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흐름

40대 중년 남성의 생존 가능성에 부쳐

by 윤그림

[footnote]

2013. 10. 31


허세나 지랄이라는 오해도, 혹은 비난도 당연히 기분 좋은 것은 아니다. 우습게 들리겠지만 예수를 믿고 부처를 믿듯, 나는 이 차의 '내포 connotation'를 믿고 십수 년을 살아왔다.



<BMW 320d Touring M Sport Package>


1.

그 아련한 기억이 맞다면, 일기장에 그 흐릿한 마스터플랜이 그려지던 때는 십수 년 전, 고등학교 1~2학년 시절이다. 성북구 하월곡동 산 2번지. 몇 통 몇 반이었는지까지는 기억나질 않는다. 밤나무골 시장 입구에서 산 쪽으로 한참을 걸어 하교해야 했던 동네. 집이라고 하기엔 참 요상했던 구조물이 그 동네에 있었다. 큰 방은 오각형이나 육각형의 형태여서 할머니가 사랑했던 그 자개장이 들어가기에 참 애매했고, 작은방과 큰방의 천정 높이가 달랐으며. 거실은 내 어깨 폭 만했고, 욕실이란 게 따로 없던 그 집, 아니 구조물. 현관 옆에 딸린 작은 창고가 가족의 욕실이었는데, 그 안에 달려있던 수도꼭지에 호스를 끼워 몸을 씻어냈더랬다. 아쉽게도 그 수도는 보일러 같은 호사스러운 장비와는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가스레인지에서 커다란 냄비에 물을 끓여, 현관을 열고, 창고(욕실)의 문을 통해 온수를 배달하는 전근대적인 풍경이 겨울의 일상이었다. 아, 화장실은 오십 미터 거리에 있던 공중화장실을 써야 했다. 여하튼, 그 시절엔 하월곡동 산동네 여기저기로 이사를 참 자주도 다녔었는데, 가장 구조가 이상했고 그만큼이나 불편했던 집이었다. 그 구조물 안에서 이 모든 '큰 그림'이 그려졌던 것 같다.


2.

학습지 [디딤돌]이 왜 그렇게도 하고 싶었었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경쟁사 학습지의 이름은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하여간 일 년에 십수만 원 하는 그 돈이 필요했던 터라 맥도날드 미아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시험기간 마지막 날은 학교를 일찍 떠날 수 있으니 열 시간 이상 씩 근무를 했던 것 같고, 다른 학교의 학생들도 시험 끝을 즐기며 신나게 놀던 터라 그날만큼은 정말 고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방학 때엔 <Free Delivery>라고 불렸던, 오전에 식자재 원료를 나르는 일을 자청해하기도 했다. 몸을 막 쓰는 일이라 시급이 1.5 배였다. 감자 두 박스를 호기스럽게 들다가 허리가 나갔었지, 아마. 처음 시급은 아직도 기억나는데 1440원. 1500원까지 올리는 게 참 어려운 일이기도 했었다. 일 년 여 정도 일을 했다. 그 기간에 나를 정말 우습고 하찮게 보았던, 누구보다 나를 폭탄이라고 생각했던 두세 명의 여성을 좋아했었다. 뭐, 그렇고 그런 시간이었다. 한 달에 십오만 원 남짓을 벌며 삐삐값 내고 친구들과 노래방도 다니고. 회수권 열 장 사서 열한 장으로 찢어내기도 했던.


3.

왜 그런 목표, 그런 마스터플랜을 그렸는지의 디테일한 과정은 기억나질 않지만, 그때 일기장에 썼던 <인생의 목표> 따위가 있었다. '돈 없으니 미대는 포기'하며 '그렇담 그림을 만드는 일을 하자'며 방송국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던 게 첫 번째였고, 50평 아파트를 사는 게 두 번째 목표. 그리고 '엄마 한 대, 나 한 대' 갖겠다며 BMW자동차를 사는 것이 세 번째 그것이었다. 나이브하기 이를 데 없다만, 여하튼, 일기장에 명시되었던 세 가지 소원? 희망사항? 위시리스트? 뭐 그 딴 것들이었다.


4.

그래서 아주아주 멀리 보이는 그 체크포인트를 향해, 조금씩 조금씩 레이스를 해왔다고 생각한다. 디딤돌 모의고사가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만 꽤 괜찮다는 대학엘 갔고, 그때만큼은 직업적 목표를 달성하기에 가장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학과에 진학했었다. 다만, 성인이 되었을 땐 학습지 값을 낼 정도의 돈만 벌면 안 되었던 터라, 조금 더 고되게 일했을 뿐이었다. 내가 필요한 것 이상의 돈을 벌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우습고 하찮고 폭탄처럼 여겼지만, 사치스럽게도 일 년여간 연애를 하던 시기기도 했다.


5.

1999년 여름부터, 편의점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할 때에는 아주 잠깐 금고에 손을 대기도 했다. 2000년도 봄이었던가ㅡ부터 시작했던 노래방 새벽 알바는 부자 사장의 아량 덕택에 높은 시급으로 꽤 버틸만했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사장의 딸을 과외하여 가욋돈이 왕창 늘어났던 것도 기억난다. 과외하는 동안 선생이 꾸벅꾸벅 조는 일이 많았으나 오히려 학생의 사회-과학-역사 과목의 성적은 올라갔으니, 훗날 중 1짜리 그 딸내미 입에서까지 과외 무용론이 제기되었었다 전해 들었다. 제대 후엔 운 좋게(물론 서류-면접의 오피셜 한 채용과정을 별 무리 없이 치러낸 거긴 하지만) 대형 마트 심야 1기 '파트타이머'가 되었는데, 비정규직임에도 불구하고 밤 12시부터 아침 8시까지만 일하면 한 달에 130만 원가량을 만질 수 있었다. 복학 전엔 그것도 아쉬워 낮엔 약국에서 박카스를 까대며 처방전을 입력했고, 복학 후엔 강의실에서 세네 시간을 내리 자면서도 새벽엔 열심히 매대에서 계산을 했었다. 집에서 다리 뻗고 누워 잤던 게 일주일에 정말 스무 시간이 채 안되었던 것 같은데, 용돈 빼고 백만 원 정도를 집에 줄 수 있어서 꽤 괜찮다고 생각했었던 듯하다. 렌즈를 끼고 다닌 이후 같은데 그곳의 누나들이 날 우습고 하찮게 여기지 않았던 관계로, 가끔 같이 영화 보고 나이키 잠바 정도는 얻어 입을 수 있기도 했다. 그래도 성적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꽤 괜찮았다. 과톱도 했었으니까.


6.

그렇게 살았었다. 규칙도 없고, 규칙적인 일과 따위도 없는 삶. 막연한 큰 그림만 있었지, 당장 내일, 내일모레 급한 불을 끄려 그 오늘과 하루하루를 불살라버렸던. 일당이 모여 월급이 되고, 월급이 모여 절대 연봉이 되지는 않았던. 그냥 하루하루 바쁘고, 치이고, 울고, 잠들고, 그러면서도 일어났던. 내 가슴에 압정 몇 개 박히는 게 싫어 남의 가슴에 대못도 한두 개 꽂았던. 그리고 남의 가슴에 실핀 몇 개 꽂히는 게 싫어 내 가슴에 대못도 수십 개 박았던.


7.

그러다가 직업을 가진 생활인이 되었다. 막상 해보니까 저널리스트라는 사명감이나 이상보다는 직장인이라는 자의식이 날 이끌고 가는 일에 좀 더 가깝다. 물론, 이 직업을 꿈꾸었지만 좌절한 여러 사람들에게는 배부른 소리에 가깝겠지만... 그 일을, 인생의 큰 그림처럼 그려왔던 일을, 살아온 방식대로 해 나가 가고 있다. 만으로 8년째 이 일을 해오고 있지만, 여전히 규칙이 없고, 규칙에 가까운 일과 따위도 없다. 임기응변에 가까운 얄팍함만 늘었다. 몇 주 후의 진화鎭火를 위해 하루하루를, 한 주를 소훼燒燬해버리는 위험한 불장난은 계속된다. 나 때문에 가슴에 대못 박힌 사람?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시간외수당이 모여 월급이 늘어나고 월급이 모여 연봉이 되는 수준까지는 오게 되었다. 뭐, 돈 쓸 시간보다는 돈 버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았고, 여긴 또 옛날의 비정규직 시절보단 돈을 많이 주기도 하고. 부인도 나만큼 인생을 불사른 터라,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여유는 쌓여갔다. 재래식 화장실에 분뇨 쌓이듯.


8.

그래서 두 번째 목표를 이뤘다. 7년 동안 타온 부인 명의의 해치백을 팔고, BMW 3시리즈 투어링 모델을 샀다. 내 이름으로 된 자동차등록증과, 고운 가죽 케이스에 싸인 날렵한 스마트키와, 아름답게 광이 나는 하얀색 차량을 인도했다. 누군가의 기준에 따르면 나 같은 직장인의 분에 넘치는 가격이겠지만, 지금이 아니면, 다음 달에 가족이 하나 더 늘게 되면 앞으로 이런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결정적으로는 이 다시 못 올 기회 안에, 일기장에 마스터플랜을 작게 적어 놓고는 십수 년간 헐레벌떡 살아온 과거의 청년에게 인생의 마지막 선물을 주고 싶었다. 정도正道라고 생각하는 길도, 가치관도, 그렇다 할 철학도 없어 보이는 것처럼 부산스럽게 살아온 34살 '풋내기'에게, 당신이 그렇게 인생을 함부로 살아온 것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곧 어른이 되려 하는 34살의 내가 꼭 해주고 싶기도 했다. 그냥 차 한 대, 비싼 수입차 한 대 샀을 뿐이지만, 그냥 울컥하고 많은 생각이 든다.


9.

매우 싱숭생숭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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