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다섯, 다시 드럼 스틱을 잡았다

딸에게 들려주는 첫 번째 리듬

by 시니어대백과

1. 멈춰버린 필인(Fill-in), 그리고 적막

인생에는 아무리 강하게 내리쳐도 소리가 나지 않는 구간이 있다. 내게는 지난 10여 년이 그랬다. 드럼 전공자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현실의 벽은 베이스 드럼의 페달보다 무거웠다. 집안 형편이 기울고 생존이 예술보다 시급해졌을 때, 나는 가장 먼저 나의 분신 같던 드럼 세트를 팔았다.

드러머에게 소리가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악기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해 내뱉던 나의 박자가 거세당하는 일이었다. 마흔 중반에 접어든 나의 손에는 굳은살 대신 마트 영수증과 운전대 감각만이 남았다. 음악은 TV 속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나 보는 타인의 전유물이 되었고, 나는 그저 박자 없는 삶을 묵묵히 견뎌내는 이름 없는 중년의 사내가 되어 있었다. 내 인생의 화려한 연주는 그렇게 영원히 '쉼표'에서 멈춘 줄 알았다.


2. 12월 19일,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비트

작년 12월 19일, 차가운 겨울바람을 뚫고 한 아이가 내게 왔다. 마흔다섯, 남들은 이제 아이의 대학 진학을 고민할 나이에 나는 산부인과 복도에서 갓 태어난 딸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기이한 경험을 했다. 병원 복도의 기계적인 소음들이 사라지고, 오직 아이의 불규칙한 울음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다.

그것은 내가 평생 공부했던 그 어떤 복잡한 '폴리리듬'보다 정교했다. 으앙, 하고 터져 나오는 아이의 첫 울음은 멈춰있던 내 인생의 메트로놈을 다시 작동시키는 스위치였다. 아이를 처음 가슴에 올렸을 때 느껴진 미세한 심장 박동. 콩, 콩, 콩. 아주 작지만 단단한 그 리듬은 내 안의 죽어있던 음악적 감각을 깨웠다. "아, 나도 이 박자에 맞춰 다시 연주하고 싶다." 아빠라는 이름의 새로운 악보가 내 앞에 펼쳐진 순간이었다.


3. 스틱을 다시 잡는다는 것의 무게

아이의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타는 일상은 드럼 세팅만큼이나 섬세한 작업이었다. 새벽 3시, 아이의 칭얼거림에 깨어 아이를 어르는 내 모습은 흡사 무대 뒤에서 스틱 그립을 점검하던 20대의 내 모습과 겹쳐졌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마음가짐이 다르다. 예전에는 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스틱을 휘둘렀다면, 이제는 이 아이의 평온한 잠을 위해 인생의 다이내믹을 조절해야 한다.

나는 베란다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연습 패드를 다시 꺼냈다. 손가락 근육은 굳었고, 예전처럼 빠른 '파라디들'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패드를 때리는 스틱의 촉감은 눈물이 날 만큼 반가웠다. 이 스틱은 이제 나만의 영광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훗날 내 딸이 자라 세상을 마주할 때, 아빠는 현실에 무릎 꿇지 않고 다시 일어선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증거'다. 마흔다섯의 드러머는 화려한 솔로 연주보다, 아이의 삶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리듬 섹션'이 되기로 결심했다.


4. 딸에게 들려줄 첫 번째 리듬

내가 딸아이에게 처음으로 들려주고 싶은 리듬은 '포기하지 않는 박자'다. 삶은 때로 예상치 못한 구간에서 박자를 놓치게 만든다. 나처럼 꿈을 접어야 할 때도 있고, 원치 않는 긴 휴지기를 가져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드러머는 안다. 한 마디를 통째로 쉬더라도, 다음 마디의 첫 박을 정확히 쳐낸다면 연주는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을.

지유야, 아빠는 이제 너를 위해 다시 스틱을 잡았다. 아빠의 손등에는 세월의 검버섯이 내려앉았고 어깨는 예전보다 무겁지만, 너의 웃음소리가 내게는 가장 완벽한 '클릭(Click)' 사운드란다. 너의 성장이 내는 박자에 맞춰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그루브를 만들어낼 거야. 아빠가 다시 잡은 스틱은 이제 멈추지 않을 거란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이 교향곡은 이제 막 도입부를 지나고 있으니까.


5. 에필로그 : 브런치의 독자들에게

브런치스토리라는 무대에 오르려는 이유도 이와 같다. 40대에 아빠가 된 한 예술가의 뒤늦은 성장기를 기록하고 싶다. 꿈을 잃어버린 수많은 동년배들에게, 그리고 언젠가 아빠의 글을 읽게 될 나의 딸에게 말하고 싶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리듬은 완벽한 순간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박자를 다시 추스르고 일어서는 그 찰나에 탄생한다는 것을.

나의 연주는 이제 시작이다. 마흔다섯, 늦깎이 아빠의 손에 들린 스틱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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