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미디어의 거짓말
긴 시간 동안 미디어는 우리에게 크고 작은 거짓말과 과장 혹은 축소를 통해 사실과는 다른 진실을 주입해 왔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소개할까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유대인들이 독일군에 의해 학살 당했다는 것은 진실입니다. 그리고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그런 상황을 잘 묘사한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당시 독일군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약 4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 포스터
그러나 이 작품에서 묘사한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주장도 많습니다. 우선 두산백과에서 검색해 보니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1940년 4월 27일 수용소 건립 후, 6월 최초의 폴란드 정치범들이 수용되었다.
1941년 대량살해시설로 확대, 1942년부터 대학살 시작되었다.
1945년까지 가스, 총살, 고문, 질병, 굶주림, 심지어는 인체실험을 당하여 죽은 사람이 400만 명으로 추산된다.
희생자의 유품은 재활용품으로 사용, 장신구는 물론 금니까지 뽑아 금괴로 만듦, 머리카락을 모아 카펫을 짰으며, 뼈는 갈아서 골분 비료로 사용하였다.
1945년 1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나치는 대량학살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막사를 불태우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MBC의 '신기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쉰들러라는 인물 자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의혹을 제기하였습니다.(2010년 2월 7일)
쉰들러 리스트는 사실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리스트이다. 쉰들러는 공장의 노동자들을 저렴하게 부리기 위해 유대인들을 보호하는 척한 것이다.
쉰들러는 자신이 데려온 유대인들의 귀중품 갈취하기도 했다.
쉰들러는 애초에 호색한이었고, 반인도주의적인 사람이었다.
쉰들러는 유대인들에게 거짓 증언을 시켰다.
자세한 내용은 유튜브나 다시 보기 등을 통해 직접 확인해 보시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쉰들러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의혹도 있지만, 저는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났다는 학살에 대한 의혹을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물론,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하지 않았다라는 말을 하려는 점은 아니란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히틀러는 미치광이이며, 나치 역시 미치광이의 수족으로 미친 짓을 한 것은 맞습니다. 다만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몇가지 내용에 대한 의혹 제기입니다.
우선 3년 동안 400만 명을 학살했다는 내용에 관해서 입니다. 1941년 대학살 시설로 확대하여 1942년부터 대학살이 시작되었고, 1945년 1월에 수용소를 파괴했다고 하니 대략 1941년에서 1944년 말까지 대략 3년으로 잡으면 1095일이 됩니다. 이 기간 동안 쉬지않고 하루에 3,652명 살해했다는 것인데, 대체 무엇으로 이런 대량 학살이 가능했을까요? 바로 공동 샤워실로 위장한 가스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프레드 루처(Fred A. Leuchter: 미국의 가스실 전문가), 윌리엄 린제이(William B. Lindsey: 화학 공학자), 발터 뤼프틸(Walter Lüftl: 오스트리아 엔지니어 회의소 회장) 등이 직접 조사한 결과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일명 ‘가스실’에서는 그런 학살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죽을 정도의 가스를 밀폐된 가스실에 넣고 그 가스가 모두 빠져나가야 하는 시간은 물론 그 시체들을 뒤져서 귀중품을 빼돌리기에는 시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군대에서 화생방 훈련을 위해 가스실에 모의 가스를 터트려도 그 가스가 빠져나가는 데 한참의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독가스로 가득 채웠던 가스실을 모두 환기시키고, 독일군들이 그 시체들을 가스실에서 빼낸 뒤, 시체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시체들의 금니를 빼고, 항문이나 손을 뒤져서 귀중품을 빼돌리려면 엄청난 시간이 소요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비르케나우에 새로운 수용소를 지으면서 아예 화장까지 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시간이 조금 더 단축되었을 수는 있지만 어쨌든 독가스가 모두 빠져나간 뒤 독일군들이 잿더미 속을 뒤져야 했다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또한, 3년 동안 6곳의 가스실이 모두 매일 정상 작동 되었어야 합니다. 가스관 하나만 문제가 생겨도 독일군 자신들마저 위험에 처할 수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노동력이 부족한 아이와 여성, 노인들은 거의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가스실로 끌려갔다고 하는데, <안네의 일기>의 주인공인 안네를 비롯한 수많은 아이와 여성들은 살아남았습니다.
<안네의 일기>에 등장하는 안네의 가족들은 1944년 8월 발각되어 1944년 9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압송되었고, 이후 서독의 베르젠벨젠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덕분에 그 주인공인 안네 프랑크와 언니인 마고 프랑크는 1945년 2월, 장티푸스로 사망하였으며, 아버지인 오토 프랑크는 장티푸스 회복을 위해 수용소 병원에 입원하였고, 1945년 1월 병원에 남겨졌다가 남은 생을 살고, 1980년 사망하였습니다.
즉, 어린 아이이자 여성이고, 환자이기까지 한 가스실 1순위였을 안네와 언니는 병을 치료받기 위해 병원으로 이송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관련한 사항은 당시 독일군들의 보고서에도 드러나 있습니다.
히믈러(강제 수용소 총사령관이자 나치 친위대의 사령관)는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수용소 의사들은 죄수들의 영양상태를 과거보다 더 자주 관리해야 하며, 행정실과 협력하여, 수용소장에게 개선안을 제출해야 한다. 수용소 의사들은 각종 노동 장소에서의 노동 조건들이 가능한 많이 개선되고 있는지 예의주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아우슈비츠의 독일 의사들은 죄수들의 사망률을 줄이기 위해, 광범위하고, 강력한 조치들을 실시하여
“이미 보고한 바와 같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발진티푸스는 11월과 12월에 거의 진정된 뒤, 동부로부터 새로 도착하는 수송자들이 가지고 온 발진티푸스가 병력들 뿐 아니라, 아우슈비츠 수용자들 사이에 새로이 등장했다. 즉각 취해진 대응조치들에도 불구하고, 발진티푸스의 완전한 진압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는 답변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아우슈비츠에 관한 생존자들의 증언도 존재하는데, 오스트리아 여성 Maria Vanherwaarden은 1988년 3월에 토론토 지방법원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나는 1942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는 중 가스실에 대해 들었고, 창이 없는 대형 콘크리트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샤워 꼭지에서는 가스 대신 물이 나왔다. 나는 많은 수용자들이 여러 가지 질병 또는 자살로 죽는 것을 목격했지만, 대량 학살이나 가스 처형 등은 보지 못했다.’
유대인 여성인 Marika Frank 역시 1944년 7월 헝가리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압송되었는데, 그녀는 전쟁이 끝난 뒤, 자신이 그곳에 수용되었던 기간 동안 가스실에 대해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고 증언했으며, 나중에서야 가스 처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런 증언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에게도 나타납니다.
1946년 4월 15일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아우슈비츠의 수용 소장은 1940년 5월과 1943년 12월 사이에 최소한 250만명이 그곳에서 가스 처형 및 소각에 의해 처형되고 학살되었으며, 최소한 또 다른 50만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 그 기간 동안에만 모두 합해 약 300만명이 죽었다고 자백했습니다.
하지만 훗날 영국군 정보 하사관 Bernard Clarke는 자신과 다른 5명의 영국 군인들이 수용 소장의 자백을 얻기 위해 그를 어떻게 고문했는지를 밝히며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이에 대하여 아우슈비츠 수용 소장은 “내가 250만명의 유대인들을 죽였다는 진술서에 서명한 것은 분명하다. 나는 그것이 500만의 유대인들이었다고 해도 똑같이 말했을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그들에겐) 어떤 자백도 얻어 낼 수 있는 확실한 방법들이 있었으니까…….”
또한, 아우슈비츠의 진실에 대한 접근은 석방된 수용자들을 통해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 20만 명 이상이 아우슈비츠로부터 다른 수용소들로 이송되었고, 소련에 의해 그 수용소들이 해방되었을 때, 그곳에는 약 8천명이 생존해 있었습니다. 또한, 그곳에서 복역했던 약 1,500명의 죄수들은 이미 석방된 상태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아우슈비츠는 학살의 현장이긴 하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것처럼 들어가면 무조건 죽어야 나오는 곳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도입부에서도 한 차례 이야기했지만, 히틀러나 나치의 미친 짓들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결코 없습니다. 또한, 나치에 의해 저질러진 유대인 학살을 부정하고 싶은 의도도 없습니다. 단지 그 당시 피해자에 대한 집계가 과장된 측면이 있을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싶을 뿐입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매우 뛰어난 영화 감독입니다. 하지만 그는 유대인이며 또한, 창작자입니다. 그가 만든 영화는 영화로 접근하는 것이 타당하며, 그것을 역사적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오히려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