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 중앙 도서관 열람실 문밖, 벽에 걸려있던 그 게시판에 수많은 청춘이 그렇게 했듯이, 우리도 그랬다. 서로에게 쪽지를 남기거나 포스트잇에 암호처럼 숫자만 써서 붙여놓았다. 금세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고, 우리는 그 넓은 도서관 열람실에서 책을 보다가 지겨워지면 약속이나 한 듯 2층 벽다방에 나타났다. 그리고 웃음소리. 도서관 넓은 뜰, 그리고 큰길까지 한참을 거닐었다. 바람에 나뒹구는 은행잎들 바스락 소리는 까르르 웃는 내 웃음소리와 뒤엉켜 H의 미소 짓는 커다란 눈 속으로 사라졌다. 그랬다. 그때는 그랬었다.
우리는 달라졌다. H와 영등포구청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고 김포공항역으로 가는 길 내내 불편했다. 검은색 긴 원피스가 어색했고, 화장도 하지 않은 채 빨간 립스틱만 바른 내 입술이 제멋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는 것 같았다. H는 간간이 내 쪽을 향해 애써 재잘대는 내 입술을 봤지만, 눈이 마주칠 것 같으면 서둘러 지하철 창에 어정쩡하게 비친 두 사람 쪽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김포공항역에서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H는 가만히 나를 쳐다보다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했다. 그렇지만 H가 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끝내 테이블에 놓인 커피잔, 작은 찻스푼으로 의미 없이 휘저어 제멋대로 소용돌이치는 커피 속으로 삼켜졌다. 한참 동안의 침묵을 깨고 H가 무언가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너, 너 어디 간다고 했지?”
“잘 모르겠어요. 지금은 그냥 춥지 않은 나라로 가보려고요. 다음 주 종로에 알아둔 여행사 가서 예약할 것에요. 어디든 가야죠. 가고 싶어요. 그럼 저도 달라져서 돌아올 것 같아요.”
“그, 그래. 난. 음. 잘 가라. 휴가 나오면 또 보자.”
“네 오빠. 안녕.”
우리는 그렇게 웃음소리 없이 엷은 미소만 겨우 지은 채 헤어졌다. 나는 잊겠다고 결심했고, 잊혀질 것으로 생각했다.
밴쿠버 버너비 주택가 어느 언덕길. 내가 온전히 H를 떠나 나를 찾겠다고 올라선 그 길 위에서 끝없이 떨어지고 날리고 나뒹구는 가을 낙엽들의 소리가 그때, 도서관 뜰에서 들렸던 그 웃음소리를 사무치게 그립게 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가슴이 아파져 왔다. 심장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오랫동안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러면 안녕, 내 첫사랑.
그 해가 지나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조용히 복학했고, 밝은 갈색으로 머리 색을 바꾸었다. 토요일, 주섬주섬 책을 챙겨 들고 예전의 운동화가 아닌 새 구두를 신고 법원에서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길을 걸었다. 게시판에는 더 이상 그 사람의 쪽지는 없었다. 홀로 도서관 뜰로 나왔다. 봄꽃들이 따뜻함 속에서 웃고 있었지만, 그 가을 웃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날 밤 11시,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음. 너 왔니?”
“아,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