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중년 남성의 생존 가능성에 부쳐 - 수오지심(羞惡之心)
인사철입니다. 인사철과는 무관한 인생을 살고 있기는 하지만.
과거 직장에서 동기가 ‘부장’을 달았다는 이야기를, 몇몇 후배들을 통해서 전해 들었습니다. 동기로서 자랑할 만한 실력의 형이었고, 훌륭한 동지이기도 했으니 멀리서나마 박수를 보냈습니다. 3년 차이의 절친 선배는 국장을 달았습니다. 그 역시 오랜만에 먼저 연락을 하여 앞날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남아있었더라면 저도 승진을 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그러지 않았을까요. 아니다, 사실 세상일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요. 겸손하게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승진이라는 과정과 관리자의 덕목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고민해 봅니다. 쓸데없는 고민처럼 보이지만, 분명 쓸모 있는 지점도 있을 겁니다.
큰 방송사 안에 있을 때, 직급이 올라가는 과정은 구성원 모두에게 꽤 인간적이었습니다. 한국적이라고 할까요. 당연히 승진의 기준은 연차인데, 대부분은 규정의 기간을 채우면 대상이 되었고, 한 해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 한 계단 올라간 직함을 받았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차장 대우와 차장 모두 수월하게 달았습니다. 간혹 ‘저 사람은 되면 안 되는데’ 싶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 역시 꾸역꾸역 승진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적’이라는 단어 대신에 한국적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관리자, 보직자가 되는 길은 조금 더 까다로울 수 있습니다. 팀장, CP 등으로 일컬어지는 자리입니다. PD들이야 하나의 프로그램을 맡게 되면 거느리는 인력이 적게는 십수 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까지도 가니 항상 리더로서, 그리고 관리자로서 사유하고 행위해야 합니다만... 직원들만을 거느리는 보직자가 되면 챙겨야 하는 인력이 그보다도 더 적을 수는 있습니다. 신기한 건, 그들 중에는 깜냥이 안 되는 사람들이 항상, 언제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기업의 관리자들에게 제가 늘 기대했었던, 그러나 항상 결핍이었다고 느꼈던 지점은, ‘리더십 / 지도력’이라는 부분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제가 가장 바랐던 것 중 하나는 ‘羞惡之心’이라는 단어와 가장 가깝습니다. 여러분의 직장에서는 어떠신가요?
예전 회사에서, 윗사람과 많이 다퉜습니다. 퇴사에 영향을 주었다고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퇴사 직전의 프로젝트에서 가장 많이 싸웠습니다. 실무의 입장에서는 부당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지시들이 몇 건 있었고,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줬습니다. 허나 때로는 그 지시조차도 번복되는 일이 잦았고 지시를 받아 지시해야 하는 중간자 위치에서는 말 그대로 ‘욕받이’가 되어야 했었습니다.
일련의 일들 속에서 가장 많이 화가 났던 지점은 그런 지시를 내린 사람들이 ‘부끄러워할 줄 모르더라’라는 점이었습니다. 형식적인 사과조차 받기 어려웠습니다. 위치를 바꿔 만약 제가 그랬다면 저는 얼굴을 들지 못하고 다녔을 것이란 생각을 수도 없이 했더랬습니다. 후배 보기 민망하지도 않은가, 저렇게 부역하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속내를 털어놨던 상급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옮기고 보니, 작은 회사에서는 명확한 지도력 / 리더십이 지금의 저 같은 관리자에게 가장 크게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반면, 물론 큰 회사에서 역시 그것이 중요치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얽히고설키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리고 하이어러키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하지(恥, shame)의 감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사소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얼굴이 붉어지는 작은 감정 정도를 넘어, 사실 이 감정은 동아시아 문화권 전체를 움직이는 거대한 무언(無言)의 질서로 알려져 있죠. 일본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말한 <국화와 칼>에서 말한 것처럼, 이는 법이나 종교보다 먼저 사람들의 행동을 규율하는 오래된 감정의 기원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 문화는 일본만의 것이 아니지요. 우리의 것 전반에서도 ‘남의 눈’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살아 움직입니다.
하지(shame)의 문화는 죄(guilty)의 문화와 다릅니다. 죄의 문화가 ‘내면의 기준’을 기준으로 스스로를 평가한다면, 하지의 문화는 ‘타인의 시선’을 기준으로 행동을 조절한다고 했습니다.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라는 질문이 행동의 시작점이 되고, 때로는 끝점이 됩니다. 우리는, 저는 어릴 때부터 이 질문 속에서 자라왔고, 타인의 시선을 늘 먼저 체크하게끔 '인장' 되었달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이 크다는 핑계로, 세월이 그만치 흘렀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방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저 같은 관리자가 나아가야 할 길은 이 부끄러움의 정서적 기술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둘 것인가를 다시 정하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눈을 제일의 기준으로 되돌려놓는 일... 뻔뻔해지겠다는 뜻이 당연히 아닙니다. 오히려 더 챙겨야겠다는 뜻에 한결 가깝겠지요. 부끄러움은 저를 작게 만들기 위한 감정이 아니라 더 깊고 단단하게 세우기 위한, 아주 오래된 마음의 방식일 테니까요. 출세를 위해서든 아니든, 저는 이 감정의 기술이 지금보다 최소한 둔탁해지지 않는다면 좋겠습니다.
2025. 1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