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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직장인 밤에는 대학원생

5학기, 아슬아슬한 완주

by 이십일

길고 길었던 대학원 생활이 끝나가는 지점에 도착했다.

아니 거의 끝났다. 아니 진짜 끝이 난 것 같다. 아직 잘 믿기진 않지만.

마지막 학기의 기말과제도 모두 제출했다. 회사에서 동료에게 진짜 끝났다를 몇 번 말했는지 모르겠다.


마약 검사 결과지를 보여주며 진짜 끝났다.

연구 윤리 준수 서약서를 보여 주며 진짜 끝났다.

기말과제 제출을 확인하며 진짜 끝났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약간 믿기지 않아서 스스로를 계속 의심해보고 있다.

제출을 누락한 건 없을까, 과제는 다 낸 게 맞을까, 뭐 해야 하는 게 더 있나 하곤 돌아보는 중이다.

솔직히 마지막 학기는 정말 개발새발 다녔기 때문에 놓친 게 없을까 걱정이 좀 더 들기도 했다.

정말 출석에 의의를 둔다는 생각으로 좀비처럼 퇴근하고 등교했다.


눈이 갑자기 엄청 오던 날은 정말 가기 싫었는데, 얼마 안 남았으니까 라는 생각으로 꾸역꾸역 갔다.

아무 생각 없이 아침에 신은 밑창이 매끈한 신발을 저주하면서 등교했다.


눈사람.jpeg 수업 끝나고 나오니 있던 사람만 한 눈사람


매 년 힘들었지만, 꼭 마지막이 제일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누군가 이유를 조사해서 논문을 써줬으면 좋겠다. 과학적인 근거가 정말 있을지도 몰라.


5학기는 졸업 과제에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하기에 대부분 수업을 앞학기에 몰아 듣는데,

난 다가올 미래가 당연히 핑크빛이라고 생각하고, 학기마다 적절히 나눠 들었다가 마지막 학기마저 학점을 꽉꽉 채워 들어야 했다. 심지어 수강신청 기간은 일하다가 깜빡해서 과목을 고를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편안하다고 소문난 과목의 교수님께 구질구질 문자도 보냈다.

돌아오는 것은 정중한 거절이었고, 결국 모두가 기피 대상이라 외치던 과목을 수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과목은 의외로 좋았다. 교수님의 순수한 열정이 너무 멋있었고, 지친 내 마음에 활력을 조금씩 넣어줬다. 읽어 오라고 하신 거 매번 읽지 않고 가서 합죽이처럼 앉아있었던 게 죄송스럽긴 하다. 배고프면 뭐라도 먹으면서 들어도 괜찮다고 말씀하신 건 철석같이 지켰으면서..


지나온 마지막 학기가 어땠나 다시 생각해 보면, 졸업을 못할까 노심초사하며 다녔던 기억밖에 없다.

교수님이 OK 해주시겠지? 안 해주시면 어떻게 수정을 할까. 아냐 해주시겠지, 근데 왜 답장이 없으시지..

이런 생각을 좀 하다가, 아오 몰라 머리 아파 죽겠네 하면서 컴퓨터를 끄곤 했다.


강의에서 나오는 과제는 그냥 주말마다 해치워버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아성찰과 관련된 과제를 할 때만 눈이 초롱초롱했다. 청소년기 성찰 보고서를 적어보는 건 재밌었다.

어른이 되어서 생각해 보는 나의 청소년기 행적.. 과오.. 등등..


한 가지 아쉬운 건 논문을 쓰지 못한 것이다. 지도 교수님과 내가 하고 싶은 주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구상하고 방법을 잡아가다가 보니 실제로 수업을 하고 학생에게 설문을 받거나 인터뷰를 해야 했었다.


도무지 엄두가 안 났다. 상반기에 교생실습으로 연차 10개를 털어버린 나에겐 5월부터 남은 연차는 단 3개뿐이었는데, 내용 준비, 수업 준비, 학생 섭외, 장소 준비 등등등을 제 때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냥 했으면 졸업을 미루면서라도 하긴 했을 것이다. 원래 걱정하는 것보단 그냥 하면 될 때가 많으니까.

고민 끝에 논문 보단 졸업이다라는 결론이 서서, 트랙을 전환해 연구 사례 보고서를 열심히 작성했다.


나에겐 졸업이라는 마침표부터 제 때 찍는 게 더 중요했다. 언젠가 기회가 되고, 마음을 제대로 먹으면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 나의 주장을 근거를 바탕으로 유려하게 적어 퍼블리싱하는 작업은 꽤 멋있으니까. 하다 보면 배우는 것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마흔이 되기 전에 한번..??


이렇게 얼렁뚱땅 졸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안 올 것만 같았던 시간이었는데 왔다!

졸업식을 가야 실감이 나려나? 다음 학기 수강신청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막상 다음 주부터 학교를 아예 안 가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몸은 너무 편한데 마음은 편하지 않은 이상한 상황에 처해있다. 기분도 후련하면서 섭섭하기도 하고 희한한 감정이다. 끝나면 너무 좋을 것 같았는데, 마냥 그렇진 않다. 오히려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나니 이제 진짜 뭐 해야 하지? 나 뭐 하고 싶지? 하는 고민이 든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는데 아직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발견을 못했다. 큰일.


그래도 뭐 내년에 하고 싶은걸 하나 둘 적어서 하다 보면 그게 내가 하고 싶은 거였겠지 뭐라고 생각한다.

시원 섭섭 불안한 감정을 떨쳐내기 위해 내년에 하고 싶은 것들을 착착 적어보기 시작했다.

브런치에 쓰는 이 주제의 글을 마무리하는 것도 하고 싶은 일 중 하나에 속했다.


친구한테 이제 회사만 가는 백수의 삶이 시작되었다고 말했는데, 단호히 그건 백수가 아니라며 저녁을 즐기는 법을 다시 깨우치라는 말도 들었다.


맞는 말이긴 해.


다음 글을 마지막으로 밤에는 대학원생 타이틀을 내려놓을 것이다. 히히

(솔직히 낮에는 직장인도 내려놓고 싶긴 하다.)


일단 오랜만에 온 아무것도 할 게 없는 주말을 만끽하는 방법부터 다시 공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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