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적이지 않은 식욕

넉넉한 마음은 두둑해진 배로부터

by 행복 한스푼

왜 이렇게 바쁘지? 아이들은 개학했고, 그만큼 시간이 생겨야 정상인데. 도통, 마음이 쫓기듯 해야 할 일을 처리해 내지 못한다. 열려라! 참깨 주문을 외우는 건 아닌데, 가득한 빨래 더미를 해치우고 국을 끓이고, 정리하고 나면 아이들 하교. 학기 초라 챙겨야 할 준비물을 확인하고, 동의서에 쉼 없는 싸인. 이것이 책 싸인이라면 신나게 하겠지만 똑같은 것을 첫째 한번, 둘째 한번, 학교 종이 앱(학교에서 필요한 사항을 알려주는 앱)에서도 쌓여있는 알림들. 그러면서 아이들이 잘 적응할지, 친구들 관계는 괜찮을지, 선생님과는 잘 맞을지 걱정하는 마음도 자리한다.


아이들만큼 분주해진 일정, 글쓰기 줌 강좌로 읽어내야 할 텍스트는 한 옴큼. 마르케스의 중단편들, 성해나의 혼모노, 베테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 동인의 합평글까지. 며칠간 한글 파일을 붙들며 숙제를 해나간다. 글을 인용하여 내 생각과 감상을 정리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일인가? 몇 번을 수정하지만 자연스럽지 않다. 번외의 질문들도 적으며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장 시켜 나간다.


남편은 싱가포르 여행에 대해 알아보라고 눈치, 아이들은 함께 놀지 못한다고 야단. 열심히 읽으며 글을 써보겠다던 고상한 의지는 어느 순간 초점이 흐려지듯 힘을 잃었다. 그러면서 책은 읽고 싶어 반납 권수보다 더 많은 책을 대출해 온다. 집에 첫 페이지도 안 넘긴 책들도 여러 권, 왜 그런 것에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지.


마음이 허할 땐, 배라도 든든히 채워야 해나갈 힘을 얻는다. 쫄깃하면서 맛이 보장된 라면을 손에 쥔다. 요즘 건면의 맛에 마음을 빼앗겼달까? 나름 갈등한다. 저녁 9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옳은 행동일까?’라며 주춤하지만, 아이들에게 “배고프지? 라면 먹고 싶지?”라며 정해진 답을 구한다. 아이들은 대찬성, 먹어야 하는 이유를 나의 의지가 아님을 못 박는다. 양심상 1봉지로 3명이 나누어 먹는다는 조건으로 신나게 라면 물을 올린다.


면발을 최대한 끌어 올리며, 김치 한 조각과 함께 입속으로 홀라당. 아 뜨거워! 욕심이 부른 대참사에 입천장은 화상이라도 당한 듯 아려온다. 다시 면발을 후후후 후후후 재빠르게 불며 후루룩. 지긋이 눈감으며 나를 힘들게 하는 모든 것들이 용서된다. 꼬들꼬들한 이 맛, 국물도 한 모금, 캬~ 세상의 어떤 말로도 설명 불가한 대기업의 맛. 담백하면서도 내 모든 미각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맛.


안돼! 감상에 충만할 때가 아니다. 라면은 딱 한 봉지, 어서 남은 면발을 사수해야 한다. 흑심 품은 젓가락은 거침없다. 여러 면발을 집어 올리며 신속히 밥그릇으로 이동. 숟가락도 짭조름한 국물을 받쳐 올리느라 바쁘다.

야간 근무인 남편에게서 전화가 온다. 뭐 하고 있느냐는 말에 입 모양으로 라면이라고 뻥긋하고 손가락으로 엑스를 수신호로 보낸다. 큰 아이는 “엄마가.. 라....면 다 먹었어.”라고 비밀을 발설한다. 몇 젓가락 못 먹었다며 원망을 늘어놓는다. 같이 먹고 있다고도 아닌, 다 먹었다니 참나! 양심상 변명거리를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문다. 역시 남편으로부터 잔소리가 오간다.


끊고 나니, 한 소리 들었겠다 찬밥까지 국물에 투하한다. 밥까지 먹을 생각은 없었는데. 계획적이지 못한 식욕이다. 기분 나빠지게 한 남편 탓이라고 변명의 화살을 돌린다. 사악한 국물과 찬밥의 조화, 그 어떤 환상적인 콤비와의 대결에도 뒤지지 않는다. 찬밥으로 적당히 식혀진 국물은 바로 입속으로 들어가기 딱 좋다.

먹고 나니, 남편이 뭐라고 했든 기분이 풀린다. 넉넉한 마음은 두둑해진 배로부터 나온다는 명언을 남긴다. 되돌아오는 건 뱃살이겠지만.


여전히 아이들은 배고프다고 난리, 블루베리와 방울토마토, 천혜향을 먹기 좋게 접시에 대령한다. 입가심은 과일이라며 먹는 일손을 보탠다. 이게 또 무슨 개수작. 라면의 강렬했던 맛이 과일의 새콤달콤한 맛으로 중화되는 중이라고, 인스턴트를 먹었다는 죄책감은 스르륵 사라진다.

그래, 누군가 맛있게 먹었다면 0칼로리라고 말했었지. 난 항상 맛있게 먹었는데 말문이 막혀온다.


#바쁜일상에중심잡기

#위로가되는라면한봉지

#입으로뻥긋하며손으로수신호를보냈지

#딱걸린야식

#엄마가다먹어버렸다고천기누설한딸

#넉넉한마음은두둑한배로부터

#과일은입가심이라고또먹고있었지

#다이어트말고먹는일지

#인스턴트는과일로중화중

#난항상맛있게먹었는데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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