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아찔함, 그리고 입술, 그 좁은 계단에서

by 해달

H는 왜 이러는지, 내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혼란스러워하는 나의 본질을 알고 그러는 것인가. 바보. 보여주리라. 나의 진짜 모습을. 아니, 숨겨진 나, 그 사람에게 들추어 내리라. 내가 무엇의 열등의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가. 그는, H 자신은 어떤 마음으로 나에게 다가왔는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을까? 불쑥 나타나 다가오는 듯 멀어지고, 다시 나와의 대화를 갈구하고, 내 옆에서 웃고, 그러다 무엇에 힘들어 억누르고. 그런 아무것도 정하지 않는, 어쩌면 못하는 H가 몹시 야속하고 원망스러웠다. 그렇지만 나는 이미 익숙해져 버렸다. 새벽까지 수화기 너머로 오고 간 의미 없지만, 의미로 가득했던 그런 이야기들.


11월이 싫어졌다. 11월은 지나치게 들뜨기 때문이다. 아마도 지난해 늦가을, 서초역에서 이어지는 중앙 도서관에서 들려왔던 그 가을, 웃음소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조디 포스터에 관한 얘기를 했다. H는 나에게 그녀를 왜 좋아하는지 물었고, 나는 그녀, 약간은 모자란 듯하지만 어쩔 수 없이 지적인 무언가가 느껴져 그렇게 끌려 나는 그녀를 좋아한다고 했다. 도서관에 들고 다녔던, 내 웹스터 영영사전의 커버는 그녀가 초록빛 비를 맞고 있는 장면이었다. 넬(Nell).


그 여름이 지나고, 나는 스스로 비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불쑥 내 자취방에 들어와 어색해하다가 갑자기 나가버렸던 그날 이후 확실히 달라진 그의 태도를 느낄 수 있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명상록을 읽기 시작했고, 그는 왜 내게 그토록 빨리 다가왔지? 그리고는 그렇게 잔인하게 머물다가 가는 거야. 가슴이 답답해졌다. 현기증, 현기증이 났다.


그 사람의 가을, 웃음소리가 들리던 도서관에서 우리는 다시 열람실로 들어가려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밖에서부터 이어지는 이야기, 웃음, 그리고 우리는 둘 다 약간 들떠있다는 것을, 나는 그냥 알 수 있었다. 나란히 계단을 오르다 두 남녀의 손끝이 살짝 스치듯 몇 번을 닿았다. 좁은 계단, 그가 어설프게 뭔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약간은 상기되어, 내 허리를 살짝 감싸 안았다. 그리고 나의 팔을 조심스레 매만졌던. 그리고 그래, 그때였지. 그는 계단에서, 입술, 순간 나는 머리가 핑 돌았다. 아찔했다. 그는 ‘움찔’했지만 이내 이성을 찾았다. 그는 그렇게 다시 나에게 가까이, 가까이 다가왔고, 그렇지만 다시 스스로 뒷걸음질 쳤다. 그 사람과 나의 얼굴, 귀, 손까지 우리는 모두 설명할 수 없는 놀람과 어색함으로 당황하고는 붉게 붉게 물들어버렸다.


그날 밤, 나는 울어버리고 말았다. 끝없이 밀려오는 고독의 외침에 허우적거리는 내 꼴도 더는 바라볼 수 없었다. 카프카(Kafka)의 [고독과 죽음에 대한 미학]에 관해서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것은 차마 아름다웠다. 그것은 처음부터 아름다운 그런 것이 아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소리 없이 다가올 때마다 눈이 부셔 마침내는 내 충혈된 눈마저 앗아갔다. 어둠이 다가왔고, 또다시 나는 새벽 속에서 지독한 카페인과 함께 헤매고 있었다.


다음날의 당신, 아폴로의 희망을 기다리며. 정리되지 않은 내 언어들을 뒤로한 채, 그럴지라도, 당신의 손가락이 내 옷자락에 전율로 느껴진다고 할지라도. 서글픔의 메아리만을 남긴 채, 나는 그저 떨쳐버릴 것을, 나는 그저 그렇게 떠나갈 것을 미리 정해놓고 말았다. 그대, 그리운 이여. 내가 이렇게 이런 마음으로 당신의 체취를 기다리고 있다. 부디, 그러니 부디, 한순간일지언정, 당신이 지금 내게 걸어오기를 나는, 나는 기다립니다. 이 가을 속의 고요함, 어둠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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