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고 대화할 때 관계가 좋아진다
“상대의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세계관은 비로소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인식하는 모든 것은 지극히 세상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모두 절대적인 것처럼 상대에게 강요하지 마세요. 그러면 영원히 미완성의 삶을 살 뿐입니다”
“그녀에게 여자다움을 요구하지 마세요. 술은 세 잔 이상 주면 안 됩니다. 아무나 패거든요. 카페 가면 콜라나 주스 대신 커피를 드세요. 그녀가 때리면 아파도 안 아픈 척, 안 아파도 아픈 척 해보세요. 좋아할 거에요. 가끔 유치장 가는 것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해요. 마지막으로 그녀는 글 쓰는 걸 엄청 좋아해요. 칭찬 많이 해주세요.” 오래전 풋풋한 감동으로 우리를 설레게 했던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후반부 장면이다. 남자주인공인 ‘견우’가 여자주인공인 ‘그녀’의 맞선남에게 말해 준 규칙들이다.
첫 만남부터 매우 독특했던 ‘견우’와 ‘그녀’의 관계는 영화 내내 웃음을 자아냈다. 무엇보다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남자주인공 ‘견우’의 연애방식이다. 견우는 그녀가 하는 모든 행동과 제안, 부탁들을 스스럼없어 들어주었다. 심지어 그녀의 하이힐과 견우의 운동화를 바꾸어 신는 장면은 상상을 초월했던 것 같다. 견우가 그녀를 위해 보여준 행동들은 시청자의 시선에는 바보같이 보이지만 견우에게는 그녀를 향한 자신만의 사랑 방식이다. 상대의 ‘다름’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는 모습은 멍청하다기보다는 대단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것 같다.
영화의 엔딩에서 그녀가 왜 엽기적인 부탁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유가 드러난다. 그녀는 그럴 수밖에 없었고 그녀의 행동을 견우는 온전히 받아들였다. 견우 또한 그런 사람이다. 타인의 ‘다름’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 그래서 영화는 우리에게 더 큰 감동을 주었던 것 같다. ‘다름’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특성이다. 우리에게는 ‘다른 것’이 상대방에게는 ‘당연한 것’이 될 수 있다. 그것이 ‘다름’이 지닌 진짜 얼굴이다.
사람의 생각과 선호는 제각각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또한 다르다. 누군가는 스트레스가 쌓였을 때 땀을 흘리며 운동을 해야 풀린다. 다른 누군가는 친구와 가지는 술자리가 스트레스를 풀어준다. 누군가는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때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하지만 누군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면서 위로를 받는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행복한 순간을 만드는데, “그런 잘못됐어. 틀렸어” 하고 외치는 것은 옳지 않다. “넌 그렇게 해야 스트레스가 해소 되구나” “넌 그렇게 할 때 행복하구나” 이 한마디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름을 인정해야 서로의 좋은 방법을 도전하고 경험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우리의 생각, 가치관 그리고 세계관은 서로 다르다. 겹치고 비슷한 부분은 있을 수 있지만 완전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 속에서의 ‘서로 다름’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다름’이라는 것은 단지 ‘다르다’라는 의미지 ‘틀렸다’라는 뜻이 될 수는 없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다른 생각과 태도, 가치관 등을 받아들였을 때 우리의 세계관이 더욱 커지고 완성되어 갈 수 있다. 받아들인 만큼 커지는 것이다. 다름이 모여서 다양성을 이루듯 각기 다른 사람들이 다양하고 볼만한 세상을 만들어 가기 때문에 세상은 아름답게 존재한다.
우리는 논리적으로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감정적으로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는 더더욱 그렇다. 다름을 인정하기보다 우리의 생각에 상대방이 맞춰주기를 원할 때가 더 많다. 안타깝게도 부부싸움의 발생 원인 중 상당수는 상대방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에 가장 잘 맞춰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부부에게 필요한 것은 상대방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자신이 정해놓은 틀에 맞춰놓으려고 한다면 가장 가까운 사이가 곧 가장 먼 사이가 될지도 모른다.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한 가정에서 자녀가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면 아마도 자신의 다름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일 가능성이 있다. “넌 엄마와 아빠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어.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야. 그래야 네가 원하는 성공을 할 수가 있어. 넌 어려서 세상을 몰라. 널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엄마, 아빠잖니” 부모는 자식을 너무 사랑해서 이런 말들을 무심코 한다. 그리고는 부모가 원하는 틀에 자녀의 삶을 끼워 맞추려고 한다. 자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부모지만, 점점 자녀를 가장 모르는 사람이 되어갈 수도 있다. 자녀는 부모와 다른 자신의 모습이 존중되기를 간절히 원할 것이다.
가족이라서 다름이 거부 되어 왔다면 이제는 가족이라서 다름이 더욱 존중되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가족은 그 누구보다 가깝고 소중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가족은 물론 가까운 친구와 연인, 지인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그들의 다름을 존중해 줄 수 있다. 모처럼 친구들과 모였다. 한 친구의 옷차림새가 패션테러처럼 보인다고 굳이 이렇게 말할 필요는 없다. “너 옷차림이 왜 그래? 완전 아줌마 같아. 좀 세련되고 예쁘게 입지. 특히 그 모자는 뭐야. 완전 별로야” 이런 말을 들은 친구는 내색하지 않더라도 마음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친구의 옷차림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연인의 경우 가장 많은 갈등요소 중 하나는 연락을 주고받는 문제일 것이다. 한쪽 연인은 연락을 매일 자주 쉬지 않고 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다른 한쪽은 용건이 있을 때 연락을 하기를 원할 수 있다. 한쪽 연인은 연락을 자주 하지 않는 쪽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것이 잦은 다툼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좋아하는 마음의 크기는 정확하게 측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금 더 성숙한 연애를 위해서 ‘연락’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의 차이를 인정한다면 좋을 수도 있다.
직장 혹은 기타 모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도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꽤 중요한 일이다. 팀미팅 때 부하직원의 의견이 터무니없는 것으로 치부된다면 그 직원은 자신의 의견을 앞으로 말하기 힘들어진다. 매번 정확한 말을 툭툭 내뱉는 상사가 있다면 그를 괴짜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의 정확성을 인정할 필요도 있다. 자신의 자랑거리를 말하기 좋아하는 모임 회원이 있다면 ‘아, 저 사람은 저렇게 행복해하네.’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람은 제각기 다른 성향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에게 우리식을 강요할 때가 있다. 직장에서 상사와 부하직원이 서로 다른 입장을 이해하지 못할 때 마찰이 발생하는 경우다. 예를들어 이런 경우다.
팀장 : 지하 씨, ‘주상복합건물 경관조명 납품, 출시’건 자료정리를 오후 3까지는 보고 올려 주세요.
지하 : 팀장님, 그 자료정리는 재준 씨가 하기로 한 겁니다. 제 업무가 아닌데요.
팀장 : 알아요. 하지만 지금 재준 씨가 출장 가고 없잖아요. 공유 폴더에 작업하던 것이 있으니 완성할 수 있을 거예요.
지하 : 팀장님, 저는 다른 직원의 업무에 손대지 않아요. 그럼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소재가 불분명해지니까요. 그리고 제 업무도 많이 밀려 있는 상황이라 부담스럽습니다.
팀장 : 지하 씨는 우리 회사 직원 아닙니까? 니 업무, 내 업무가 어디 있어요? 모두 회사를 위한 업무인데 다 같이 노력해야죠. 사람이 왜 그렇게 이기적이고 융통성이 없죠?
지하 : (어쩔 수 없이 대답하며) 네, 제가 하겠습니다.
팀장과 부하직원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만 내세웠다. 결국, 팀장은 부하직원의 협력을 끌어낸 것이 아니라 억지로 업무를 떠넘길 수밖에 없었다.
직장에서 상사와 부하직원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면 마찰이 아닌 협력을 끌어낼 수 있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대화는 이렇다.
팀장 : 지하 씨, ‘주상복합건물 경관조명 납품, 출시’건 자료정리를 오후 3까지는 보고 올려 주세요.
지하 : 팀장님, 그 자료정리는 재준 씨가 하기로 한 겁니다. 제 업무가 아닌데요.
팀장 : 네, 알아요. 자신의 업무가 아닌데 맡기니, 하기 싫고 껄끄러울 거에요. 하지만 내일 계약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오후 3시까지 부장님께 보고 올려야 해요. 우리 회사를 위한 중요한 계약 건이라는 거 지하 씨도 잘 알죠?
지하 : 네, 다만 혹시나 문제가 생기면 책임소재가 불분명해질 수 있어서 그랬어요.
팀장 : 맞아요. 책임소재를 따지는 일이 생기면 부담되죠. 걱정하지 말아요. 지금처럼 중요한 순간에 지하 씨가 이렇게 도움을 주는데, 책임보다는 고마운 일이죠.
지하 : 네, 그럼 제가 마무리 지어서 보고 드릴게요.
팀장은 부하직원의 입장을 이해하고 긍정하는 반응을 보여주어서 자연스럽게 부하직원의 협력을 끌어낼 수 있었다. 부하직원도 자신의 의견을 줄이고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우리는 극히 일부만 알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타인의 다름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불교 경전인 열반경(涅槃經)에 이러한 것을 잘 알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코끼리를 만진 눈먼 장님들의 이야기다.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각자 코끼리의 생김새를 설명하는 것이다. 몸통을 만진 사람은 코끼리가 벽처럼 생겼다고 하고 다리를 만진 사람은 기둥처럼 생겼다고 한다. 머리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가 물항아리 같다고 하고 코끼리의 코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는 막대처럼 생겼다고 한다. 이렇게 각자 자신이 만진 것이 코끼리라고 믿는다. 자신의 말만을 주장하는 것이다.
누구도 틀리지는 않았다. 다만 각자 다른 부위를 만져봤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다른 부위를 만지고는 그것이 전체라고 굳게 믿는 그들만의 믿음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이렇다. 우리는 일부분을 알고도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생각이나 가치관의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세상의 다채로움과 다양성을 경험하기 힘들다. 장님들은 서로 다른 장님의 의견을 인정하고 수렴했을 때 전체 코끼리의 모습을 알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들의 생각과 가치관, 삶의 태도를 받아들였을 때 우리의 세계관은 더욱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팀 어시니(Tim Ursiny)와 바바라 A. 케이(Barbara A. Kay)는 그들의 저서『하이퍼포머의 변화 대처법』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운이 좋은 사람은 운이 없는 사람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운이 좋은 사람은 낙관적이고 마음이 열려있다. 그래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도전을 즐긴다. 하지만 운이 없는 사람은 걱정과 두려움이 많고 시야가 좁다. 그래서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한다” 세상에는 우리가 알아갈 것,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많다. 받아들임은 ‘서로 다름’과 ‘다양성’을 인정했을 때 가능해진다. 상대방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이해했을 때 우리의 관계는 변한다. 갈등과 다툼은 줄어들고 새로운 관심과 사랑이 생겨나는 것이다.
숫자 ‘0’과 ‘1’의 차이는 오직 하나다. 숫자 ‘0’은 어떤 수를 곱해도 0이 되지만, 숫자 ‘1’은 어떤 수를 곱해도 곱한 ‘그 숫자’가 된다. 숫자 ‘0’은 모든 숫자를 자신에게 맞추려 한다면 숫자 ‘1’은 자신이 다른 모든 숫자에 맞추려 한다. 그들의 모습 그대로 존재할 수 있게 허락해 준다. 그렇기에 숫자 ‘0’은 영원히 ‘0’의 모습으로만 존재하고 숫자 ‘1’은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다.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사람이란 숫자 ‘1’처럼 다른 사람의 모습이 되는 것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