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했다. H가 지정한 장소, 교대역 근처 S와 처음 만났던 카페에서의 두 번째 만남. 물론 S도 나도 딱히 교대역 근처를 잘 알지도 못했고, 서초역에서 걸어갈 수도 있는 거리이기도 해서, 이래저래 약속 장소로 교대역 근처가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혼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S의 번호를 바로 알려줘도 괜찮았을 테고, S에게 내 연락처를 알려줘도 괜찮았을 텐데. 굳이 번거롭게 H는 S와 나의 의견을 확인해 가며 장소와 시간을 조율했다.
‘아마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토요일 아침, 중앙 도서관에 가려고 지하철을 탔다. 오후에 S와 교대역 근처 그 카페에서 만나라고 전해준 H는 오늘 도서관에 올까를 생각했다. 나는 도서관에서 밀린 과제도 하고 공부도 하다가 오후에 S를 만날 생각이었다. 도서관으로 가는 길은 제법 쌀쌀해진 날씨로 조금씩 황량해지는 느낌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도서관 열람실 밖 게시판을 살펴봤지만, H가 남긴 쪽지는 없었다.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뭐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늘 우연처럼 만났으니까. 공부에 집중해야 했으므로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점심시간, 매점에서 간단하게 빵과 우유를 사서 도서관 뜰로 나와 먹었다. H는 나를 볼 때마다 가방에서 서울우유에서 나온 삼각형 모양의 커피포리를 꺼내서 주곤 했는데, 갑자기 그 커피포리가 먹고 싶어졌다.
오후 4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약속 시각은 5시. 아직 할 일을 다 끝내지 못해서일까, 책을 가방에 집어넣는 나의 손길은 조금 더디게 느껴졌다. 교대역 근처 그 카페의 문을 열고, 처음과 똑같이 S가 나를 알아보고 손을 들었다. S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이것저것을 질문했다.
“그런데, 너 H랑은 언제부터 알게 된 거야?”
“글쎄요. 아마, 대학교 들어오고 3월 말쯤?”
H는 내가 대학생이 되고 가입했던 영어독해 동아리 친구 Y와 밥을 먹으러 가던 중 지나가다가 만났다. 그땐 Y가 아는 오빠라고 해서 그냥 인사만 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고 어느 날 Y에게 연락처를 물어봤다며 H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리고 이상하게 우리는 계속 그냥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다. 나에게 H는 처음엔 그냥 학교에서 아는 ‘큰오빠’처럼 느껴졌다.
“그래, H가 네 얘기 많이 하더라. 너 참 재미있는 아이라고. 시를 쓴다며? 요즘 시를 쓰는 사람 드물지. 나도 그래서 더 관심이 간 것 같아. 하하.”
S는 겸연쩍은 듯 웃으며 말했고, 몇 가지 더 질문을 했다. 나는 그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성실하게 대답했다. S가 질문하고, 내가 답하고 그 밖에는 서로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는 않았다.
“저, 오늘 아직 할 일이 다 안 끝나서요. 오늘은 일찍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계속 앉아서 질문하고 답하고 하는 것이 지루하기도 하고, 슬쩍 괜스레 S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나는 S에게 궁금한 것이 별로 없었고, 아직 다 못한 과제가 계속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그, 그래. 그럼, 일어나자. 너네 집 지하철역까지 데려다줄게.”
“네, 감사해요.”
지하철역까지 데려다주겠다는 S의 말에 괜찮다고 말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래도 집으로 가는 길에 했던 대화는 조금 더 편안했던 것 같다. S는 최근에 본 영화 얘기를 했고, 나도 본 영화여서 편하게 함께 말하며 웃었다.
그날 밤, 12시가 다 되어 H에게서 전화가 왔다. H는 S와 잘 만났는지 묻지 않았다. 그리고 내일 도서관에서 보자는 말만 했다. 몇 시인지도 어디 도서관인지도 말하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 일찍 나는 가방에 영어책과 노트, 필통을 챙겨 넣었다. 왜일까. 나는 서초역 중앙 도서관이 아닌, 정독 도서관으로 가고 있었다. 내가 중앙 도서관으로 가는 것이 괜히 자존심이 상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삐삐가 울렸다. K의 번호였다. 도서관에 도착해서 K에게 전화했다. K는 나에게 어디냐고 물었고, 내가 정독 도서관이라고 말하자 이곳으로 오겠다고 했다. 거기서 H가 11시가 다 되어 나타나리라고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H는 K와 함께 나타났다. H는 나를 보자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무슨 공부를 한다고 이렇게 멀리까지 오냐? K 따라서 오느라 힘들었다. 다음부터는 하던 데서 하지 그래.”
전공 서적을 뒤적이다 잠시 커피를 마시려고 자판기를 찾았다. 동전을 찾아 넣고, 툭. 그리고, 뒤에 H가 있었다.
“너, 너. 여기서, 뭐 하니? 여기까지 와서 공부는 안 하고 커피나 마시고.”
그는 약간 당황한 듯 말을 더듬으며 어색한 웃음소리를 냈다.
“뭐예요?! 오빤, 왜 여기 있어요? 오빠도 커피 마시러 나와놓고는.”
그리고 내가 K 따라서 강남에서 여기까지 왔냐고 묻자 당황한 듯 말을 더 더듬었다.
“나, 나도 여기 가끔 와! 여기 낙엽도 멋지고, 난 도서관 투어가 취미야. 몰랐구나.”
“아휴, 됐어요. 저도 여러 도서관 구경 다니는 것 좋아하긴 해요. 다음 주엔 다른 곳에 가려고요.”
“뭐, 뭐라고? 내가 이미 몇 년 동안 여러 군데 다녀봤는데, 너희 집에서 가기에 가장 좋은 도서관은 중앙 도서관이야.”
딱히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던 나는 약간의 어색함을 뒤로하고, H의 옆에 앉아서 벽다방 미스자가 준 커피를 홀짝거리며 마셨다. 빈속에 블랙커피를 마셔서인지 심장이 살짝 두근거렸다. 창밖으로 바람이 세게 부는지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바람에 날리고, 그것은 소용돌이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금 이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하는 나의 심장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