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신과 악의에 대하여

인간만이, 인간에게

by 피곤한직장인

광신과 악의에 대하여

- 인간만이, 인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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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대한민국 헌정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어쩌면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이토록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건 처음일지도 모른다.


그 사건의 주동자는 "대한민국 내 종북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겠다"는 논리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지만, 그 시도는 다행히 무마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종북세력을 향한 분노로 들끓고 있다고 한다.


이 글은 그 정치적 사건 자체를 논하고자 함이 아니다.


사태가 정리된 후,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인간의 끝을 알 수 없는 광신과 악의, 그리고 그것들의 무서움이었다.


광신과 악의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광신 : 신앙이나 사상 따위에 대하여 이성을 잃고 무비판적으로 믿음.

악의 : 나쁜 마음, 좋지 않은 뜻.


이 정의는 명료하고 정확하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두 가지 내용을 덧붙이고 싶다.



첫째, 광신과 악의는 자연계에서 오직 인간만이 가지는 특성이다.


현존하는 생태계에서 다른 동물들은 생존을 위한 본능적 행동은 할지언정, 이성을 잃은 신념이나 나쁜 의도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광신과 악의에 빠진 인간은 자신이 믿는 신념과 품은 감정을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행동을 자행한다.


자신을 인신공양하거나, 전쟁을 일으키거나,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면 자신의 생명조차 내던지는 비이성적이고 잔혹한 행위들 말이다.


살육을 즐기기 위해 사냥하는 사자는 없고, 파리에 대한 증오로 거미줄을 뿜는 거미는 없다.



둘째, 광신과 악의는 집단에 전염될 수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 같은 폐쇄적 공간에서 특정 사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믿음을 강화하며, 우연히 노출된 이들까지 끌어들이는 경향을 보인다.


그 안에서는 그것이 곧 규범이 되며, 모든 사고와 판단을 지배한다.


사상의 이름을 빌린 맹목성과 혐오가 곧 집단의 행동 원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집단주의적 특성과, 본능을 넘어서는 이념의 구속력이 결합되었을 때 광신과 악의는 더욱 강력하게 확장된다.


이것이 무서운 이유는, 다른 가능성과 사고를 원천 차단하며, 그 안에 있는 개인이 파괴적 행동에 이르기까지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위험한 점은, 그 광신과 악의를 숨길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대중적으로 용납되지 않으리란 걸 아는 사람은, 자신을 감추고 음지에서 동조자를 찾는다.

그들은 어떤 표현을 피해야 대중의 눈을 속일 수 있을지 연구하며, 겉으로는 평범한 가면을 쓰고 사회 속에 섞여 살아간다. 이들은 속이고자 하면 철저히 속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에 품은 생각은, 폭발을 기다리는 뇌관처럼 언제든 사회를 파괴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또 그런 존재를 직관적으로 감지해내는 능력도 갖고 있다.


학창 시절 "저 친구 뭔가 이상하다"고 느껴 거리를 둔 경험,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 감각은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삶 속에서 형성된 자기만의 위험 감지 시스템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직관은 때론 광신과 악의를 감별하고, 그에 대응하게 해준다.

하지만 이 역시 주관적인 도구다.


개인마다 감각이 다르기에, 이를 객관적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내가 불쾌하게 느꼈던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관은 다수결로 움직이는 민주주의 속에서 종종 무력해진다.


악의와 광신을 품은 사람이, 그 집단의 "다수"를 만족시킬 수 있다면, 그가 가진 위험성은 오히려 힘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이번 사건은, 인간이 가진 광신과 악의가 얼마나 철저히 숨겨질 수 있고,

얼마나 비이성적으로 자행될 수 있으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를 우리 모두에게 보여줬다.


우리는 이제, 단순히 이 사건을 비판하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이러한 문제들이 어떻게 사회에 스며드는지,

무엇이 그것을 감지하고 막아낼 수 있을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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