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함은 또 다른 꾸준함을 불러온다.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걷기를 언제부터 했는가를 돌아보니 작년 1월 말쯤부터였다. 당시 인턴으로 근무하던 회사를 퇴사하고 나서 거의 3주를 집에서만 뒹굴다가 걷기를 시작하며 밖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이제 아침에 일어나 갈 곳이 없어지고, 취업준비를 시작해야 하니 하루를 어떻게 꾸며야 할지 막막했다. 해가 중천에 떠서야 눈을 떠서, 하루 종일 넷플릭스 정주행을 하는 몇 주간의 일상이 꿀 같은 휴식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나, 하는 생각에 점차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몰려왔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건강이 걱정되었다. 안 움직이고 먹기만 하는 것은 안 그래도 예민한 나의 소화기관에게 미안한 짓이었다. 그래서 드디어 운동이라도 하며 움직여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헬스장에 간다거나 필라테스를 한다거나 하는 것은 내가 꾸준히 할 수 있을 거란 자신이 없었다. 요가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며칠 따라 해 봤지만, 이것도 며칠을 해보니 내가 잘하고 있는 게 맞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고 오히려 어지러운 느낌이 들어 오래 하지 못했다. 그런데 걷는 건 자신이 있었다. 걷는 것 자체를 좋아하기도 하고, 평소 내 걷는 속도가 빠른 편이어서 꾸준한 운동으로 삼기에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새해가 시작된 지 2주가 조금 지난 후, 처음으로 집 밖을 나갔다.
먼저 어디를 걸어야 할지를 살펴보는데 깜짝 놀랐다. 집에서 조금만 걸으면 산책할 수 있는 천이 나온다니. 이걸 이 동네에 산지 6개월 뒤에야 깨닫게 된 것이다. 1년을 넘게 걷게 된 지금은 이 동네에 있는 작은 산을 걷기도 하고, 천이 연결되는 한강까지 걷기도 한다. 가끔은 30분 정도면 도착하는 공원에도 간다. 이전에는 다 지하철을 타고 가던 곳들이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는 걸 1년 동안 이곳저곳을 걸어보며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걷기를 시작한 이후로 동네를 알게 되었다. 걷기에 의한 변화라고 말하기엔 조금 웃기지만 걷기를 하면서 생긴 첫 변화는 내가 사는 곳이 어디인지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손바닥 안에 내가 사는 동네가 그려지면 무엇보다 좋은 건 어떤 시기에, 어떤 기분이 들 때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안다는 것이다. 1년 동안 사계절을 모두 걸어보니 봄에 꽃이 피면 어디를 가야 하고 어느 시기, 어느 시간에 어떤 곳의 경치가 좋고 이런 것들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그러니 기분이 우울할 땐 이 시간에 이곳을 걸어야겠다, 몸이 찌뿌둥할 땐 이곳을 올라야겠다, 봄꽃 사진 찍고 싶을 땐 여기를 가야겠다 등 나의 몸과 마음의 수요에 따라 해결책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굳이 멀리 차를 타고 갈 필요 없이 가까운 곳을 걸으며 나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은 것이다.
이는 곧 두 번째 변화와 연결되는데, 그건 바로 불안이 어느 정도 진정된다는 것이다. 평소 예민한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머리에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찰 때가 많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한 것이 나에게 답을 내려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일단 걷기로' 하고 밖을 나와 걷게 되었다. 걸으면서도 머릿속은 계속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된다. 오로지 걷기와 생각에 집중을 하게 되니, 나의 솔직한 마음을 스스로 깨닫게 되고 정확히 내가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와 대화를 하며 인식하게 된다. 고민에 대한 정확한 답을 알게 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내가 무엇 때문에 이리 불안한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진정된다. 게다가 날이 좋을 때 펼쳐지는 멋진 풍경에 사로잡히다 보면 기분 좋은 느낌이 어느새 마음속에 들어와 있다.
걷기는 휴대 가능한 평온함이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중-
얼마 전 책에서 이런 말을 보고 정말 찰떡같은 비유라고 생각했다. 평온함을 휴대할 수 있다니, 얼마나 좋은가. 나의 평온함을 꺼내고 싶으면 그냥 한 발짝 걸음을 떼면 된다.
세 번째 변화는 균형이 생긴 것이다. 집순이인 나는 하루 종일 가만히 거의 움직임 없이 집 안에서 보낼 수 있다. 집에만 있는 것도 심심하지는 않지만, 그런 날엔 몸에 기운이 빠져 뭔가 생산적인 활동을 할 힘이 나지 않거나 몸이 찌뿌둥하고 무거운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걷기를 30분만이라도 하고 오면 몸에 어느 정도 기운이 생겨 조금 더 할 일에 집중을 할 수 있게 된다. (아, 그런데 배고픈 상태에서 너무 많이 걸으면 오히려 기운이 빠지는 것 같다. 무엇이든 적당할 필요가 있다.) 걷기는 내 신체의 균형을 맞추는 것에도 도움을 주었지만, 덜 무기력한 하루를 보내게 해 주었다. 오늘 무엇을 할지 딱히 정해져 있지 않더라도 '일단 걷기'라는 것이 루틴으로 자리 잡으니, 걷고 돌아오면 무언가를 했다는 작은 성취감을 느끼게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보다 걷고 온 날에 확실히 하루를 알차게 보냈다는 느낌이 있다. 이런 작은 성취감은 다른 작은 성취도 이룰 수 있게 하는 동기 부여가 되어왔다.
또 다른 소소한 변화는 더 맛있게 먹게 된다는 것이다. 단 것 덕후인 사람으로 살면서 달콤한 음식을 먹으면 살이 찐다는 것은 스트레스가 된다. 그런데 걷고 나서 먹는 것은 나에게 좀 위안이 된다. 실제로 1년 동안 특별히 다이어트를 한 것은 아니지만 먹고 싶은 것을 크게 참지 않고서도 살이 찌지 않았다. 살을 빼는 게 걷기의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걷고 나서 맛있게 밥 먹고 디저트도 먹으며 지냈는데 살이 찌지 않은 것은 나에게는 만족스러운 결과다. 걷고 온 날에는 더 마음 편히 맛있는 디저트를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무엇보다 꾸준히 1년을 넘게 걷는 루틴을 실천해온 것이 나에게 다른 루틴도 만들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꾸준히 하는 것에는 자신감이 생겼다. 걷기 말고도 최근에 실천하고 있거나, 도전하고 있는 꾸준함에 대해 꾸준히 기록해보려고 한다. 미래 언젠가에 다시 N 년을 꾸준히 OO을 실천하고 생긴 변화를 돌아보며 또 다른 도전을 실현하고 누군가에게는 영감이 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