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그 가수의 노랫말 사이로

by 해달

그해 어느 겨울밤, H는 나에게 안치환 콘서트에 가자고 했다. 아마도 12월 23일이었던 것 같다. 2호선 시청역, 저녁 7시.

“내일인데, 여러 명에게 연락을 했는데, 다들 바쁘다네. 선약이 있는 애도 있고. 넌, 뭐 없잖아. 너도 갑자기 약속이 있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하핫.”

겸연쩍은 듯, 어색한 그의 목소리와 어색한 그의 표정이 뒤섞여 수화기 너머로 가만히 들렸다.

“특별한 약속은 없어요. 갈게요. 거기서 봐요.”


사실 난 안치환 가수에 대해 잘 몰랐다. 노찾사의 노래는 좋아했지만, 안치환이 멤버였는지도 몰랐다. 김민기, 양희은 노래는 제법 알고 있었지만, 그것도 실제 음악으로 들은 것이 아니라 책 속의 악보로 읊조렸다. 음색을 아주 얇게 입힌 시를 읊조리듯. 김광석이 자살을 했다고 보도되었을 때, 온통 주변의 선배들은 세상이 끝난 것처럼 비통해했다. 몇몇 선배들은 안치환이라도 그들과 함께 오래 남아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H는 아마도 그런 선배 중 한 명이었던 것 같다.


저녁 7시쯤 2호선 시청역 몇 번 출구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사람이 서 있었고, 안개비가 가로등 불빛에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대중 가수의 콘서트에는 처음 가보는 것이라, 내 두 볼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 어느 건물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조심스럽게 디뎠다. 문이 열리고, 아까 보았던 하얀 안개비처럼 세상은 온통 뿌옇게 보였다. 무대의 약간 왼쪽으로 자리를 잡았을 때 이미 공간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H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키가 작은 나는 그 사람의 얼굴도 정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밀려드는 사람들 속에서 그와 나의 거리는 5cm도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은 소리를 질렀고, 열광했고, 함께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순간순간 서로의 몸이 부딪치고 닿고, 5cm가 2cm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둠 속 사람들의 움직임, 환호성, 땀, 그리고, 그 사람의 냄새. 흙길에 금방 뿌려진 비 냄새 같았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그렇게, 안치환 그 가수의 노랫말 사이로 H와 나의 12월이 그렇게, 미련하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지나갔다.


당신이 진정 나를 믿는다는 그 말이죠. 그렇죠? 왜, 진작에 알려주지 않았나요. 그대, 내가 이제 펜을 놓았는데, 당신은 이제야 그 말을 해주시는군요. 나는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머금고 펜을 놓겠습니다. 그대가 비록 이제 내 펜 끝에서 있지 아니해도 나는 여전히 꿈을 꿉니다. 펜 끝에서 서성이는 그대 이름을. 그리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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