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우린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by 해달

그즈음 H는 거의 매일 밤 전화를 했다. 보통은 11시에서 12시 사이 전화를 했고, 우리는 1시 혹인 2시까지 전화 통화를 이어갔다. 그는 대부분 나에게 내가 쓴 글들-나는 시의 형식을 빌려 마음을 표현했다-을 읽어달라고 했다. 하나 읽으면 또 다른 것을 읽어 달라고 속삭이듯 졸랐다. 수화기 너머로 H의 집중해서 듣는 듯한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시를 읽고 나면 어떤 때는 중간중간 영문학의 대가들에 대해 얘기했고, 또 어떤 때는 철학자나 그들의 생각에 관해 얘기했다. 사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읽었던 책에 관한 생각을 말해보는 것이었다. H는 전자공학이 전공이었는데,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나보다 훨씬 더 수준이 높았다. 하지만 그는 나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싶어 했다. 그리고는 나에게 칭찬인지 뭔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너는, 네가 쓴 글을 읽어줄 때 너는. 좋아.”

“그래요? 뭐가 좋다는 거죠?”

그러면 그는 수화기 너머로 한참을 생각하다가 다시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래. 목소리가 참 좋다. 어떤 글을 읽어도 음. 듣기가 좋은 것 같아.”

좋으면 좋은 거지 ‘좋은 것 같아’가 뭐야. 나도 그 말이 좋은 건지 아닌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날은 그가 나에게 자기 집으로 전화해 달라고 했다. 11시 넘어서 여자가 남자에게 전화하는 것이 무척 무례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의 누나들과 어머니는 잘은 모르지만 분명, 막내인 H가 매우 소중한 존재였던 것 같고, 그의 부탁으로 내가 11시에 전화했을 때 예상했던 대로 상당히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저. 안녕하세요. H오빠가 전화해 달라고 부탁해서 전화했는데요.”

“그래요?! 이름이 뭐예요? 음. 기다려보세요.”

약간 멀리서 애써 감정을 누르는듯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H, 전화 받아라. 그리고 나중에 얘기 좀 하자.”

단번에 H의 집안 분위기가 어떤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H는 나에게 갑자기 나오라고 했고, 어느 날은 테니스를 알려준다고 불렀다. 또 어느 날은 볼링을 가르쳐 준다고 불러냈다. 서울의 온 대학교 도서관들, 시립, 구립 도서관들을 함께 다녔다. 공부하다 쉬는 시간에 H가 건네준 커피포리를 마시면서 영어문장을 얘기했고, 시를 얘기했다. 우리는 도서관 은행잎 가득한 가을날, 마냥 웃었고, 벽다방 미스자가 건네는 쓰디쓴 커피를 무슨 맛인지 모른 채, 위장을 뜨겁게 녹인다고 느끼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끝없이 파란 하늘을 보며 웃었고.


언젠가 그는, 불쑥 내 자취방에 들어와 어색해하다가 갑자기 나가버렸다. H는 졸업반이 되면서 조금 불안해했고, 젊은 청춘들이 다 그랬듯이, 다가올 미래를 더 절실히 생각해야 했던 것 같다. 나는 나대로 규정되지 않은 관계가 불편했고, ‘사랑’ 따위는 이전에는 나의 삶에 없는 단어였는데, 새로 들어온 단어의 의미를 정리하느라 힘들었다. 뭔지 모를 이 팽팽함이 힘들었고, 주변에서 둘이 사귀냐고 농담처럼 얘기할 때, 둘 다 정색하며 어색해하던 그 순간이 힘들었고, 모든 것이 정리되지 않은 채 어지럽고 혼란스러워 나는 비틀거렸고, 확인하고 싶었고, 도망치고 싶었다. 솔직하지 못했고, 우리는 왜 주변에서 계속 알려줘도 아니라고 하며 혼란스러워만 했을까.


“휴학계 냈어요. 돈 모아서 떠날지도 몰라요.”

“그, 그래?”

H는 몹시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금세 다른 곳을 바라봤다. 내가 느낀 것은 마치 회피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채 여름이 되었다. 내가 휴학계를 내고 하루 아르바이트를 몇 개씩 하는 동안 H는 아무 소식도 없다가 어느 날 공군에 입대한다고 알려왔다. 금요일 밤늦게 전화해서 그는 나에게 토요일에 마중을 나와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예쁘게 입고 나와라.”

“왜요?”

“그냥 나와. 내일. 김포공항역까지 마중 가주라. 점심은 내가 사줄게.”


한 번도 입지 않고 넣어놓았던 블랙, 긴 원피스를 꺼내 입고 거울을 봤다. 긴 머리, 긴 원피스. 너무, 성숙해 보이나? 그 사람은 나의 어떤 점을 좋아했을까? 우린 그동안 뭘 한 걸까? 나는 왜 나도 모르게 S를 밀어냈을까? 아직도 H는 나에게 S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전과 너무 다르게, 어쩌면 너무 노출이 심했나? 나갈 준비를 하면서 알 수 없는 감정들로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해지기까지 했다. 거울 속의 나는 전혀 나 같지 않은 표정이 어두워 보이는 낯선 여자였다.


다른 모습의 다른 표정의 나를 보고 H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 너 이게 뭐야. 예쁘게 입고 나오라고 했더니.”

“그래서 예쁘게 입고 나왔잖아요. 립스틱도 발랐는데요.”

“그래, 그래 알았어. 오랜만이다. 일단 지하철 타자.”

아무것도 안 먹었을 것 같다며 H는 도서관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커피포리를 두 개 꺼내더니 빨대를 꽂아서 나에게 먼저 하나를 건네주었다. 다행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어색할 것 같았는데, 우리는 조용히 차가운 커피포리를 마시면서 지하철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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