光山茶房
1. 나
“주변에 혹시 아는 변호사 없어?”
사실 수연에게 전화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여의도역 플랫폼에 앉아 꽤 긴 시간을 보냈다. 발신 버튼을 눌렀다가 신호 연결음이 들리기 전에 재빨리 끊은 것이 세 차례. 열차 여러 대가 지나갔고, 비슷비슷하게 생긴 직장인들이 시끄럽게 오고 갔다. 나는 단지 그녀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아서 이 질문을 머뭇거렸던 것은 아닌 거라 생각했다. 에라 모르겠다. 다시 끊으려던 찰나,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갑자기 왜.?”
어리둥절할 텐데도 수연은 침착하게 응대를 해주었다. 아름다운 이야기만 하고 지내도 모자란 시기에 연애의 상대와 괜한 난처함을 나누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지금 내가 기댈 곳이라고는 그녀밖에 없었다.
“아니면…. 아버님이랑 친한 변호사라든가.”
“그러니까, 이봐요, 조우현 기자님, 뭘 알아야 도와드리잖아요. 가사야, 형사야? 아니 근데 그렇게 사건 취재를 다니고도 친한 변호사 하나 없으세요.”
나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한 1, 2분 정도나 되었을까. 수연은 마천행과 상일동행 방면 지하철이 들어온다는 안내 방송을 모두 듣고 있는 것이리라. 스크린도어가 열립니다. 대신 남자 친구의 입은 하염없이 닫힙니다. 나의 침묵은, 내 머릿속에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지금의 감정과 상황이 설명될까?’하는 질문에 답을 쉽사리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라는 인간의 배경과 역사를 충분히 공유하고 있었던가?’라는 본질적인 문제이기도 했다. 8개월째 연애하고 있는 여자 친구에게 도움을 구걸하는 상황이 단순히 미안해서, 쪽팔려서, 혹은 한심해서 말문이 막혔던 것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죽었다네.”
한 시간 전쯤 내게 그 부고를 알려온 이는 사촌 누나 승희였다.
아홉 살 터울이니 이제 사십 대 초반의 아줌마가 되었을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가장 마지막으로 연락을 나누었던 일은 약 3년 전이었다. 우리는 어쩌다 1, 2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던 사이였지만, 당시에는 매형 몰래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면서 이백만 원 정도를 빌려달라고 했다. 나는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서, 취업 이후 차근차근 쌓아왔던 통장 하나의 잔고를 거의 털어 보내 주었다. 그 이후로는 어떠한 연락도 없었다. 그런 그녀가 3년 만에 대뜸 ‘통화되니’, 이 네 글자가 전부인 문자를 보내왔다.
지금껏 아버지 쪽의 식구들은 다 지워냈다 싶으면 연락을 해오고, 말끔히 비워냈다 싶으면 찔끔찔끔 존재감을 드러냈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말버릇처럼 이혼하겠다면서 나를 괴롭혔던 사촌 누나도 그랬고, 마지막으로 자영업에 도전해 보겠다며 곱창집을 하나 내고는 맛집 방송에 출연시켜 달라고 졸라대던 작은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빌려 간 돈 생각이 이제야 났나, 괘씸하다 싶어 한소리를 해야겠다며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누나는 안부 인사도, 돈 얘기도 건너뛴 채, 속보를 전하는 기자마냥 목소리를 높였다.
“네 아빠 오늘 새벽에 돌아가셨단다. 그래도 가 봐야 하지 않겠어?”
내가 세 살 때, 나의 생물학적 부와 모는 이혼했다. 가난하고 불우하던 아이들의 사연이 대체로 그러하듯 나는 외할머니에게 맡겨져 줄곧 외가 식구들과만 살았다. 외가에서는 그 파탄의 책임이 전적으로 네 아빠에게 있었다고 알려주었다. 어느 정도의 편향과 왜곡은 감안하더라도, 훗날 알게 된 진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진실(에 가장 가까운 정황)을 증언해 주었던 사람인 사촌 누나 승희는 유일하게 내가 가끔이나마 만나오던 아빠 쪽 식구였다.
“빈소는 어디래?”
문자로 보내 주겠다는 대답을 끝으로 누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래서 빌려 간 돈은 언제 갚을 건데?’라는 질문은 거리의 소음에 융해되었다. 자기밖에 모르는 건 여전했다.
“글쎄, 자세한 건 가봐야 알 것 같아.”
수연은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물어왔지만, 나 또한 아는 바가 없었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기억조차도 아득했다. 언제였더라. 제대 후에 복학 문제로 등록금을 구걸하러 갔던 그때가 마지막이라면, 대략 6~7년 전인가. 나는 마침 일주일의 휴가를 받아 놓은 상태였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캡에게 부친상이라고 보고하면 이래저래 회사와 출입처의 사람들이 귀찮게 할 것 같았고, 회사 인트라넷 <경조 알림>에 부고를 띄운 뒤 같잖은 동정을 구걸하고픈 생각도 없었다. 고민이 끓던 나를 위해 감정노동 중이던 수연은, 대뜸 정곡을 찔렀다.
“기다리던 일이 터졌구나?”
“어디 가서 그런 얘기 하지도 마. 근데 내가 그런 얘길 한 적이 있니?”
“지난번 엄청나게 취해서는. 그리고 말은 바로 하자, 너 기다린댔다.”
자주 필름이 끊기는 내 술버릇이 한심스럽다는 듯 수연은 나지막이 읊조렸다.
“너, 막상 기다리던 일이 닥치니까 떨리는구나?”
그녀의 말이 맞았다. 떨렸다. 긴장이 되면 항상 아랫배가 사르르 아파져 왔다. 오른쪽 다리를 무의식적으로 떠는 버릇도 함께 찾아왔다. 기다린 것도, 기대한 것도 사실이다. 의식적으로는 분명 즐기면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지만, 중요한 인터뷰이를 만나기 직전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도 온몸에 펴졌다. 아무리 살면서 몇 번 보지 않았지만, 또 그 남자의 인생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 거의 모르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로 인해 잉태되었다. 이렇게까지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이벤트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생명체의 숨이 끊긴 것을 목도한 경험은 아주 어릴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것과, 그것보다 조금 더 머리가 굵어졌을 때 키우던 강아지가 사람 나이로 일흔 정도에 무지개다리를 건넌 것이 전부였다.
“뭐가 됐든. 근데 아버님 통해서라도 변호사는 알아봐 줄 수 있지?”
“진짜로 하기는 하려나 보네?”
수연의 질문에 이따 보자는 말로 대답을 갈음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자신도 없지만, 그리고 그 끝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은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그 일을 안 할 수는 없겠노라 생각했다. 굳세게 다짐하는 쪽을 선택했다는 것이 더 딱 떨어지는 표현이려나. 그 대계 大計가 시작되기 위한 조건은, 아버지가 사망하는 것이었다. 지하철에 오르는 순간, 일이 많다는 핑계로 두 달 정도 찾아보지 못했던 엄마가 문득 보고 싶어졌다.
2. 수연
엄마가 노력하지 않았다면, 수연을 만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수연은 현재 판교에 모여 있는 IT 기업 중 가장 큰 곳에서 웹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각자의 직장에 근거한 생활 반경이 목동과 판교만큼이나 멀리 있었던 데다 ‘돈 많은 집안의 딸’이라는 조건이 주는 무조건적인 비호감은 나에게는 아주 컸기에, 작위적인 노력이나 천운 따위가 없었더라면 결과적으로 지금의 인연은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어미의 집요하고도 넓은 발이 둘을 연결해 주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엄마는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살아왔던, 누가 봐도 역마살이 단단히 껴있는 양반이었다. 서울과 광주, 전라도 여러 곳을 오가며 ‘물장사’라는 걸 오래 했었다. 그 물장사의 시작은 스물다섯에 서울에 차렸던 다방, ‘광산다방’이었다. 잠시나마 충남 논산 일대와 경상북도 안동, 심지어 제주에서 터전을 잡은 적도 있었는데, ‘꽃마차’라 불리던 술집에도 꽤 오래 몸을 담았다고 했다. 물론 그 외에 내가 알지 못하는 거처도 꽤 많았다.
내가 소위 ‘언론고시’를 패스해서 방송국에 입사하자, 엄마는 당신이 알고 있는 전국의 지인들에게 전화하여 자랑하고 소문을 내었다. 그녀에겐 실업의 시대에 단순히 취직했다는 의미 그 이상이었다. 방송사의 유명 앵커가 메인 뉴스의 말미에 자사 공채에 합격한 젊은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읽어줄 거라 전했을 때가 시작이지 않았을까 싶은데, 엄마는 팔 아프게 기다린 끝에 기필코 그 화면을 핸드폰 동영상으로 찍어내었다. 지상파 방송에서 매크로하게 알린 내용을 다시 그 작은 카메라로 담아 마이크로하게 퍼뜨리려는 노력이라니.
꼭 그 자랑질의 끝에는 ‘주변에서 소개할 만한 재력가 –정확하게는 재력가의 시집 안 간 여식- 를 찾아 달라’는 부탁으로 이어졌다. 그녀에게 조금씩 입질이 왔던 것은 작년 봄부터였다. 엄마의 고향인 광주에서 여전히 살고 있는 이모할머니가 수백억 규모의 공장 사장님과 건너 건너 알게 된 사이인데, 그가 딸의 혼사 때문에 고민이 많다는 소식을 때마침 낚아 올렸다. 엄마의 대리 구혼 작전에 불이 붙었다.
간절했던 어미의 상투적인 부탁으로 나갔던 소개팅 자리에 수연이 있었다. 조심스레 서로의 인터뷰를 이어가던 도중, 마침 전화를 꺼내던 그녀의 가방 안에서 자동차 열쇠가 눈에 띄었다.
“BMW를 타시나 봐요?”
수연의 회고로는, 질문의 의도에는 경외를 담았을지언정 억양에는 ‘금수저’에 대한 조롱이 묻어 있었노라 평가했다. 나는 그 회고에 자격지심이라 응수했다. 수연은 훅 들어온 질문에 살짝 당황한 듯 보였다.
“오랫동안 스스로 벌어 모은 돈으로 샀어요. 분에는 안 넘치는, 제일 작은 모델이고요.”
서로를 진정으로 알아가는 기나긴 대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인생의 세 가지 목표 중의 하나가 BMW를 사는 것’이었다는 이야기를 주책없게도 길게 늘어놓고 있었다. 달동네 판자촌으로까지 흘러 들어갔던 가난한 유년과 육성회비를 내지 못했던 초등학교 시절의 누추한 이야기까지. 취하지 않았음에도 처음 보는 이성에게 ‘소년소녀가장 수필 당선작’ 같은 소재를 꺼냈던 것을 보면, 나는 그녀가 편했고 첫눈에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할아버지가 옛날 전남 송정이라고 그쪽에 땅을 많이 갖고 계셨어요. 거기가 광주직할시로 편입되면서 갑자기 부호라는 게 되었고.”
신기한 눈으로 이야기를 듣던 수연은 오히려 자신의 부유함을 부끄러워했고, 상대적으로 나를 더 흥미로운 사람으로 맞이했다. 그러면서 정신과 의사에게 고민을 상담하는 것 같은 억양으로, 친척으로 통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렇게 가깝지 않은 집안 어르신이 돌아가셨을 때, 재산을 한 푼이라도 더 받기 위해 일부러 허름한 옷을 찾아 입고 와서는 누가 더 어렵게 살고 있는지를 경쟁하던 피붙이들. 실제로는 건물 여러 채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부유했지만, 모시지도 않았던 부모의 사망을 ‘사은품’처럼 여겼던 버러지 같은 늙은이들, 또 제삿날 누군가 가져온 비싼 양주를 한 잔이라도 더 마시려 싸우고, 그 취기에 또다시 다투던 혐오스러운 어른들. 물론 그녀는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어 감사하다고 생각하지만, 앞으로 더는 이용하고 싶지 않다는 바람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제가 나고 자란 곳이니, 물론 이율배반적이죠. 하지만 그런 걸 보고 있으면 저는 피로 맺어진 집단이 가장 피로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계속 들어요. 피로는 폭력이라던데.”
“라임 좋네요.”
이 여자, 센스 있네.
“비효율적인 데다 민주적이지도 않으면서, 모두를 폭력과 착취의 가해자로 교육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래서 아이도 낳고 싶지 않은 거고.”
출발점은 다르지만 나와 같은 결론이었다.
“저도 2세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요. 저한테는 부모라는 존재가 없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사실 부모가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들인지 전혀 모르거든요.”
수연은 그렇게 미인은 아니었지만 매사에 여유가 있었고 유머러스했으며, 특히 옷맵시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좋아하는 감정을 느끼게 된 것은 금수저를 향한 단순한 호기심 때문은 아니었다. 영혼이 아주 비슷한 사람이라는 직감, 그로 인한 끌림이 있었다. 우리는 둘 다 자신감이 넘치지만 아울러 겸손할 줄 알았고, 밖에선 꽤 똑똑하지만 스스로는 항상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류였다. 삶을 유지해 온 굳건한 철학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이라는 태도도 거의 일치했다. 우리는 점점 더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수컷의 번식력에 버금가는 엄마의 왕성한 사교력이 살면서 단 한 번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말을 바로 하자면, 함께 살았던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았던 엄마의 존재 자체가 내 인생에 도움이 되었던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내게 수연을 이어준 것만큼은 감사해야 마땅했다. 이런 게, 미처 내가 알지 못했던 부모의 역할이란 걸까.
“엄마, 잘 생각해 봐. 혹시 모를 일이야. 수연이네 집안사람 중에 엄마랑 언제 어깨동무하고 블루스 추던 사람 있을지도 모르잖아? 내 결혼식에서 만나면 재밌으려나. ‘그나저나 축의금 얼마 하셨어요?’ 물어보면서.”
“미친 새끼, 아주 에미 알기를 호구로 알아.”
엄마는 껄껄대며 그 힘없는 손으로 내 등짝을 때렸다. 아들의 짓궂은 농담을 욕설로 받아칠 정도면 꽤 성이 난 것이었겠지만, 그 손은 이제 전혀 맵지 않았다. 엄마는 기력이 그만큼 쇠해져 있었다. 사실은 ‘죽어가고 있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3. 엄마
사실 난감한 문제는 또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엄마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까.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맞을까. 내가 빈소에 가서 상주 노릇을 하겠다 하면 엄마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마지막으로는, 단 한 번도 엄마에게 털어놓은 적 없는 내 계획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할까.
동생 은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던 건 아침 아홉 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빈소에 출근하려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오빠, 엄마랑 통화 한 번만 해줘.”
은미는 내가 태어난 7년 후 바로 그 엄마의 뱃속에서 나왔기에 내 동생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성 性도, 성 姓도 달랐다. 엄마의 표현을 빌리면 ‘그래도 절반의 유전자는 같을 텐데’, 그녀는 나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은미의 최종 학력은 검정고시 고졸. 지금은 편의점 아르바이트 정도로 근근이 앞가림했다. 원룸이긴 했지만 전셋값이라도 모아 독립해 나온 나와는 달리, 모아둔 돈도 갈 곳도 따로 없는 은미는 엄마의 둥지에서 아직 이소조차 못 하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나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나는 그래서 그녀가 전화를 걸어 올 때마다 정말 불안해지고 말았는데, 항상 그런 식이었다. 렌트로 차를 몰다 사고가 났는데 ‘기자인 오빠가 상대 차주를 만나줘야 일이 잘 풀릴 것 같다’거나, 중고 명품 거래 사이트에서 사기를 당해 90만 원을 날렸는데 엄마 모르게 잠시만 돈을 융통해 달라거나. 그녀가 나를 찾는다는 것은 곧, 내가 처리해야 하는 문제가 생겼다는 얘기다. 전화를 받자마자 은미는 울먹거리고 있었다.
“오빠야, 집에 좀 와줘. 엄마가 제발 좀 살려 달래. 걷지도 못하겠대.”
평소에 건조한 동생이 이렇게 걸쭉한 울음을 섞어 오빠에게 부탁한 적은 없었다. 더 놀라웠던 것은 생애의 의지와 자존감이 누구보다도 투철하고 높은 엄마가, 저런 식으로 입 밖으로 앓는 소리를 꺼냈던 적이 적어도 내 기억에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수연과 함께 서둘러 찾아간 엄마는 당신의 방 침대에 맥없이 기대앉아 있었다. 항상 쓰고 있던 얇은 모자도 벗고 있었다. 엄마는 말 그대로 온몸이 성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약 6년 전 가슴에서 시작된 종양은 왼쪽 가슴을 도려냈을 때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였지만, 몰래 몸 여기저기로 퍼져나갔다. 그 악성의 덩어리는 3년 전 뇌에서도 여러 개가 발견되었고, 그로부터 1년 뒤에는 임파선과 폐로도 전이되었다. 오랜 항암치료로 머리가 다 빠졌지만, 그래도 아들이 온다 하면 약간의 거리감 때문인지 항상 얇은 비니를 쓰고 맞았더랬다.
최근 자주 쓰던 체크무늬의 모자는 바로 수연이 사준 것이었다. 지난 명절에 수연은 인사를 하러 오면서 나에게 선물을 추천해 달라 했었는데, 나는 장난으로 중년의 여성이 좋아할 법한 명품 브랜드의 모자를 하나 공유해 주었다. 의외로 엄마는 거울 앞에서 고개를 돌려가며 ‘예쁘다, 산책이라도 한 번 더 나가야겠다!’라면서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옆에서 은미는 몇십만 원짜리 명품 모자를 넙죽 사 오는 손님들에게 샘이 났는지, ‘그렇게 싸돌아다니고 싶으면 가발을 쓰지, 다 죽어가는 사람이 명품이랍시고 모자 자랑한다’라며 만만한 엄마를 놀려대었다.
“저 나쁜 년 보게, 니가 가발 말고 모자 쪼가리라도 사줘 봤니?”
그렇게 말하며 우리 둘 앞에서만큼은 소녀처럼 웃던 엄마였다. 그랬던 그녀가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나와 수연 앞에서 모자를 손에 쥐고는 휑한 머리를 드러내고 있을까. 민머리의 엄마를 보는 것은 2~3년 전 병실에서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 병실에서 처음 만났던 담당의는 그녀에게 몇 가지 항암치료를 제안했지만, 엄마는 그 치료법이 모두 암보험의 보장을 더 이상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는 주변에 손을 벌리기 싫다며 거절했다. 대신 임상시험의 실험군이 되는 쪽을 택했다. 쉽게 말해 제약회사에서 만든 신약의 베타테스터가 되는 것이었다. 제약회사 측과 작성했던 계약서에는 깨알 같은 글자들이 여러 페이지를 채우고 있었지만, 내용은 사실 간단했다. ‘우리가 새로이 만든 표적 치료제가 당신 안의 종양을 없애려 들겠지만, 때에 따라서는 엄청난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나를 향해 그 계약서를 흔들며 엄마는 농담이랍시고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래도 내가 아들한테 고개 쳐들 마지막 양심은 남아있다 안 허냐.”
엄마는 사지가 모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프다고 했다. 팔 끝, 다리 끝 모두가 시멘트를 친 것처럼 옥죄어 오는 터라 움직일 수가 없다며 흐느꼈다. 힘겹게 바지춤을 내려 맨살을 보여주었다. 엉덩이 위쪽으로 등의 피부가 새카맣게 괴사한 듯 보였다.
담당의에게 들은 정확한 병명은 ‘아놀드-키아리 증후군’이었다. 매사 친절하고 자신만만해 보이던 의사가 그 병명을 이야기할 때만큼은 확신이 없어 보였는데, 선천적으로 발생한다고 알려진 이 희귀난치성 질환이 왜 나이 육십이 넘은 여성에게 찾아온 것인지 본인도 의문이라고 했다. 요약하면 흐름에 이상이 생긴 척수액이, 뇌와 척수의 비어 있는 공간에 들어차면서 신경을 압박하는 증상이었다. 그래서 손발이 굳는 것처럼 느껴진단다. 간혹 늦은 나이에 뒤늦게 발견하는 사례도 있기는 하지만, 엄마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그 천방지축의 신약들이 배설한 부작용일 거라 했다. 그러면서 그는 엄마의 서명이 되어있는 계약서를 조심스레 꺼내며, 생명에 직접적으로 위협이 되는 부작용은 아닌 만큼 이 증상의 치료를 지원해 줄 수는 없겠노라며 시선을 피했다. 어쩌겠나.
병원을 나오며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이름도 어려운 그 증후군에는 ‘웃다가 죽는 병’이라는 표제가 꽤 많았다. 증상이 심하면, 격한 웃음으로 혈압이 오를 때 뇌에 압력이 가해져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고 했다.
“어떤 새끼가 그랬을까? 웃는 게 만병통치약이라고.”
“냅둬라, 염병. 니 동생 때문에 웃을 일이 있어야지. 근데 차라리 웃다가 죽으면 좋은 거 아니냐?”
밥 한술을 뜨기 위해 거실을 기어가 싱크대를 부여잡고 일어서 그릇을 꺼내는 일상이 꽤 오래 지속되었다. 당신이 자주 찾던 물건들은 점점 최소한의 통증으로 이동할 수 있는 동심원 안쪽에 들어와 있었다. 역마살이 낀 듯 그렇게 정착하지 못하고 살던 인생에 찾아온 대가 같은 질병이었을까. 아니면 본인의 의지나 목표와는 달리 헤프게 살아온 삶에 내려진 형벌은 아닐까. 자유롭고 넓었던 엄마의 세계는 이제 잠실의 한 옥탑방으로, 또 그 옥탑방 안에서도 한두 평 남짓의 공간으로 수축해 있었다. 텔레비전 리모컨에 힘겹게 손을 뻗는 엄마를 보며, 그래도 한때는 아름다웠던 여성이 이렇게 무겁고 추한 껍데기를 걸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서글퍼졌다. 갑작스레 나는 역설적으로, 내가 기억하는 것 중 엄마가 가장 즐겁고 행복해 보였던 풍경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떠올리려 노력했다.
내가 끄집어낸 것은, 엄마가 이름 모를 친구들과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는 노래를 부르던 그림이었다. 노래도 또 기가 막히게 잘했다. 엄마는 당시 친구 몇몇과 돈을 여기저기서 끌어모아 노래 주점 비슷한 가게를 하나 내었다. 내가 스물세 살, 군대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군 생활의 절반 정도가 꺾였을 때 한껏 군복에 주름을 잡고는 열흘 정도의 휴가를 나와 엄마를 만났다. 엄마는 갓 문을 연 가게로 찾아오라 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막상 가보니 그녀는 멀끔하지 않은 남정네들과 나눠 마신 여러 잔의 폭탄주에 취해 있었다. 그 그림이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건 물론 엄마의 행복한 표정 때문일 수도 있지만, 내가 그 자리에서 정말 오랜만에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던 탓이었을 수도 있다. 공식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그녀의 ‘조카’였으므로.
“내가 신경은 십 원어치도 못 썼는데, 얘 명문대 갔거든. 나 닮아서 안 그러요.”
그녀는 어깨동무한 남자와 잔을 비우며 나를 소개했다. 연이어 술잔이 오고 갔고, 점점 정신이 희미해져 가는 동안 자책이 늘어갔다. 반짝이는 조명이 군복의 얼룩무늬 위를 어지럽게 훑는 동안 나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에미가 원수지, 얘가 뭔 죄가 있겄소. 에미가 웬수지.”
장사는 생각만큼 잘되지 않았다. 엄마는 계속 돈이 필요했다. 주점을 접은 뒤 혼자서 구제 옷 가게를 운영하기도 했고 동네에서 새로 생긴 친구들과 뜨개방을 내기도 했다. 그녀는 낡은 옷들 사이에서도 비싼 브랜드의 것을 발견해 내는 심미안과, 쇼윈도에서 한 번 본 명품 니트의 꽈배기를 그대로 뽑아낼 수 있는 손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것들은 나에게도 전해졌기에 아주 감사하다 생각했지만, 엄마의 사업이 잘될 거라고 낙관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며, 미안하다며, 나에게 자주 손을 벌렸다.
엄마에게 가장 큰돈을 털어 넣었던 일은 당신을 괴롭히던 한 빚쟁이에게 더 이상 시달리고 싶지 않다는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는데, 그때가 나는 막 입사를 해서 수습사원 연수를 받고 있던 시기였다. 엄마가 필요했던 돈은 살면서 손에 쥐고 있어 본 적이 없었다. 결국 생활 정보지에 나와 있던 브로커를 찾았다. 대출 조건이 안 되는 사람들에게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던 그는, 내게 재직증명서만큼은 꼭 필요하다고 했다. 다음 날 인사팀 선배는 내가 아직은 수습이기 때문에 ‘은행 제출용’의 코드로는 떼어줄 수 없다며 ‘학교 제출용’만 가능하다고 말했는데, 이를 브로커에게 회신하니 그는 ‘상관없다’라며 세상 좋은 사람처럼 웃었다.
“좋은 회사 수습은 짤리지를 않거든. 선이자 10%, 140 떼고 1,260만 원. 괜찮겠어요?”
이 땅의 신참 기자 모두가 그러하듯 돈 쓸 시간 없이 바삐 일하자, 대부분의 월급이 고스란히 통장에 쌓였다. 생활비를 아껴 서둘러 메우기로 했다. 원리금이 불어나는 속도보다 더 빨리 갚아나갔더니, 나는 결국 이천만 원이 조금 안 되는 선에서 빚이란 것을 완전히 털어버릴 수 있었다. 신문지에 곱게 싸여 있던 돈다발을 영접한 날부터 가끔 가위에 눌리는 밤이 잦았는데, 브로커에게 잔금을 모두 입금했다는 문자를 보냈던 그날부터, 악몽은 말끔히 사라졌더랬다.
4. 엄마의 세 번째 남자
수습을 떼고 정직원이 되면서는 조금씩 생활이 윤택해졌지만, 사실 그 직전까지는 살면서 가장 힘들다고 느낄 때였다.
군대에서 2년 2개월을 보내고 다시 세상으로 나왔을 때 나는 진짜 어른이 되었다고 느꼈는데, 누구 하나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외할머니와 단둘이 살며 소득이 없으니, 한 푼이라도 벌어야만 그럭저럭 사람 노릇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대학생으로 살려면 최소한의 푼돈이라도 항시 쥐고 있어야 했다. 홀로 숨어 컵라면으로 배를 채우고, 사십 분 정도를 걸어 버스비를 아끼는 날들이었다. 3학년 겨울방학 직전이었을까. 한 선배에게 술을 얻어 마시고 역시나 집에 걸어오다 그날따라 너무 힘이 들었는데, 슈퍼 앞에 잠시 세워져 있던 자전거를 술김에 훔쳐 타고는 집에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정신을 차리고는, 그 자전거를 야산 쓰레기장에 던져 버렸다. 명문 사립대의 벽은 학업과는 다른 쪽에서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엄마는 그즈음 거의 연락을 하지 못하고 지냈다. 앞선 두 번의 결혼에 실패하고 일종의 연애를 하던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연애는 대략 2~3년간 지속되었는데, 엄마는 은미의 존재를 밝혔지만 내 존재는 역시나 감추었다. 먼발치에서만 보았던 엄마의 남자 친구는 인테리어 공사를 하던 사람이었다. 키는 작았지만 현장 일을 해서 그런지 매우 다부진 몸이었고, BMW를 끌고 다녔다. 엄마는 ‘현금 부자’라는 프로필을 가장 사랑하는 것 같았다.
경기도 마석의 꽤 큰 전원주택에서, 심심하지만 평온한 날들을 보내고 있단 얘길 전화로 가끔 전해왔다. 대신 홀로 지내는 날이 많았고 몸이 썩 좋지 않다는 이야길 자주 했었는데, 결국 엄마의 자궁에선 커다란 근종이 발견되었다. 수술로 그 기관 전체를 드러냈다. 대장이며 소장이며 오장육부가 그 빈자리를 찾아 메우려 떠돌아다니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몸 안에서 누가 천천히 걷고 있는 기분이야.”
그때까지만 해도 그 남자 친구는 엄마의 곁에 있어 주었다. 두어 달 후 엄마는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그러고는 곧이어 왼쪽 가슴을 떼어냈다.
“이젠 아빠라고 불러야겠어.”
여성에게 상징적인 두 기관을 잃은 엄마에게 나는 그런 농담을 건넸는데 역시나 그녀는 웃고 말았다. 그러나 유방암 수술이 끝난 후 그 남자는 엄마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도 역시 엄마가 이제는 더 이상 여자로 느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슬하에 딸 둘이 있었던 그는 엄마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대신, 모든 연락을 끊고 딸들을 엄마 홀로 있던 집으로 보내어 요양 중이던 그녀를 내쫓다시피 했다. 엄마는 더 이상 남자를 사귀거나 남자에게 인생을 기대는 일은 없을 거라 말했다. 체념일지 의지의 표현일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는 억양이었다.
“남자 중에, 아들 너 하나는 빼고.”
모두가 야속했고, 모두에게 화가 났지만 모두를 이해하려 했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엄마가 그 몰골로 혼자가 되어 다시 나타났을 때, 외로이 버텨나가는 삶이 너무 힘들었고 싫증이 났다. 뭐라도 해야 했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 아들 노릇 좀 할래?”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 나는 입을 만한 것 중 가장 허름한 옷을 찾아 걸쳤다. 아마 수연이 얘기했던 혐오스러운 늙은이들과 같은 심리였을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여전히 개인택시를 몰고 있었는데, 새어머니와 함께 단출히 살고 있던 그 아파트에서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이제 아들 노릇을 하겠느냐고. 당신은 아비 노릇을 좀 하겠다면서.
나는 대답 대신 무릎을 꿇었다. 최대한 자주 찾아뵙겠다는 약속과 함께 한 번만 도와달라고 빌었다. 대학 생활은 어떤지, 동아리는 들었는지, 부자간에 나눌 수 있는 일상의 가벼운 대화들이 반주와 함께 오고 갔다. 그날 이후에는 생신을 챙겨 새어머니와 함께 셋이서 등산하고는 집으로 가 저녁을 먹기도 했다. 전혀 재미있지 않은 일화를 신나게 이야기할 때는 영혼을 끌어모아 웃음으로 받아주었다.
그 생신날은, 내가 직전에 구걸했던 등록금을 아버지가 만들어주기로 약속한 날이기도 했다. 행사 같던 하루의 끝에, 그는 구겨진 표정으로 돈다발을 꺼내며 엄마 이야기를 시작했다.
“니 에미랑 할미가 내 욕 많이 하지? 근데 그거 다 믿지는 마라.”
약간의 반성으로 시작되었던 아버지의 회고는 곧 엄마에 대한 비난과 질책으로 이어졌다. 태생적으로 헤펐다는 평가. 웃음을 흘리고 다녔고, 항상 의심스러운 계집이었으며, 그래서 참을 수 없었다는 변명. 순간 깜깜한 밤 찻길에서 엄마가 나를 업은 채 흐느끼며 코피를 훔치던 풍경이 머리를 스쳐 갔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남아있는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다. 바람은 오히려 아버지가 폈고, 그 이후 엄마를 점점 더 심하게 때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사촌 누나 승희가 증인이자 제보자였다.
따져 묻고 싶은 마음과 입이 근질거렸지만, 나는 그 돈뭉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침묵하는 쪽을 택했다. 공손하게 돈다발을 받아 들고 90도로 인사를 한 후 기나긴 아파트 복도를 빠져나오면서 ‘단순한 비교는 어렵겠지만, 몸을 팔고 화대를 받는 것은 이런 기분일 것’이라 느꼈던 것 같다. 그 돈을 그날 밤 바로 엄마에게 던져 주며 나는 아버지라는 작자가 하루빨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그리고 그가 만약 사라진다면, 아들 노릇이란 행위를 마음으로는 단 하루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이루어 놓은 재산을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가져와 엄마에게 주리라 다짐했다. 선택이 아닌, 당위의 문제라 생각했다.
5. 새어머니
엄마를 보고 오느라, 둘째 날 빈소에는 오후 3시쯤 겨우 출근할 수 있었다. 사실 빈소에 오는 시간은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는데, 조문하러 오는 사람은 두 손에 꼽을 만큼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화는 ‘서울개인택시조합’에서 보낸 것 하나뿐이었다. 새어머니는 여전히 아무 말없이 한참을 떨어져 앉아 있기만 했다. 가끔 눈이 마주치는 경우가 있었지만, 서로가 할 수 있는 얘기라는 것이 없었다.
아버지의 실재보다 한참 젊어 보이는 영정 사진을 빤히 쳐다보다, 왜 저런 사진을 가져다 놓은 것일지 의문이 들었다.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죽음이었을까. 왜 산 정상에서 찍은, 저렇게 화질도 떨어지는 사진이어야 했을까.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알고 있어? 안 궁금해요?”
새어머니는 이틀 만에 처음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내가 잠시 놀라 말문을 열지 못하는 사이, 그녀는 나지막이 아버지의 사인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집 앞 굴다리에서 발견됐어요, 택시에 앉은 채로. 심근경색이었다네.”
전혀 전조 같은 것이 없었다고 했다. 건강했고, 매일 밤 소주 한 병 정도 반주를 했지만, 그건 그만큼 건강해서 할 수 있었던 거라고. 이틀을 일하고 하루를 쉬는 생활을 이십 년 이상 꼬박했고, 쉬는 날에는 무조건 당신과 산에 다녔다고. 경찰에게 연락을 받았을 땐 믿기지 않아 너무 황망했으며 영정 사진도 집안을 뒤져 겨우 찾았노라고. 그녀의 목소리엔 점점 서글픈 감정이 차올랐고, 준비했던 문장을 서둘러 쏟아내려는 사람처럼 말이 빨라졌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게 잘 이해 안 되죠? 친한 사람 없이 오로지 저하고만 붙어 지냈으니, 그럴 수밖에.”
내가 이 정도로 외로운 존재였다면, 나 또한 피붙이 하나라도 더 찾아다니려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부모의 그릇은 곧잘 자녀의 지위나 명성으로 검증되는데, 회사에 보고조차 하지 않은 부친상이 절대 화려할 리 없다는 생각도 함께.
“원래 빈소는 꾸리지 않으려 했어요. 그런데 그이가 예전부터 자기 죽으면 우현이가 아들 노릇이라도 하면서 지인들이라도 불러야 하니, 이런 게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가끔 했거든.”
위로나 변명, 혹은 그밖에 상투적인 응대가 필요했지만 나는 준비한 언어가 없었다.
“하지만 난 그대 처지도 이해는 해요.”
마침 상복의 안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몇 차례 울렸다. 수연이 보낸 메시지였다. 그녀 아버지 친구의 후배라는 가사 전문 변호사의 연락처와, 지금으로부터 얼마간 통화가 가능하다는 내용 등이 네댓 개의 문자로 나뉘어 도착해 있었다. 잠시 실례하겠다며 자리를 잠시 비우겠노라 말할 때, 나는 왠지 모르게 비겁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 두 분 사이에 아이가 있나요? 아, 없어요? 그래도 반반은 아니에요. 배우자와 자녀가 나누는 비율은 1.5대 1이에요. 예? 아니, 우리 기자님이 1이에요.”
돈 안 되는 가욋일의 피곤함을 알리려는 듯, 통성명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던 전화 너머 변호사는 아주 나른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자녀가 여러 명이면 1.5대 1대 1대 1대 1, 이런 식이 되는데 형제 없는 내가 자식의 의무를 했든 안 했든 일단 아버지 재산의 5분의 2가 내 몫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만큼이 안 될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기여분이라 해서, 때에 따라서는 부친을 모시고 살았다거나 하는 사람들한테는 상속분을 더 챙겨줘야 할 거 아닙니까, 그죠? 기여분에 대한 다툼이 있는 경우엔 소송으로 확정이 되죠. 지금 말씀하시는 거 들어보면 분명 다툴 것 같은데요. 그쪽에선 네가 한 게 뭐가 있냐, 뭐 이런 논리로.”
언급하는 사례가 많아질수록 말투에는 점점 귀찮음이 묻어났다. 이 통화 한 번의 희생으로 변호사는 어떤 반대급부를 기대하게 될 것인지를 상상하려던 찰나, 통화와 내 의뢰를 단번에 끝내려는 듯 아주 깔끔한 방법을 제안해 왔다.
“그냥 이러시지 말고, 새어머니 전화번호를 주세요. 차 사장님 예비 사위시람서? 제가 해결해 드릴게. 사장님한테 얘기만 좀 잘해주시죠.”
저녁 열 시경 빈소에서 다시 퇴근이라는 것을 했다. 새어머니와는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간단히 목례하고 자리를 떴다. 장례식장 주차장에 수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엄마라는 분, 어떤 사람인지 알기는 해?”
내가 아는 정보라고는 산악 모임을 통해 아버지와 만났고, 한 살 연상이었으며, 재혼 이후 2세를 갖고자 노력했으나 그녀가 불임이라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는 것 정도밖에 없었다. 수연은 그렇게 잘 알지도 못하는 이와 척지려는 나를 걱정하듯 말했다.
“처지를 바꿔 생각해 보면 그분은 억울하시지 않을까? 너도 그런 불필요한 불편 같은 거 싫어하잖아. 사실 네 캐릭터 아니지 않아?”
나는 그녀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흐름으로 대화를 풀려 하는지를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우현아, 그래서 내가 잠깐 생각해 봤는데, 혹시….”
내 기분이 조금이라도 상할 거라는 걸 알면서 그녀가 입 밖으로 내려 했다는 건, 결국 선의에 의한 결론이라는 것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 정도의 돈은 어렵지 않게 마련해 내게 던져 줄 수 있는 여유가 언짢을 정도로 샘이 났지만, 그만큼 나를 아낀다는 방향으로 해석했다. ‘좋게 좋게’ 해석하기. 그녀든, 누구든, 갈등을 피하려 내가 항시 써왔던 방법론이었다.
“뭔지 알 것 같은데, 얘기하진 말아 줄래. 얼마일지도 모르잖아.”
“무당 났네, 진짜.”
작은 BMW는 말없이 한참을 달렸다. 조수석의 나는 이 일이 과연 꼭 해야 할 가치가 있는지 다시 손익을 따져 보았다. 몇 년 동안, 왜 꾸준하게도 이 일을 생각해 왔을까. 아니, 계획에 지배당해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 같은데, 무엇 때문일까. 액수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지금의 삶에 분명 감사하고 있었으면서도, 내가 겪은 피해를 보전하려는 배상금처럼 명명하는 것은 필시 모순이었다. 그것보다는 엄마의 인생을 망쳐 놓은 것에 대한 과징이라는 명분에 다시 집중했다. 그럼에도 이걸 받아내지, 뜯어내지 않는 건 왠지 나의 인생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복잡했다.
“네가 사실 자식 노릇을 해온 것은 아니잖아. 그래도 명분은 있대?”
누군가 따져 묻는다면 다툴 용의 또한 있다고 짧게 답했다. 그러면서도 순간 나는 알지도 못했던, 살아남은 자들끼리 이렇게 다퉈야만 하는 이유를 쉬이 찾지 못했다. 속이 점점 엉켜갔다.
6. 엄마의 두 번째 남편
자정 무렵 은미가 전화를 걸어왔다. 은미는 엄마의 몸이 점점 둔해진다는 얘길 전했다. 이제는 지팡이를 짚고 산책을 나가던 일도 거의 하지 못한다며, 여전히 네발로 기어다니고 있다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본인의 삶이 더 걱정이라는 한탄을 슬쩍 꺼내놓고 있었다. 앞으로가 무섭다고. 이 전셋집은 어떻게 되는 건지, 혹시나 혼자가 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문이 막혀버린 오빠에게 한다는 소리 하고는.
“넌…. 혹시 니네 아빠하고는 연락되니?”
“뭐래, 알잖아? 거기도 새장가 간 거.”
네발로 기어다니는 엄마를 상상했을 때, 그녀가 생전 처음으로 아파트라는 곳에 ‘니네 아빠’라는 같이 사람과 살면서 흥얼거리며 걸레질하던 풍경이 겹쳤다. 그 어렸던 나이에, 그 집의 전화번호를 잊지 않으려 애쓰던 ‘꼬맹이 우현’도 그려졌다. 친구들은 과자를 사려 들고 다녔던 동전을, 꼬박꼬박 아껴 모아 공중전화에 쓰던 전지적 시점의 그림도 함께. 그 전화번호는 내 평생의 비밀번호가 되었다.
엄마가 재혼했던 것은 내가 여섯 살 무렵이었다. 아버지와 이혼을 한 후, 자리를 조금 옮겨 운영하던 그 광산다방에서 번듯한 은행원이었던 두 번째 남편을 만났다. 그러고는 이듬해 은미를 아주 어렵게 나았다고 했다. 예정일을 며칠 앞두고 찾아온 극도의 임신중독으로 어쩔 수 없이 제왕절개를 했는데, 엄마는 나를 먼저 제왕절개로 나은 터라 둘째만큼은, 아니 그 남편과의 첫째만큼은 자연분만하고 싶었노라 했다.
“인생이 거기서부터 제대로 꼬인 게 아닐까 싶어. 그래서 니 동생이 가끔 참 미워.”
언젠가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당시의 엄마와는 아주 가끔 밖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미안함의 발로였는지, ‘메이커 운동화’ 같은 것들을 내게 안겼다. 새아버지는 나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내가 그의 눈앞에 있지 않는 것이 모두가 편한 길이었다.
아버지라는 존재를 능동적으로 완전히 지워버리고, 어머니의 삶에서 수동적으로 거의 완벽하게 지워졌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부모라는 개념은 그 존재감이 아주 미약했다. 외할머니와 외삼촌들, 양육과 부양이라는 의무적인 개념만이 존재했던 가정에서 그냥 그렇게 살아왔다. 나를 이렇게 키운 그들에게 아주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만, 아주 건조하게 이야기하면 사실 각자가 최소한의 역할을 수행해 내는 것도 무척이나 버거웠다.
평온할 수 있었던 엄마의 서른 중반 이후의 삶은, 점점 두 번째 시어머니의 잔소리와 핀잔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 번 갔다 온 이혼녀 며느리라는 설정도 미워 죽겠는데, 첫 손주가 딸이니. 엄마는 은행원 아들에게 기생하는 벌레처럼 취급되는 심정이었노라 했다.
그녀는 재혼하자마자 그 다방 일을 접고는, 은미를 낳을 때까지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찾은 일이 집 근처 사회복지관의 사무직이었다. 그리고 그즈음 다행스럽게도 둘째, 엄마 처지에선 셋째를 갖게 되었다. 임신 5개월경 의사가 알려준 성별은 모두가 기다리던 ‘아들’이었다. 시댁에서의 대우며, 하는 일이며 모든 것이 점점 나아지던 그때 일이 터졌다.
복지관에서 지내던 노숙인 하나가 술에 취해서는 칼을 들고 난동을 부렸다고 했다. 그러고는 로비에 불을 질렀다. 꼭대기 층의 가장 안쪽 사무실에서, 가장 엉거주춤한 자세로 대피하던 엄마는 결국 그 일로 뱃속의 아이를 잃었다. 이번에는 꼭 자연분만하겠노라 조심하며, 열심히 몸을 만들던 그녀였는데 말이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은미 아빠의 온 집안은 합심해서 엄마를 쫓아내고야 말았다.
“엄마가 잘못한 게 참 많나 봐, 아들. 세상이 나한테만 왜 이렇게 야박하니.”
당신이 일하던 사회복지관에서 얼마간 신세를 지며 엄마는 그 이후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술을 마시는 것이 직업이 되는 길을 택했다. 외할머니는 자주, 당신의 딸이 ‘스스로를 놔버렸다’라고 했다.
“나는 ‘신이 여기에 데려다 놓았다’라는 문장을 좋아해. 아마 신이 엄마도 거기에 데려다 놓았겠지.”
전화로 수연에게 엄마 이야기를 늘어놓던 나는 억지로나마 화제를 돌리려 했다. 약간의 부끄러움이 느껴졌던 찰나였다.
“글쎄. 나는 운명론을 믿어. 살면서 좌회전도 했다가 우회전도 했다가 어떤 작은 발자국으로 이뤄진 선을 그리면서 살아왔는데 지금 내가 네 옆에 있을 수 있는 건 그 십 년 전의 좌회전 한 번. 이십 년 전의 유 턴 한번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때 작은 조건 하나가 달라졌다면 나는 여기에 있지 않겠지.”
지금의 나는 그러한 부모 밑, 그러한 가정 안에서 키워져 왔기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다소 척박하고 투박하며 건조한 공간이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과물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감사하는 편에 가까웠다. 살기 퍽퍽하니 제도권에서 요구하는 학업이란 것을 나름 열심히 했을 거고, 그래서 꽤 괜찮은 대학에 진학했을 것이다. 이후에도 먹고 살기 어려웠으니 그렇게 힘든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정도의 생존력 따위는 쉬이 체득했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이 정도의 월급은 받는 직업을 쟁취해 냈을 것이다. 대신 그 과정에서는, 결국 내가 내 것을 먼저 포기할 때 모두가 편해지며 행복의 총량이 늘어나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별 얘길 다하지?”
“재밌는데? 역시 뭔가가 결핍되어야 인생이 전반적으로 액티브 하다니까.”
“그거 칭찬이니, 흉이니?”
7. 엄마의 첫 번째 남편, 나의 아버지
그곳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을지 모르겠다. 아버지와 엄마가 만난 것도 역시 광산다방에서였다. 엄마는 스물다섯이 꽉 찼을 무렵, 상고 동창 둘과 함께 서울 옛 미아리 인근에서 다방을 내었다. 외할머니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촌스럽게 왜 광산이었어? 좀 세련되게 영어 같은 거 쓸 수 있었잖아?”
‘광산’은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외할머니의 본관이었다. 개업할 때 상호를 짓는 역할은 그나마 돈을 가장 많이 보탰던 엄마의 몫이었노라 했다.
“살짝 즉흥적이긴 했는데, 그렇다고 생각 없이 지은 건 또 아니지.”
본인의 본관도 아니던 그 촌스러운 두 글자를 다방의 상호로 지었던 건, 그래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했다.
유년의 그녀는 무척이나 영특한 아이였다고 했다. 국민학교를 다닐 때부터 광주에서는 유명한 명필이었다. 세 살 때 한글을 떼었고, 예닐곱 살 또래들이 한글을 배울 시기에 명조체로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서예나 미술 솜씨는 웬만한 어른 못지않았다. 할아버지를 따라 자주 전학을 다녔지만, 국민학교, 중학교 어딜 가든 항상 수석이었다.
할아버지는 옛날 사람답게 딸이 그렇게 성장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술을 마실 돈이 필요했고, 잡기雜技를 하러 다닐 밑천이 필요했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엄마가 그래서 타협한 결론이 ‘상고’라 했다. 나가서 돈이나 벌어오라는 그의 명령이 아주 조금 유예된 셈이었다.
“니 할아버지가 나한테 그랬다니까. 병적으로 야망이 큰 년이라고. 목소리 크게 내는 년들은 전부 망할 거라고. 내 앞에서는 넌 항상 속삭이라고.”
그 문장들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마주한 날에도 들은 바 있다. 첫 배우자에 대한 험담과 비난을 늘어놓던 그는 우선 아들의 마음이 그녀에게로 향했다는 사실 자체에 분노했다. 게다가 아버지는 엄마가 두 번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장인이 언급했던, 그 여성으로서 품었던 독한 야망’ 덕택에 두 번째도 실패한 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밑바닥에서 굴러먹던 년한테 대학이 가당키나 하니?”
스물여덟에 엄마가 아버지를 선택하면서, 엄마는 분명 약속을 받아냈던 것이 있었다고 했었다. 그게 어디든, 기간이 길든 짧든 ‘대학생’이 되어 무언가를 배워보겠다고. 비록 다방을 운영하며 막일하는 남자들에게까지 웃음을 흘리고는 있었지만, 분명 그녀는 스스로가 조금이나마 더 쓰임 많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리고 당시 젊은 나이에 개인택시를 몰 정도로 여유가 있었던 아버지는, 가장 적극적으로 엄마의 의지를 지원해 줄 수 있는 연인처럼 행세했다. 엄마를 소유하고 난 뒤 그 태도가 금세 바뀌었지만 말이다. 농업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남편보다 더 똑똑해서 무엇에 쓰겠냐는 자격지심, 천한 계집에게 그러한 배움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멸시, 그리고 비난과 폭언, 물리적인 폭력. 그것들이 부부 관계의 기본값이 되었다.
“다방은 니 할머니 본관에서 딴 거야. 내 건 니 할아버지한테서 온 거니까. 그리고 ‘경주다방’은 ‘광산다방’보다 훨씬 이상하잖아.”
엄마에게 다방의 이름이란 건, 그나마 여성으로서 스스로 일어나 보겠다는 일종의 선언이자 상징인 셈이었다. 어쩌면 이름을 부여하는 일이 해방의 첫 단계라는 걸 선험적으로 깨우치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호명呼名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것은 분명 중요한 단계’라 했던 여성학자의 말처럼. 페미니즘이란 것이 어디 요즘만의, 그리고 젊은 여자들만의 연대기일까.
남자들에게 의존하지 않기를 바라며 전국을 떠돌았지만 엄마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치를 떨었지만 어쩔 수 없이 남자들의 옆에 앉는 생활이 계속되었다고 했다. 그게 싫어 어쩔 수 없이 남자를 선택하면, 그녀의 세계를 짓밟고 마는 억압과 폭력에 삶이 더욱 피폐해졌다. 게다가 온전히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보려 하면 할수록 남들에게 피해를 주고는 실패만을 마주했다. 그녀의 실패를 떠안는 건 대부분 나의 몫이었다. 팔도를 돌아다니며 도주와 정착을 반복한, 그렇지만 무언가에 쫓기는 듯 느껴진 당신의 인생은 결국 이 잠실의 옥탑방으로 수렴했고, 그녀는 그곳에 뿌리를 박고 죽을 기세로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발인 날 아침, 일찍 눈을 뜨지 못한 나는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늦게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겠지만 너무 피곤하기도 했거니와, 충동적으로는 일찍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택시 대신, 한참을 돌아가는 버스를 택했다.
기다리라지 뭐.
그러다 한 여고 근처 정류장에서 사람들이 몰려 탔다. 빈자리는 금세 전부 메워졌는데,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학생 하나가 내 옆자리를 차지했다. 앞에는 무척 피곤해 보이는 그녀의 엄마가 서서 영어 문제집의 진도에 대해 시끄러이 열띤 설교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둘의 관계가 확인되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내 자리를 그 중년 여성에게 양보했다. 유난히 힘이 들었고 장례식장까지는 한참을 더 가야 했으며 심지어는 그럴 필요도 없었지만, 나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며 출구 쪽에서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 쪽을 택했다. 인생의 주인공이 나냐고? 부디 나를 위한 인생을 살고 싶다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거의 운명에 가깝다는 생각에, 미친놈처럼 헛웃음이 나기 시작했다.
8. 엄마와 나, 그리고 모든 이들
이 정도면 아들로서 해야 할 노릇은 다 한 것이 아닐까.
화장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1시간 20분 정도라고 했다. 유족을 위한 대기실이 있었지만, 그 긴 시간 동안 새어머니를 마주하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화장터 옥상의 정원과 흡연구역을 계속 오가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마침, 지난번 연결되었던 변호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새어머니랑 방금 통화했어요. 그렇게 꽉 막히신 분은 아니던데?”
수골실에서도 역시나 새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다. 변호사는 분명 내 계획을 잘 전달했다고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녀가 어떻게 할 것인지를 먼저 묻는 건 더 이상해 보였다. 모든 절차가 끝난 뒤 뒷짐을 지며 앞서 걷던 그녀는 갑자기 뒤를 돌아 나를 향했다.
“타이밍이라는 게 참, 당황스럽긴 해요. 지금 살고 있는 곳은 나한테 중요하기도 하고.”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녀의 생각과 상황 모두가 이해되는 듯했다. 누가 뭐래도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내 남자에 대한 애정과 의리, 유산을 나누려면 지금의 집은 팔아야 할 텐데 그와의 추억을 지키고 싶다는 의지, 마지막으로는 변호사가 비인간적으로다 꼭 남편이 타들어 가던 그 순간에 전화해야 했냐는 질책까지를 훌륭하게 담아내는 문장이었다.
“그래도 그대 입장, 이해는 해요.”
이날은 엄마의 담당 의사와 상담이 예정되어 있기도 했다. 그 시간을 맞추려면 길게 대화할 여유가 없었고 서둘러 출발해야 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나는 용기를 내어 그녀와 눈을 맞추며 최대한 천천히, 그리고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죄송하긴 하네요.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긴 했지만, 이렇게 할 필요가 있기도 해서.”
그게 나름의 엔딩이라고 생각했는지 추모 공원에서 빠져나와 택시를 잡아타면서부터는 맥이 풀리기 시작했다. 허기가 졌다. 3일 동안 거의 먹은 것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죄송하다고 인사할 것까진 아니었을 텐데. 그래도 할 건 다 하지 않았나. 죄인이라 느낄 필요가 없다고 수차례 되뇌었음에도 나는 수사망이 좁혀 오는 범죄자가 된 것처럼 불안했다. 그렇게 초조해지다가도 순간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멍해졌다. 시선은 자주 초점을 잃었다. 무언가가 강렬하게 몰아친 이후 찾아온 ‘번아웃Burnout’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의사를 무슨 정신으로 만났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집으로 겨우 돌아와서는 그 어느 때보다 길게 잠에 빠져들었다.
수연을 만난 건 다음 날 저녁이었다. 오후 여섯 시경, 변호사의 사무실에 들러 목소리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댄디한 그의 실물을 처음으로 확인하고 난 직후였다. 어둠이 점차 내려앉던 한강 변의 둔치에서 맥주를 따며 수연에게 가방을 열어 보였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안내’라고 적힌 책자 하나와, 투명한 클리어 파일에 담긴 은행 입금증이 들어 있었다. 보내는 사람의 이름에는, 빈소에서 처음 알게 되었던 새어머니의 것이 찍혀 있었다. 2억 5천만 원짜리였다.
파편적으로 남아있던 기억을 조합해 보면, 엄마의 담당 의사는 전날 나에게 호스피스를 권했다. 아시겠지만 더 이상의 임상은 버틸 수 있는 몸이 아니라며. 그리고 그렇게까지 제약회사를 바꿔가며 오랫동안 임상을 해온 환자도 없었다며. 어머님이 교회에 다니시는 걸로 아는데 그런 영적인 믿음을 가지고 계신 분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더 큰 도움이 된다며.
“기자님 정도 되시면 잘 아시잖아요, 이게 품위를 지키는 일이라는 걸.”
리포트를 한 적이 있어 아주 잘 알고 있노라 대답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것이 존엄하게 삶을 마감하는 방법의 하나라는 기사를 쓴 적이 있는 마당에, 의사에게 화를 내는 건 옳지 않았다. 진지하게 의논해 보겠다는 말을 전혀 진지하지 않게 던지고 병원을 나왔다.
“새어머니하고는 이거 받고 그냥 없던 일로 하기로 했어.”
“그분은 그 돈이 어디서 나셨대?”
변호사는, 새어머니의 혼자 된 동생이 얼마 전에 받아 놓은 퇴직금 일부를 내어놓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누나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는데 혼자가 된 그녀가 걱정스러운 나머지 같이 지내기로 했단다. 집값이야 많이 올랐지만 새어머니는 그 아파트를 팔아 떠나버리고 싶지는 않아하셨다며, 그녀가 직접 이 방법을 제안했다고 전했다.
“어머니가 이걸 받으실까?”
“모르지, 뭐. 은미한테 남겨주실 수도 있을 거고.”
이젠 이 이후의 모든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오랜 기간 계획했던 대로의 끝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성취감 없이 너무 힘들었고, 달콤하기는커녕 씁쓸했으며 헛웃음 대신 한숨과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 돈을 집행하는 일은 염두에 둔 적이 없었다. 물론 엄마는 그 돈을 어디 가서 펑펑 써 댈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지만, 그것까지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은 채 철저히 당신만을 생각하며 남은 인생을 소화해 주기를 바랐다. 나는 호스피스 안내 책자를 꺼내 한참을 넘겨 보다, 가방의 안쪽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비닐로 코팅되어 있던 표지가 독한 냄새를 풍기며 타올랐다.
“의사 말이 처음엔 누구나 분노하면서 거부하는 단계를 거치는데, 종교가 있는 사람이면 설득이 더 잘된다는 거야. 그렇지만 그렇게 영적으로 충만한 삶으로 마무리하면 또 뭐 하겠어. 우리 엄마, 그렇게 착해 빠진 사람 아닌 거 알잖아. 명품 엄청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다만 며칠이라도 그 돈 가지고 어디 가서 비싼 술 마시고 싶은 만큼 마시고, 사고 싶은 거 다 사면서 차라리 즐겁게 보내면 좋겠어.”
“‘탕진잼’이네. 이제 좀 너 같다.”
금세 타버린 책이 재가 되어 조금씩 흩날리고 있었다. 아비의 몸도 저리 탔고, 어미의 것도 곧 저렇게 부서질 것이다. 의식의 흐름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찰나의 순간에 나는 아이를 낳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무도 찾지 않았던 빈소에 외로이 웃고 있던 아버지의 영정, 징그럽게 낡아버린 엄마의 검은 등짝, 화장로의 불길, 돌아서며 입술을 깨물던 새어머니의 외로움과 분노까지. 한 번 경험한 미래, 그 과거이자 미래이기도 한 이미지들이 머릿속에 한꺼번에 몰려왔다.
“아이가 있으면 좋겠어. 내가 나중에 어떤 식으로 잘못되든, 나를 위해 마땅히 희생해 줄 수 있는.”
“그래, 너처럼만 키울 자신 있으면. 그런데 너처럼 크려면 너처럼 힘들어야 하는 거 아닐까?”
수연은 내가 아마 나의 2세에게 그 고초를 겪도록 순순히 놔두지는 않을 거라 활짝 웃으며 말하고는, 내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을 슬쩍 닦아 주었다. 둔치의 바람이 묻어 있던 그 엄지의 촉감이 정말 오래 잊히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벌써 자정을 향하고 있었다. 휴가의 마지막 날인 내일엔 부디 일찍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랐다.
엄마를 서둘러 만나고 싶었다. 내 오른 다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끝>
2019. 6.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