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음. 너 왔니?”
“아, 네.”
그리고 그는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 용기를 내서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이봐요, 무슨 말이라도 해봐요. 내게 재잘거려 보라고요. 내게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달라고요. 어쩌면 당신이 그렇게 아무 말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기나긴 시간 동안 나의 펜을 집어 간 그가 다른 색깔-실은 색이 바랜- 그런 펜을 들고 왔다.
따르르릉. 전화벨 소리. 아! 그는 내가 일어날 때까지, 내가 아픔을 느낄 때까지 그는 집요하게 나를 깨웠다. 다음 말을 알고 있었다. 너무도 익숙해져 버린 우리는 한 편의 ‘고도를 기다리며’(wating for godot)를 만들고 있었던 것. 몰랐다. 그것들 그러한 우리네 대화들 몸짓들이 그러한 희곡을 만들고 있었는지. 고도는 오지 않았고, 럭키와 뽀조가 떠났다. 그리고. 당신이 떠났다. 당신은 뽀조였는데 후에 당신은 럭키였다. 나는 럭키, 그리고 블라디미르였다. 나의 희곡을 진지하게 경청하던 당신은 어쩌면 능동적인 청중이었다. 아, 나는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다.
그가 빛을 보였다. 그가 말을 걸어왔다.
“보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편안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 나는, 현기증을 느낀다. 오렌지 주스를 너무도 좋아해 그대와 이야기하던 수화기에 오렌지 주스를 쏟아붓고 싶어. 만일 수화기에 부은 오렌지 주스가 전화선을 타고 그대의 수화기에 전해져 그대도 상큼한 오렌지 주스를 느낄 수 있다면, 그런 상상을 해봤어. 언제나 있다가 있다가를 속삭이던 그대가 내가 좋아하는 이 차가운 액체도 좋아할까. 이 싱그러운 노란빛을, 움츠리려고 하는 그대도, 끝없이 팽창하고픈 이 노란빛을 받아줄까.
며칠 뒤 S에게서 전화가 왔다. S와 서초역에서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가로수길을 함께 걸었다. H와 ‘함께’ 가 아닌. 이제는 S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남자’의 시선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질문. 꽃을 꺾었는데 펴보니 원하는 꽃이 아니었다. 그럴 땐 어떻게 할까?”
“글쎄요. 저라면, 가슴이 쓰라리겠지만, 꺾어서 미안했던 마음으로 그 자리에 두고 가겠어요. 저라면. 저라면요.”
그날 밤 S에게서 음성 메시지가 도착했고, 어떤 내용인지 직감하고 있었다. S는 내게 이별을,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혼자만의 줄다리기에 지쳤다고. 내가 거절할 것을 알고 있고 그게 싫어서 이별한다고. 나를 좋아했고, 나와 함께 있고 싶으므로. 나를 좋은 느낌으로 받고, 자신이 내게 좋은 느낌이 아닐 것을 알고 있으므로. 어리석게도 결심을 무너뜨리고 연락을 해왔던 자신이 싫다고. 나와 얘기할 때면 너무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그렇게 말하고는 그는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고. 좋은 남자 만나라고. 행복 하라고. 흔하디흔한 말을 삼류 영화 같은 대사를 내뱉고는 음성 녹음이 끊겼다. 피곤하다. 자야겠다. 나는 지금의 이 정신과 육체가 너무 피곤해서 밀려온 깊은 잠을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다.
그해 가을, 인천 어디 섬으로 봉사활동을 갔다. 섬으로 가는 배, 사람들로 시끄러운 배 안에서 그는 멀리 혼자 서있었다. 그는 홀로 침묵을 불러들였고, 그 침묵을 깊숙이 눌러쓴 모자에 얹혔다. 그리고 내게 그 침묵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를 침묵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나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흔들리는 배, 차가운 바람, 나는 현기증이 났고 비틀거렸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기억했다. 깨질 듯 조심스레 그는 나의 팔을 잡았고, 흔들리는 내 가녀린 어깨를 잡아 주었다. 아파하는 내 심장을 겹겹의 옷들 위에서 느끼려 애썼고, 나는 그와 사랑이라는 그 단어 깊은 속으로 빠져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보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그 사람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