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장 가깝고 오랜 취미는 TV 보기다
어릴 적 첫 기억은 베리사이유의 장미 만화영화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다
온 동네 아이들이 만나면 죄다 그 얘기였다
함께 만화 주제가를 즐겨 불렀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 방영시간만을 기다렸다
고등학생 때는 화장실 가는 시간, 급식 먹는 시간도 아껴가며 공부를 했다
되돌아보면 그럴 필요까지 있었나 싶다
당시의 나로서는 그만큼 비장하다는 각오의 표현이었다
그런 시절에도 TV는 꼭 챙겨봤다
밤 10시에 학교 야자가 끝나면 쏜살같이 통학용 봉고차로 뛰어갔다
봉고차에 달려있는 TV로 10시부터 시작하는 드라마를 보기 위해서였다
집에 가까워지면 드라마가 끝날 즈음이 돼 있었다
봉고차에서 집까지 전속력으로 뛰어 들어가곤 했다
어떤 날은 엔딩장면을 볼 수 있었고 어떤 날은 볼 수 없었다
유학을 나와 외로이 살며 위로가 되어준 것은 한국 드라마와 예능이었다
한국에 살던 친구들보다 더 열심히 한국 TV를 챙겨봤다
하루의 끝, 어둡고 고요한 집에 돌아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게 그뿐이었다
TV를 켜면 집에 온 기분이 들었다
본래 연말에는 팀원들 대부분이 휴가를 떠나며 회사일이 한가해지기 마련인데 2025년 말은 그렇지가 않았다
크리스마스 직전까지 무리해서 일을 했다
크리스마스부터 연초까지 이어지는 방학에는 온 식구가 콜로라도 덴버로 휴가를 다녀왔다
장롱에 숨겨둔 진주를 꺼내보듯 여행에서 오래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봄은 몹시 행복했으나
여행이 끝날 무렵 결국 체력적 정신적 한계가 왔다
소위 번아웃이라 하는
꽤 오랫동안 보지 않고 살던 한국 TV를 보기 시작했다
선재 업고 튀어, 언젠가는 슬기로울 의사생활, 이 사랑 통역 되나요
한 편을 보고 나면 헤어 나올 줄 알았던 것이 두 편이 되고 세 편이 됐다
드라마를 볼 때면 이보다 더 현실일 수 없는 내 현실에서 떠나 있을 수 있어서 좋았다
봤던 드라마 내용을 애써 복기하며 매일 밤 잠에 들었다
그렇게 TV에만 빠져 산 지 두 달이 넘었을까
이젠 TV에 좀 덜 매달리게 된다
제정신도 의욕도 돌아오고 다른 취미는 뭐가 있을까 슬금슬금 찾게도 된다
피아노도 치고 책도 보고 글도 써보고
TV에만 중독 돼 빠져 사는 모습이 스스로 자랑스럽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 말고는 위로가 되는 게 없었다
왠지 시간이 지나고 지나면 TV에 빠져 사는 이 시기도 끝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맘 편히 몸을 푹 담가버렸었다
이제 예전만큼 TV가 재미없는 걸 보니 마침내 끝이 나는 시기가 왔다 보다
장담은 못 하겠다
다시 TV에 빠지지 않을 거라는
아무렴 어떠냐
취미에 귀천이 있나
이 모두가 그저 내가 버티고 살게 해주는 수단이요 무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