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아래 분노를 품었네

둥굴레차의 답례는 김밥으로

by 행복 한스푼

햇살이 몽글몽글 포근해지는 날씨로 변했지만, 밤공기는 아직 으슬으슬 춥다. 도톰한 옷 사이로 찬 기운이 비집고 들어오자 옷을 단단히 여민다. 아이의 줄넘기 연습을 지켜보러 나왔다가 문뜩 달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달리고 나면 ‘답답한 마음이 풀어질까? 잠시 달려볼까?’ 스마트워치를 켜고 놀이터 주변을 맴돌았다. 눈으로는 아이들을 살피고 패딩 차림으로 마스크도 낀 채. 얼마나 뛸 수 있을까 싶었지만, 달려서 앞으로 나간다는 사실 자체가 좋았다. 두세 바퀴 돌며 마스크를 벗었고, 한 바퀴 더 돌자 패딩을 벗어 의자에 놓고 달렸다.

요즘, 밀림의 압박을 견뎌 내는 게 버거웠다. 욕심만 내고선 중도에 이탈하거나 포기해 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 일 처리 속도의 느려터짐도 원망과 자책으로 나타났다. 시간에 쫓긴다는 생각에 집안일을 하다가 울컥했고, 별것 아닌 일에도 화를 내며 얼굴을 붉혔다. 특히 사춘기인 첫째와 자꾸 부딪혔다. 사춘기의 호르몬에 정복된 사람은 나인지 아이인지. 얼룩진 색안경으로 끼고 있는 건 너인지 나인지. 못된 말을 내뱉으면서도 아이는 존중의 태도를 바라는 이중적인 감정이 뒤얽혔다.


<네가지 질문>이라는 책에선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일에 관한 우리의 생각에서 비롯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고통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라고. 우리의 내면 깊은 곳을 솔직하게 바라보며 생각을 뒤집어 진실을 바라보자고 했다. 책을 읽고 있을 때는, 내 감정을 인정하고 생각을 내려놓자고, 스트레스를 아무리 주더라도 안 받으면 되는 거라며 끄덕였다.


집중해서 글을 쓰고 읽고 싶는데 자꾸 첫째는 문제집을 들고 온다. 용돈과 핸드폰 시간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아이도 마음이 바쁘다. 이 과목 저 과목 찔끔씩. 이곳저곳 틀려서 빗금이 쳐지자 슬슬 열이 오르기 시작한다.

“다시, 천천히 풀고 와.”

첫째는 재빠르게 풀고 다시 틀린다. 아무거나 찍어대는 것 같아서 ‘이게 공부하는 걸까? 내 시간을 빼앗는 걸까?’ 의심스럽다. 답지 이쪽저쪽을 넘겨 가며 채점하고 기다리는 것에 지친다. 문제집은 몇 번이고 주고 받는다. 다음엔 한 단원 전체를 집중해서 풀자고 단호하게 말한다.

첫째는 “전체를 안 풀면 안 돼? 내가 풀고 싶은 부분만 풀래.” 달달 볶는 상황을 연출한다. 한마디로 쉬운 부분만을 풀고 싶다는 이야기다. 스스로 공부한다는 것이 마냥 기특하고 즐거운 일이 아닌게 된다. 핸드폰 시간을 놓고 실랑이하고 게임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태도까지 못마땅함은 점점 몸집을 불려와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입을 다물고 참아보려 애쓰지만, 힘이 든다. 거기에 아이는 나의 기분 따윈 상관없이 핸드폰 시간만을 요구한다. 열이 오르고 남편에게 뛰고 오겠다고 말하고선 밖으로 무작정 나왔다. 한편으론 아이의 말을 무시하고 싶었다.

달릴 것을 생각해서 옷을 가볍게 입고 나왔더니 공기가 더 차다. 내 마음처럼 싸늘한 공기, 어른이 되면 마음도 어른스러워질 줄 알았던 나는, 화를 참지 못하는 어른이 되어버린 걸까? 화를 내고선, 분노의 불꽃을 활활 태우며 미워하는 감정과 마주한다. 그 불꽃은 나를 태워버리고 있는 걸까? 상대의 마음을 태워버리고 있는 걸까? 달리며 자꾸 물음이 던져진다. 속도를 올려 나에게 힘듦을 벌로 주려는 듯 달려 나갔다. 달밤은 예쁜데. 나만 이 예쁨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 같다. ‘무엇에 이렇게 화났을까?’

걱정스러워하는 남편의 전화를 받고선 30분 정도의 달리기를 마무리했다. 씻고 나와 감정이 덜어졌다고 생각했는데, 핸드폰 사용 시간을 끝까지 요구하는 소리에 다시 화딱지가 난다. 젠장. 달리며 나를 돌아보고 반성했다는 생각은 착각, 헛된 일처럼 물거품이 되었다. “넌 상대방의 감정은 안 보여? 시간 넣었으니, 됐어? 이제 나한테 말도 하지 말고, 너 알아서 살아.” 모든 화를 쏟아내며 울부짖는다.


아침을 차려놓고선 둘째를 깨웠고, 언니를 깨워 밥 먹고 가라며 방으로 들어갔다. 첫째는 메모로 5시까지 놀다 들어오겠다고 휘갈겨 써놓으며 식탁에 올려놓았다. 하필 그 종이는 둘째 영어 자료. 눈살이 또 찌푸려진다.

4시가 넘어 첫째는 귀가했고, 아무 말 없이 글을 쓰고 있는 나를 지나쳤다. 아무리 싸웠더라도 인사도 안 하고 투명인간 취급이라니. 컵라면을 먹기 위해 물을 올리는 첫째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곱지 않은 시선이 머무른다. 첫째가 몸을 돌리자 얼른 모니터로 눈을 돌린다. 아이는 따뜻한 물에 둥글레차를 담가 슬쩍 나에게 건넸다. 예상치 못한 행동이라 당황했지만, 기분이 살짝 풀린다. 아이도 화해하고 싶다는 걸, 용기 내 전달해준 것이란 걸 알기에. 살짝 망설이다 쭈뼛하며 학교에서 어떻게 보냈는지 물어보며 일상의 대화를 이어갔다.

김밥을 말기 위해 준비했다. 마트에서 함께 장을 볼 때, 첫째는 “김밥 먹고 싶다. 그런데, 엄마 바빠서 안 되지?” 미안함에 김밥 세트를 사놓고선 미루고 있었다. 화해의 손길을 담아, 재료를 손질하자 첫째도 돕겠다며 나섰다. 부엌에서 들리는 대화 소리에 둘째는 방에서 빼꼼히 나온다.

“언니랑 엄마, 그럼 화해한 거야?”

첫째와 나는 눈을 맞추며, 우물쭈물한다. 그렇게 불편함을 지나가고 있다. 아이들은 엄마가 싸준 김밥이 제일 맛있다며 칭찬을 하고, 나도 그런 아이들을 고맙게 바라본다. 모양은 예쁘지 않더라도 어떤 때보다 김밥이 더 맛나다.


이젠 덜 싸우냐고? 아니다. 네버, 완전 네버. 첫째와 나는 전생에 원수였나 싶을 정도로, 코를 씩씩 불며 언성을 높인다. 이 아이를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냐며 절규하다가도 “엄마, 급식에서 갈비가 나왔는데. 맛있었어. 엄마 생각났어.”라는 말에 감정의 골이 메워진다.

딸아, 너를 미워하다가도 다시 예뻐하는 엄마란다. 엄마한테 그만 좀 덤비고, 화목하게 지내면 아니 될까?


#다이어트말고싸운이야기

#우린원수지간처럼싸워대지

#사춘기의호르몬에정복당한자는나인가아이인가

#우린싸워요매일매일

#반성하고달렸지만돌아와서화내버렸어

#차가운밤공기에분노를내뱉으며

#둥글레차의따뜻함에마음이녹아

#미루었던김밥을말며우린화해하고있었지

#우린왜이렇게싸울까요모르겠음

#딸님그만덤벼

#따뜻한말한마디로때론마음이녹아

#사춘기와사십춘기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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