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팬이 하나 있다
남편이다
남편은 내가 쓰는 글의 팬이다
대학 졸업할 무렵 만들었던 내 블로그가 하나 있다
방치돼 있었던 때가 아니었던 때보다 훨씬 많지만
시간이 오래되다 보니 그래도 꽤 많은 글들이 쌓였다
결혼할 무렵 남편에게 공개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뜨거웠다
공대생보다 더 공대생 같은 와이프에게 색다른 면을 발견할 때마다
남편은 기뻐하는 듯하다
내가 피아노를 친다는 걸 알았을 때도 그러했다
매일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다시 블로그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자
누구보다 남편이 제일 좋아했다
남편한테도 보여줄 만한 글을 쓴 것 같은 날이면 읽어보라고 주는데
그럼 혼자 낄낄거리고 읽으며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다
내 아이디로 들어가 읽어놓고는 좋아요를 눌러 놔 곤란했던 적도 있다
요즘 본인도 자극을 받았는지 부쩍 일기를 열심히 쓰는 것 같다
얼마 전 내 블로그의 새 글을 본 남편이 내게 말했다
자기는 정말 글을 잘 쓰는 것 같아. 내 일기장 보잖아? 날짜만 다르지, 글이 맨날 똑같아.
아 오늘은 진짜 힘들었다. 진짜 죽을 것 같다. 그래도 화이팅! 아 오늘은 진짜 진짜 힘들었다. 진짜 쓰러질 것 같다.
이게 다야. 재미가 하나도 없어.
하하하 아 그래?
재밌다는 듯이 받아치고 그 뒷말은 하지 못했는데
자기야 그거 알아?
자기.. 말도 그렇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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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랑 영화를 보고 나서 어땠냐 물으면
어 재밌었어
친구들을 만나 저녁을 먹고 들어왔길래 어땠냐 물으면
어 별거 없었어
너무 지치고 힘들어 보여서 오늘은 또 무슨 일 있냐 물으면
아 일이 너무 힘들어 죽을 것 같아
철옹성 같은 이에게서 디테일한 이야기를 끌어내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같이 밥을 먹으려고 앉으면
재밌는 얘기, 아무거나 생각나는 얘기를 해달라고 조른다
처음엔 많이 힘들어하더니
요즘엔 그래도 제법 이야깃거리를 찾아낸다
그리고는 묻는다
이런 얘기가 재밌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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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주말이면 핑크(첫째, 딸) 친구들 생일 파티에 다닌다
3살짜리가 나보다 사회생활을 더 많이 한다
사실 대부분 얼굴도 이름도 처음 보는 아이들이다
생일파티에 가서 내 이름을 대고 핑크 엄마라 소개하면
아 핑크 어머니시구나. 우리 애한테 얘기 정말 많이 들었어요. 집에 오면 맨날 핑크 핑크..
의아하다
난 저 집 애 이름을 생일초대장을 받고서야 처음 알았다
못 들어본 이름이라 생일파티도 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는데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네
그렇게 해서 알게 되었다
핑크는 집에 돌아와 데이케어에서 있었던 일을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를 끌어내보려 질문을 해봐도 마찬가지다
핑크야 오늘 데이케어에서 어땠어?
Hmm... Good!
핑크야 오늘 데이케어에서 뭐했어?
Hmm... I don't know. 엄마! 책(읽어줘)!
핑크야 너 오늘 주니랑 데이케어에서 아이스크림 만들고 놀았다며? 재미있었겠다.
Hmm... 아니. 어제. (장난감 찾아 떠나감)
아 이 답답한 느낌
익숙한 느낌
남편과 꼭 닮은 딸을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