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열이 나는 핑크에게 타이레놀을 먹여 데이케어에 보냈다. 점심을 먹고 집에 돌아올 때까지 최대한 회사일을 해둬야 한다. 핑크가 돌아오면 아이들이 모두 잠드는 밤 9시까지 일에 손도 못 댈 가능성이 크다. 시간이 난다 해도 자투리 시간뿐이다. 다행히 모르는 걸 찾아보고 복잡한 개념을 공부해야 하는, 오랜 시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흐트러짐 없이 집중해야 하는 일은 어제 다 해뒀다. 오늘부터는 뇌보다는 손을 바삐 움직이면 된다. 며칠 잠을 많이 못 잔 데다가 자투리 시간밖에 낼 수 없어도 할 수 있는 일들이란 얘기다. 애들을 데이케어에 데려다주고 돌아와 재킷도 벗지 않은 채 책상에 앉아 열두 시 넘어까지 내리 회사일을 했다. 함께 재택근무하는 남편이 날 보고 춥냐고 물었다. "아니. 그냥 왠지 이거 벗을 맘이 안 생기네."
오후 한시쯤 데이케어에서 돌아온 핑크는 힘이 없고 볼이 발그레했다. 열이 많이 나는 모양이었다. 약을 먹여도 38.5도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걱정이 되지만 이렇게 하루이틀 열만 나는 정도로는 소아과에 데려가봐야 아무것도 안 해줄 거다. 미국 소아과는 그런 곳이다. 내가 지금 꽁지에 불붙은 듯 일하는 상황인 줄 아는 남편이 애는 자기가 볼 테니 날더러 들어가서 일을 하라 했다. 그러나 몸이 안 좋은 핑크가 자꾸 날 찾았다. 힘들 때 엄마를 찾는 건 아이들의 생존본능이란다. 어차피 핑크가 집에 오면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일도 못 하는 김에 남편과 점심을 차려 먹었다. 평소라면 오후 두세 시나 되어서 각자 고픈 배를 쥐고 기어 나와 주섬주섬 냉장고 털이나 할 것을.
데이케어에서 분명 점심을 먹고 왔을 텐데 핑크는 나와 남편 옆에 앉아 치킨 너겟을 마냥 집어먹었다. 그러더니 이내 피곤하다며 낮잠을 자고 싶다 했다. 남편이 나서 본인이 핑크를 재울 테니 날더러 가서 일하라 말했지만, 핑크가 나서 본인은 엄마랑 자겠노라 선언했다. 아빠가 씁쓸히 본인 방으로 돌아갔다. 난 노트북을 가져와 핑크 침대에 엎드렸다. "엄마는 여기서 일할게, 핑크는 이제 자." 자기가 잠들면 엄마는 나갈 거냐고 묻는 핑크에게 나가지 않을 거라고 거짓말을 했다. 안심하는 표정으로 핑크는 눈을 감았다. 여전히 열은 39도 언저리. 핑크가 잠이 들자 일하는 남편을 불러 핑크 방에 줌 미팅을 연결해 달라 부탁했다. 내 책상으로 돌아가 핑크가 잠자는 모습을 줌 미팅으로 지켜볼 생각이었다. 남편이 곧 셋업을 마쳤고 우리는 각자 책상으로 돌아가 회사일을 시작했다.
난 일할 때 듀얼 모니터를 쓴다. 모니터 하나에 핑크가 자고 있는 화면을 가득 띄웠다. 불편하지만 다른 모든 창들은 남은 하나의 모니터에 모두 구겨 넣었다. 핑크가 자는 화면을 주시하는 걸 까먹으면 안 된다, 까먹으면 안 된다, 마음속으로 되뇌이며 회사일을 시작했다. 경기를 잘 하는 아이를 둔 엄마가 안고 사는 불안이다. 핑크 방에서 작은 소리만 나면 남편이 일하다 말고 일어나 핑크의 체온을 체크하러 가곤 했다. "몇 도야?" 큰 소리로 물으면 담담히 돌아오는 대답. "똑같아, 39도." 서로 말은 안 하지만 남편도 나도 핑크를 지켜보는 마음이 무겁고 불안하다. 그런데도 아픈 애를 옆방에 눕혀두고 죽어라 회사일을 하고 있다. 일 안 하면 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있나. 우린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오후 네 시가 다 되자 핑크가 일어났다. 아빠와 그림을 그리고 좀 노는가 싶더니 포동이를 픽업하는 데 따라가겠다고 일어섰다. 남편은 집에 두고 가고 싶어 했지만 핑크가 굳이 따라가고 싶어 했다. 우리 집에선 핑크가 왕이다. 왕께서 심지어 몸이 편찮으시니 심기를 거스르려 하는 이가 없다. 핑크를 데리고 나가는 남편이 입을 삐죽거렸다. 난 저녁 준비를 했다. 다섯 시 반쯤, 다들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 시간은 생각보다 금방 간다. 하는 일은 별 게 없다. 애들을 씻기고 옷 갈아입히고 먹이고 양치시키고 조금 놀아주고. 그것만 하는데도 3시간이 지나고 잘 시간이 된다. 아이들은 한 방에서 잔다. 나와 남편은 하루씩 번갈아가며 아이들을 방에 데리고 들어가 재운다. 남은 한 사람은 어질러진 집안을 정리한다. 어느 쪽이든 일을 끝내고 나면 아홉 시 반 정도가 된다.
오늘은 남편이 자기가 아이들도 재우고 집안 정리도 하겠노라 했다. 날더러는 들어가서 일을 하라고. 남편이 아니었음 난 진작에 일을 관뒀을 것이다. 남편은 내가 일하는 걸 자랑스러워하고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늘 안간힘을 쓴다. 집안의 수입원을 사수하기 위해 그런다 하기에는 도가 지나친 느낌이다. 내가 뭘 회사에서 조금이라도 잘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날 하루가 본인에게 아무리 힘든 하루였어도 그래도 내 덕분에 기분이 좋았다고 말한다. 난 그 마음이 다 이해가 안 간다. 그런 남편이니까 자기보다 가방끈 길고 나이도 더 많은 나와 거부감 없이 결혼해줬나 보다. 난 남편이 학계에서 많이 보는 답답하고 머리 아파지는 남자가 아니라서 좋았다.
남편이 그렇게까지 도와주는 데도 조금만 더 하면 다 할 줄 알았던 일은 도무지 끝나지를 않고 핑크의 열도 계속 떨어지지 않았다. 씻기도 포기하고 일에 매달렸지만 어느 순간 아직 하루의 시간은 족히 더 필요함이 분명해졌다. 어디에선가는 일을 끊어야 한다, 그래, 여기까지면 오늘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한 거야, 생각이 들어 마침내 책상에서 일어섰다. 새벽 1시가 가까웠다. 아이들을 재우고 집정리도 마친 남편이 소파에 앉아있었다. 남편에게 경과를 보고하고, 아무래도 나 너무 힘들어서 일을 때려치든가 해야겠다고 맘에도 없는 소리로 어리광을 부렸다. 그러자 남편 왈,
"Welcome to my world! 나도 지난번에 너무 힘들어서 자기한테 똑같은 소리를 했거든. 근데 그때 자기가 나한테 뭐라 그랬었는지 알아? 나도 똑같이 말해줘 볼게 들어 봐. '난 그래도 자기가 잘할 거라고 믿어. 이제껏 쭉 지켜봤는데 자기는 그렇게 말은 해도 끝에는 다 잘해 내더라고.' "
"참 나." 난 나름 남편을 향한 나의 믿음을 보여준다는 의미로 한 말이었는데, 이렇게 들으니 이 상황에 듣고 싶은 말은 아니네. 모쪼록 고맙다 남편. 자기도 코피 터지게 바쁘고 힘들면서 나 이렇게 많이 도와줘서. 난 자기 바쁠 때 회사일 바쁘면 다냐고 바가지만 긁었던 것 같은데. 우리 이번에는 부디 핑크 데리고 입원하게 되는 일만 없게 해달라고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