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성공한 리더들의 특징
: 유비 현덕은 이렇다할 장점이 없는 인물이다. 문에도 무에도 별 성과를 보이지 못했으며, 출신도 스스로는 한고조의 후예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저 돗자리 장수였을 뿐이다.
게다가 고집불통의 성격에 전형적인 만만디(천천히) 성향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특히 말년에는 모든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관우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와 전쟁을 벌였고, 거기서도 마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군대를 모두 모아놓아 육손의 화공에 당하게 만든다. 그리고 결국 그때 얻은 병으로 인해 죽음을 맞게된다.
그러나 그는 그만의 매력이 있었던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어느 나라에 가서도 높은 자리를 차지했을 제갈량과 오호대장군이 모두 목숨을 바쳐 그를 따랐다는 점만 보아도 이것은 확실하다.
그는 전형적인 흙수저의 성공 스토리를 갖고 있기도 하다.
공손찬의 밑에서 황건적 토벌에 참여했으며, 이후 반동탁 연맹에 참여했고, 원소와의 전쟁에도 참여한다. 그때까지만해도 별볼일 없는 세력이었던 그는 도겸을 도와 조조를 막고 서주에 안착하며 비로소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지만 이것도 믿었던 여포에게 빼앗긴다. 그리고 조조의 밑에서 다시 세력을 기르고 군사를 빌리지만, 조조의 공격에 밀려서 이번엔 원소의 밑으로 들어간다. 이후 관도대전에서 조조에게 패한 원소가 사망하자 유표의 밑에 들어가고 이때 제갈량을 얻는다. 그리고 유표가 죽자 다시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가 손권과 연합하여 적벽대전을 치루고 나서야 형주에 안착하며 제대로된 땅과 군사를 가진 군주가 된다. 이후 익주 공략에 성공한 그는 촉한을 건국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렇다면 흙수저에 능력마저 별 것 없던 유비는 어떻게 촉의 황제에 오르게 될 수 있었을까?
(1) 인(仁)과 의(義)의 리더
: 유비는 본인이 밑바닥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서민들의 삶과 마음을 이해했다. 유비 세력 초기 늘 쫓겨다니기만하는 유비를 따라 피난을 떠나는 백성들이 항상 많았던 이유가 유비는 그들의 처지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백성들로 인해 속도가 나지않아 쫓아온 적군에게 위험한 상황을 맞을 때도 그는 자신을 따라온 백성들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또한 앞서 ‘간뇌도지’의 사례에서처럼 유비는 자신의 부하 장수들을 무척이나 아꼈다. 조자룡을 위해 아들을 팽개쳤다거나, 장비의 실수로 함락당한 성에 유비의 아내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안 장비가 자결하려는 순간 ‘형제는 손발과 같고, 아내는 의복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며 말렸다는 점을 볼 때(그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물론 소설 속에서 과장된 표현이었겠지만 그가 부하 장수들을 진심으로 아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2) 지지하는 리더
: 유비는 본인의 부족함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부하들을 전폭적으로 믿고 지지했다.
그는 늘 자신이 판단하기보다는 “이러이러하니 어떻게하는 게 좋겠소?”라고 부하들의 의견을 묻는 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 그들의 의견만을 쫓지는 않았지만 어떤 일을 행하기 전에 충분히 사전에 의견을 청취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그대의 재능이 조비의 열 배에 달하니 필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끝내 대사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오. 만약 내 아들이 보좌할만하면 보좌하시고, 그가 재능 있는 인물이 아니면 그대가 스스로 취하도록 하시오.”
죽음을 앞둔 유비는 이처럼 촉나라의 전권을 제갈량에게 맡기기도 했다. 이 부분을 두고 혹자는 제갈량에게 오히려 배신하지 못하도록 짐을 지운 것이라고 하기도한다. 하지만 <삼국지연의> 전반에 흐르는 유비의 성향을 비추어보자면 이것은 유비의 진심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하다.
(3) 인화의 리더
: 이런 유비의 성향은 부하들의 결속을 강화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북방 출신인 관우, 장비, 조자룡 등, 형주 출신인 제갈량, 방통, 황충 등, 익주 출신인 마량, 마속, 강유 등이 서로 한마음 한뜻으로 끝까지 유비를 따랐다는 것은 사실 엄청난 성과이다. 중국 대륙이 워낙 이민족이 혼합한 나라이긴 했지만 이 정도면 거의 서로 말도 문화도 다른 3개의 나라 사람들이 연합을 이룬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러한 유비 리더십의 핵심은 섬김과 겸손이라고 할 수 있다. 유비는 자신을 낮추어 상대방의 진심을 이끌어 낼 줄 알았던 리더이며, 부하에게 목표를 공유하고 부하들의 성장을 도모하면서, 리더와 부하 간의 신뢰를 형성시켜 궁극적으로 조직 성과를 달성하게하는 ‘서번트 리더십’의 대가였다고 할 수 있다.
위왕조조는사람을잘파악하여거짓으로미혹하기가어려웠다.
특별히재능있는자를능히식별하여발탁할줄알았고,
신분에구애받지않고재능에따라임용하니그들모두자신의능력을발휘할수있었다.
<자치통감>
: 조조는 흔히 말하는 나쁜 남자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환관 중 한 명인 조등의 양자인 조승의 아들이던 조조는 충분히 금수저로 자랐으며 그래서 자기중심적인 인물이었다. 냉혈한이고 질투도 심했지만 자신의 사람은 확실하게 챙길 줄도 알았던 양면성을 지니기도 했다.
당시 인물평에 일가견이있던 허소가 "그대는 치세의 능신이요, 난세의 간웅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스스로 아주 만족하기도 했던 조조는 그야말로 배경좋은 동네불량배로 자랐다. 그러던 중 황건적 토벌에 참가했던 그는 차츰 십상시와 대립하게 되었고, 이후에는 반동탁연맹을 조직하며 본격적인 자신의 길을 걷는다. 청주를 차지한 후 크게 성장한 그는 서주정벌을 실패하며 조금 더 성숙한다. 이후 헌제를 확보한 뒤, 정치적인 실권을 장악한 그는 원술를 격파하고, 여포를 죽였으며, 유비와 장수를 격파하여 황하 부근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후 원소를 격파하며 기주, 청주, 병주를 장악하였으며, 유표를 격파하며 형주를 장악했는데 이때 유비는 조조에 쫓겨 도주한다. 하지만 연전연승을 달리던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유비, 손권 연합에 패배하며 제동이 걸렸고, 결국 삼국을 정립하는 선에서 멈추게 된다. 이후 자신은 위왕에 오르며 아들을 황제 자리에 올리려는 계획을 이루어 낸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수많은 영웅들이 조조에게 죽거나 무릎을 꿇었던 것일까?
(1) 사람을 잘 다루는 리더
: 조조는 적재적소에 알맞은 인물을 배치할 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 어린시절부터 동네 불량배로 자라면서 사람들을 이끌어 본 경험 때문일까? 그는 용병술에 일가견이 있었다.
또한, 도덕성이나 행실과 상관 없는 실력 위주로 사람을 뽑았으며, 과거의 잘못은 덮어주는 대범함을 보이기도했다. 1만의 군사로 10만의 원소군을 무찌르고 원소의 본거지를 접수한 조조는 그곳에서 원소와 내통했던 자신의 측근들의 편지를 발견한다. 하지만 그는 바로 그것을 열어보지도 않고 공개적으로 태워버리며 “원소가 한창 기세를 올릴 때는 나 자신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가 그랬을진데 하물며 옆에 사람들이야 오죽했겠는가?”라고 넘겨 버렸다. 그리고 원소의 밑에서 조조는 물론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까지 매도하는 글을 썼던 진림을 사로 잡았을 때는 “예전, 그 격문을 만들었을 때, 나의 일을 나쁘게 말한 것은 상관하지 않더라도, 어째서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까지 욕을 보였느냐?”고 묻고는 그를 용서한 뒤 속관(사무관)으로 등용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적아를 가리지 않는 인재사랑을 실천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관우와의 관계였다. 조조는 관우를 자신의 수하로 삼기 위해 온갖 정성을 들였으나 끝내 조조 진영의 관문 5개를 홀로 돌파하며(오관돌파) 유비에게 돌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자 마침내 조조는 작별 선물로 비단으로 지은 전포 한벌을 전하면서 “천하의 의사를 나의 복이 적어 붙잡아 두지 못하는 구려”라며 거듭 애석함을 드러내고 관우를 보내 준다.
또한, 동탁의 부하였던 장제의 조카 장수를 공격하다가 큰아들이었던 조묘, 조카인 조안민, 호위대장 전위가 죽고, 자신 역시 팔에 화살을 맞는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후에 가후의 설득으로 장수가 투항하자 서로의 자식들을 혼인시켜 사돈으로 만들어 장수를 진심으로 감복시킨다.
이러한 그의 용병술은 결국 풍부한 인재풀을 완성시켰는데, 유비와 조조의 인재풀을 비교해보면 그차이가 얼마나 심한지를 알 수 있다. 유비에게는 제갈량이라는 희대의 천재가 있었지만, 조조에게는 순욱, 곽가, 가후, 정욱, 사마의 등의 수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덕분에 제갈량이 직접 참여한 전투에서는 졌을 망정 전체적인 전쟁에서는 늘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의 천재를 능가하는 집단지성의 힘인 것이다.
(2)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리더
: 조조는 스스로의 문학적 재능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을 인정받기도 했다. 시 쓰기를 즐겼던 조조는 건안의 문학풍을 만들었고, 이것을 사람들은 ‘건안문학’이라고 하였다. 이때 이름을 떨쳤던 문인들 중 7명을 ‘건안칠자’라고 했으며, 조조와 그의 아들들인 조비, 조식의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에 셋을 묶어 따로 ‘삼조’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인문학적 재능은 한무제가 서역 땅에서 실시하였다는 ‘둔전제’를 부활시키며 꽃피우기 시작한다. 그는 변란이 계속되는 동안 주인이 없어 경작되지 않고 오랫동안 버려진 땅을 공전(公田)으로하여 농민과 병사들에게 개간하게 하고, 땅을 경작할 소가없는 자에게는 관우(官牛)를 빌려주어 그 수입의 6할을 바치게 하고, 자기 소를 가진 자에게는 수확량의 5할을 바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첫해에 처음 착수한 허현에서만 대략 1백만석의 수확을 올려 식량 부족을 해결하고 나아가 군량 확보에도 큰 기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이후 조조의 세력이 삼국 중 가장 강국으로 우뚝 서는 데에 밑거름이 되었다.
이런 조조의 리더십은 결국 인재경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웃기도 잘 웃고, 울기도 잘 울었으며 자신의 약점을 내보이는 것도 망설이지 않으며 인재라고 생각한 사람들을 포섭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의 인문학적 소양과 인간적인 면모를 통한 인재 퍼섭 능력 이 두가지가 조조를 삼국의 으뜸으로 만드는 결정적 요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