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미디어의 거짓말(2)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잘못 알려진 것들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장군의 아들 김두한’입니다. 영화 <장군의 아들> 시리즈나 드라마 <야인시대> 등을 통해 많은 사람들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김두한이고, 김두한의 딸은 김을동, 그녀의 아들은 송일국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일까요?
이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친 백야 김좌진 장군의 삶에 대해 먼저 확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위의 연보는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 사업회(kimjwajin.com)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이 연보를 통해 우리는 김좌진 장군의 생을 단편적으로 나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다음 신문 기사(매일신보 1925년 9월 15일)를 통해서는 김좌진과 김두한의 연관성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영고탑에 근거를 두고 노령방면으로 활동하고 있는 과격파의 수령 김좌진은 정부 김계월(27)과 그 사이에 낳은 김두한을 데려가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써 보았으나 국경의 경계가 엄중하여 오늘까지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바 이번 김계월도 정랑 김좌진을 생각하고 항상 매을히 지내던 중 지난 9일 자기 모 박씨와 자식을 데리고 가산 도구를 방매하여 여비를 만들어 가지고 경성역을 출발하여 무사히 목적지에 이르러 8년 만에 부부와 부자가 반갑게 대면하게 되었다더라.
문제의 신문 기사는 당시 매일신보가 어떤 신문이었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매일신보는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친일 언론이었습니다. 즉, 일제는 매일신보를 통하여 당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던 김좌진 장군에게 흠집을 내기 위해 위와 같은 기사를 내보낸 것으로 진실로 믿기 어려운 기사입니다.
또한 김두한은 <명인옥중기>,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 등의 책과 동아방송 라디오 ‘노변야화’에 출연하여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나의 조부는 고균 김옥균이다. 나의 부친은 백야 김좌진이다. 나는 당대 세도가 당당했던 이른바 명문 안동 김씨의 서족이다. 내가 일곱 살 때 세계전 사상 희귀한 청산리대첩이 있자 일경은 즉각 외조부님과 모친(상궁의 딸)을 투옥했다. 그래서 나는 천애 고아가 되었다. 그리고 열 살이 되던 해에 불망의 독립군 대장인 부친의 별세를 전해 듣고 울었다. 그래서 혁명가가 되겠다고 단신 서울로 백 육십 리를 걸어 내려왔다.”
그런데 김옥균은 1884년 일본에 망명하여 1894년 암살 당할 때까지 일본에서 살았고, 김좌진 장군은 188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습니다. 1884년에 이미 한국에 없던 김옥균이 어떻게 5년 뒤에 한국에서 아들을 낳을 수 있었을까요?
이점에 대하여 김두한은 나중에 김옥균이 김좌진을 양자로 들인 것이라고 변명하지만 이것은 그저 김두한의 주장일 뿐이고, 공식적으로 김옥균에게 친손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일곱 살 때 청산리대첩이 있었다고 하는데, 청산리대첩은 1920년에 있었고, 김두한은 1918년 생으로 당시 나이는 3살이었습니다. 그리고 열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인 김좌진 장군의 죽음을 듣고 울었다는데, 김좌진 장군은 1930년에 사망했습니다. 즉, 당시 김두한의 나이는 13살이었습니다.
실제로 김좌진 장군에게는 3명의 부인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첫째 부인이 오숙근, 둘째 부인이 김계월, 셋째 부인이 나혜국입니다. 그리고 김두한이 자신의 어머니로 밝힌 인물이 바로 김계월인데, 이분에 대하여 김두한은 상궁의 딸이라고 말합니다. 궁녀란 말 그대로 궁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 살아야 하는 존재로 쉽게 말하면 왕이 소유한 여인입니다. 물론 나라를 빼앗긴 1910년 이후에 궁에서 나와 시집을 갔을 수도 있지만, 그 상궁이 낳은 김계월이 1918년에 김두한을 낳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부분입니다.
물론 이 모든 사실 역시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양하고 그럴싸한 음모주의자들의 주장일 뿐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김두한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공식이 어느 샌가 굳어져 버렸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의심없이 수용하고 있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김두한의 가계도 문제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겪어온 수많은 파도 속에서 이정도 문제야 그리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음 이야기는 조금 문제가 다릅니다.
가장 큰 문제는 깡패를 영웅시 하는 풍조가 바로 이 김두한과 관련된 영화와 드라마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김두한을 나라를 위해 일제와 맞서 싸운 ‘협객’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자신에게 이득을 주는 이른바 ‘나와바리’를 지키기 위해 싸운 상대가 일본 깡패였을 뿐이지 구국의 심정으로 일제와 맞서 싸웠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일제 시대에는 징용을 피하기 위해 경성특별지원청년단(반도의용정신대)에 들어갔는데, 이것은 두 말할 필요 없는 친일 행위이며 이로 인해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단체장이었던 전직 헌병이자 전직 대구 경찰서 고등계경찰 장명원이 기소유예를 받으며 덩달아 무혐의로 처리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청년들이 징용에 끌려가던 상황에서 단순히 징용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친일 단체를 조직하고, 당시 일제의 경시청에서 활동 지원금을 받기도 했다는 점을 볼 때 그들이 친일 행위를 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게다가 해방 이후에도 김두한은 이승만 정권 아래서 이른바 정치 깡패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백의사 단장 염응택과의 만남 이후 백색 테러리스트로 변모한 그는 대한민주청년동맹 결성합니다.
1946년에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주도의 철도 노조 총파업에 투입되어 핵심 간부 8명 살해했으며, 공산당 간부와 노조 핵심 인물 등을 납치 및 살해(72명)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미군정 재판부에서 사형 선고받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사면으로 풀려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그의 긍정적 모습만을 부각시켜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을 염두에 둔다고 하여도 그는 깡패였고, 친일행위자였으며, 정치 깡패였던 범죄자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물론 그의 마음 속에 정의감이라는 것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그를 영웅으로 추켜세우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인식이 만들어낸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살펴볼 인물은 김두한 보다 더욱 심각한 오류로 인해 잘못 알려진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