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는 ‘빅’의 초대

스마트한 여행, 싱가포르

by 행복 한스푼

무수한 정보가 공기처럼 떠다니는 세상. 맛있고 특별한 산소를 찾아 나서려는 듯, 선택의 폭은 다양해졌다. 그 중심에 선 나는, 고르는 재미를 느끼기보다 결정 장애로 과호흡 상태가 되곤 했다. 분명 싱가포르는 서울보다 조금 큰 도시 국가라 들었건만, 어디를 들르고 무엇을 맛보며 어떤 기념품을 사 올지. 미완의 문장 앞에 발이 묶인 사람처럼 멈추어 섰다. 2달 반의 준비기간이 녹록지 않았다는 구구절절한 말씀.

문명을 탓하면서도 발전된 문명의 편리함을 누리긴 했다. 낯선 곳을 편리하게 대중교통을 확인하는 앱과 항공 앱, 그랩(택시) 앱을 깔아 이동 수단에 준비했다. 여행지의 입장권과 전자 입국신고서, 항공권의 온라인 체크인, 스마트 패스, 짐을 맡기는 셀프 백드랍까지. 클릭 몇 번으로 기다림을 줄이려 나이스하게 준비 완료.

영어를 사용해 보겠다고 선택한 싱가포르, 입국 심사에 잘못 말했다간 입국 거부가 될 수 있단 말에 문장들을 달달 외웠다. 입국 심사는 3초 컷, 여권을 찍고 얼굴을 스캔하고 나오면 끝. 졸지에 입꾹(입을 다무는) 심사가 되었다. 간편해서 좋긴 한데, 지난날이 허무해지는 건 또 무엇? 그렇다고 사람들의 영어도 들리지 않는다. 원하는 말은 더더욱 나오지 않는다. 눈을 똥그랗게 뜨자 상대가 한국어를 하는 신비스러움을 경험한다. 때론 대화를 포기하고 스마트폰 번역기의 힘을 빌린다. 아이들 앞에서 영어를 샬롸샬롸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던 의지는 작아지고 작아져 주눅 든 난쟁이가 되어있었다.


타지였지만, 큰 볼일을 보러 가는 것을 “똥 싸러 가”라고 말하기 민망했던 우리, 그 단어를 “빅(큰 볼일)”이라고 암호처럼 불렀다. 빅도 ‘살짝 빅’인지, ‘베리 빅’인지, ‘베리베리 빅빅’인지에 따라 기다림을 짧게 할 것인지, 길게 끝낼지, 강약을 전달했다.

이 빅은 심심찮게 문제를 일으켰다. 클락키에서 송파 바쿠테(갈비탕 같은 음식)를 과식한 둘째, 힘겹게 ‘빅’을 해결하고 리버크루즈를 탑승했다. 갑자기 ‘베리베리 빅빅’의 신호가 강하게 감지된 것. 강 한가운데 남은 시간은 35분 정도, 일몰이 되어가며 아름다운 불빛을 멋들어지게 발산하고 있지만, 눈앞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귀가엔 여기저기의 감탄 소리와 아이의 신음이 섞여 들린다. 당장 되돌아가야 한다고 외쳐야 할지 망설이며, 아이를 붙들고 ‘베리베리 빅빅’의 신호가 ‘살짝 빅’으로 바뀌길 모든 신께 싹싹 빌었다. 질투의 하나님께서 화가 나신 걸까? ‘베리베리 빅빅’은 더 강력한 ‘베리베리베리 빅빅빅’을 넘어서고 있었다.

아이의 소리는 더 커졌고, 울고 싶은 건 매한가지. 아이의 손과 배를 주무르며 바들바들 떨고 있는 아이에게 옷과 몸을 감싸며 기도를 이어갈 뿐이었다. 남편도 사진 찍는 것을 멈췄고, 첫째도 조금만 참아보자며 주문을 외웠다. 모두의 간절함에 둘째의 ‘빅’은 화장실에서 무사히 분출되었다. 돌아가는 이층 버스를 타서야 수다쟁이로 돌아왔다.

대중교통 앱은 도보 이동도 지원되어 가는 길을 인도했지만, 배터리를 빨리 소모시켰다.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강박도 한 몫. 가든스 베이의 체험관을 입장할 때 미리 구입해 온 입장권을 보여 주는데, 입장 불가를 통보받았다. “only QR” 속 예매 번호만 존재. 다시 메일과 카톡을 확인했지만, QR은 어디에서도 없었다. 예매 취소 후 다시 재결재했으나 여전히 어디에도 없는 QR, 매표소에 들어가 도움을 요청하니 떡하니 메일 속 PDF 파일로 존재했다. 결국 부주의로 2배의 값을 지불하며 구경했지만, 배터리로 사진도 몇장 찍지 못했다.

이젠, 입장권을 거듭 확인하는 수준. 그럼에도 윙스오브 타임 공연에서 프리미엄 좌석에서 일반 좌석으로 강등되었다. 철저한 준비 가운데서 꼬여가는 일정, 오히려 아이들은 괜찮다고 말한다. 저기 자리(좋은 자리)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며 위로하면서.

기분 때문에 지금을 놓쳐서는 안 된다. 현재에 집중해야 했다. 마음을 덜어내며 지금 즐기지 못하면 내 손해라는 생각마저 든다. 억눌러져 있던, 완벽히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는 강박 속 나와 마주했다. 화려한 조명과 폭죽 속,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감정. 이제야 다채로움이 보였고, 아름다움이 보였다. 완벽하지 않아도 되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 여행이다. 시간을 알뜰하게 보내야 한다는 압박도 덜어내고자 다짐하고 나니 좀 더 자유로워진다.


30도가 넘는 날씨에 기름진 음식들을 먹으니 자꾸 ‘빅’이 신호를 걸어온다. 장에 그렇게 예민한 사람이 아니였던 내가, 여행 3일차가 지나자 장트러블타가 되었다. 화장실을 곳곳에서 찾았으나 예민함에 질끔 분출해 낸다. ‘빅’ 세계의 초대는 거침없이 전개된다. 갑자기 지하철 에어컨 바람에 ‘베리베리베리 빅빅빅’으로 상향된다. 가디건을 입어보지만, 변한 얼굴색을 보고 양보해 줄 정도. 앉아 배를 움켜쥐지만 울퉁불퉁하게 느껴지는 자리에 ‘빅’은 나오기 일보 직전, 낯선 자의 양보가 원망스러워지려 한다. 그렇다고 섣불리 일어설 수 없다. 공공장소에서 지릴지 모른다는 공포로 심호흡을 절도있게 이어가려 애쓴다.


환승역, 화장실 표지판만을 보며 둘러갔건만 중요한 화장실이 없다. 이런 개똥 같은 상황에 눈물이 질끔 난다. 모두가 하나되어 조금만 참자, 괜찮아질거라는 긍정의 말도 들릴리 없다. 내 눈과 귀는 다음 역과 도착지를 향한다. 도착하자 다리가 풀려와 화장실이 어디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슬아슬하게 화장실에 입장하여 ‘빅’과 조우한다. 그를 보며 억지로 먹는다고 하고선 흡족한 미소를 발사했던 날을 후회했다. 내가 먹고 싶은 건 아니라 하고서는 기여코 숟가락 위 들려 있었던 음식들이 지나갔다. 차갑고 달달한 아이스크림과 쉐이크에 내 영혼을 빼앗긴 그때로 돌아가, 셀프 혼냄을 이어갔다.


새로움이 주는 낯섦, 순조롭게 진행된 순간보다 ‘왜 이래?’하는 순간이 더 기억 남는다. 들뜸보다는 두려운 감정이 앞서 싸우기도 했고, 걱정으로 산을 만들기도 했다. 지나고 나니 ‘뭐가 그렇게 다툴 일이고 걱정할 일이라고?’. 닥치면 다 하는 것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 것을 말이다.

피부에 오돌토돌 뾰로지가 훈장처럼 남았지만, 더위를 견뎠고, 관광지 동선이 얽혀 발바닥이 지끈거리도록 걸어 다녔지만 아이들은 참아주었다. 여행지에선 관대해졌다. 2배 비싼 구경을 했더라도 다음을 위한 시행착오 값이라 여긴 일. 프리미엄에서 일반석 대우를 받은 것은 업체와 소통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라 여긴 일. ‘빅’이 응급처럼 찾아왔을 땐 모든 힘을 모아 참아내다 분출의 소중함을 경험하게 된 일이라고 웃게 되었다. 다만, 여행지에선 찬 음식과 기름진 음식에 대해 식탐을 줄이자고 뒤늦은 후회를 해본다.


스마트한 준비력에도 빈틈이 존재했고, 그 빈틈을 이해하는 시간이었다. 여행을 싫어했던 내가, 여행지에서 다음 여행을 생각했다. 나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요란스러움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나는 또 다른 모습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여행을 통해 또 다른 나를 발견해 간다.


#싱가포르여행

#여행의묘미는실수와빈틈에서

#완벽하지않아도된다고위로를건냈지

#여행의의미는고생이라생각했는데또다른나를만나는시간

#빅큰볼일의외침

#살짝빅에서베리베리베리빅빅빅으로급진적전개

#낯선자의양보가원망스러워져만갔지

#괜찮아그럴수있다고다독일줄아는경험

#내발바닥은고통속에살았다네

#찬음식기름진음식이불러온빅사건

#우리들의수신호'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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