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서툴러도 괜찮은 이유
"이 수업은 적어도 B1 이상의 실력을 가져야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스페인의 한 대학에서 스페인어 구문 강좌의 교수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유학생활을 시작하자마자 난관에 봉착했다. 그 당시 스페인어 실력을 테스트하는 DELE라는 시험에서 어느 정도 언어를 좀 한다고 할 수 있는 B1 레벨을 통과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냉철하게 말해 수업을 들을 실력이 없었다. 하지만 진퇴양난이었다. 한국에 돌아가 본교에서 학점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 학교에서 수업 이수를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교수의 걱정 어린 표정을 뒤로하고 수강을 신청했다.
한 학기 뒤, 수강생 대부분이 원어민이었던 72명의 학생들 사이에서 4등이라는 성적을 받았다. 실력 미달이었음에도 대범히 신청한 수업에서 커트라인 통과 수준을 넘어, 원어민들 틈에서 스페인어 구문 수업에서 4등을 한 건 스스로에게 대견함을 충분히 느껴도 좋을 성취였다.
그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 교수님의 말은 어찌나 빠른지, 수업 내용을 반만 이해해도 성공이었다. 모든 수업을 녹음해서 집에 가서 여러 번 돌려 들으며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현지 학생들보다 몇 배는 더 공부에 시간을 쏟지 않았을까 한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되고 싶었던 카피라이터가 된 지 한 달을 넘겼을 무렵에 또 다른 시련을 마주했다.
"이건 최악의 카피야."
팀의 리더가 겨우 한 달 된 카피라이터에게 준 피드백은 가혹했으나, 현실이었다. 당시에 느꼈던 감정은 상처라기보다는 당황스러움이었던 것 같다. 스스로 글쓰기를 좋아하고, 글을 좀 쓰는 편이라 생각하며 살아왔기에 충격적인 피드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죽지 않고 내 할 일을 해나갈 수 있었던 건, 이전에 경험했던 작은 성취들이 나에게 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다. 말도 잘 안 통하는 먼 나라에서도 노력하면 된다는 걸 경험했으니, 여기서도 충분히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타인을 평가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 잠재력을 가장 잘 알아볼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이다. 스스로를 믿는 것이 무언가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무기다.
게다가 원래 잘하다가 나중에 좀 삐끗해서 실망감을 주는 것보다는 지금 못하지만 점차 잘해서 놀라움을 주는 편이 더 낫다. 누군가의 성장 스토리를 읽을 때 첫 시작이 서툰 사람의 이야기가 더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게 느껴지지 않나. 이제 더 내려갈 곳이 없으니 올라갈 곳만 있다는 건 나름 희망적이다. 이런 생각을 안고 시련을 털어냈다.
3년 뒤, 퇴사를 이야기했을 때 리더는 '우리 팀 최고의 카피라이터가 떠난다니 아쉽다'는 피드백을 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동안의 여정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며 처음의 내가 좌절하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경험이 하나씩 쌓일수록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더해진다. 나는 시작은 서투르지만 마지막엔 결국 해내는 사람이라는 확신, 앞으로 무엇을 하게 될지는 몰라도 성장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