕 민비가 뿌리는 돈은 김몽용이 한번 춤출 때마다 3천금 씩 던졌고, 이유인이 점을 칠 때마다 비단 1백 필과 금 1만 냥의 상을 내렸다. 그 중에서 특히 진령군이라는 무녀는 신임이 두터워 옥관자의 권세를 누려 대관들조차 그녀 앞에서는 허리를 숙였다. 진령군이나 이유인은 이후로도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하였다.’

- 기쿠치 겐조, <대원군전>




‘신이 억만 백성을 대신해 아뢰옵니다. 국정을 농단하고 임금을 현혹시킨 요사스러운 무당에 대하여 뭇 사람들이 살점을 뜯어 먹고 싶어할 정도로 분하게 생각합니다.

하오나 전하께서는 문책은커녕 오히려 비호하시니 백성들의 원통함이 어찌 풀리겠습니까? 바라건대 어서 죄인을 주륙하신다면 민심이 비로소 상쾌하게 여길 것입니다.’

- 지석영의 상소문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민씨 일파는 온갖 비리를 통해 사리사욕을 채웠고, 명성황후는 무속 신앙에 빠져 나랏돈을 물 쓰듯이 써 댔습니다.


그녀의 매국적 행위는 계속 이어졌는데, 대표적인 것이 외세의 개입 요청과 대원군의 납치를 주도한 것입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나라에 지원병을 요청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대원군이 나서서 군란이 수습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군란 가담자에 대한 복수와 응징 요청하여 170여 명이 체포되어 10여명이 사살되었습니다. 또한, 서울로 되돌아온지 사흘 만에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하도록 하였고, 3년 뒤 대원군 석방의 기미가 보이자 민영익을 보내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3년 동안 대원군측 인물 30여 명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명성황후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청나라가 일제에 힘이 밀리는 모습을 보이자 바로 친러파로 전향을 한 것입니다.


청과 일본은 갑신정변 이후 서로의 충돌을 방비하기 위해 군대의 철수를 합의하였습니다. 덕분에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었고 민씨 일파는 청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게 됩니다.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이 땅에 새로운 외세를 끌어드린 것입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청과 일본은 철수를 하지 않았고,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 러시아까지 끼어든 이권 다툼의 장이 되어버렸습니다.


명성황후와 민씨 일파의 탐욕으로 인해 고통받던 백성들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이들의 세력은 전라도 전역으로 확산 후 진주성 함락시킬 정도로 커졌고, 그러자 민씨 일파는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이들을 제압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역시 군대를 상륙시켰고, 결국 관군이 진주성 탈환하는데, 사실 농민군들이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물러나길 요구하며 스스로 해제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오히려 군대를 증강했고, 이로 인하여 청일전쟁 발발하였습니다.


친일파였던 명성황후와 그 일파는 이후에는 청나라를 의지했고, 청일전쟁 후에는 다시 일본에 의지했으며, 러시아의 힘이 강해지자 친러파로 전향했습니다. 결국, 일본은 자신들의 이권 강화를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키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황후가 일본 깡패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는 점은 매우 분노할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더욱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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