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이브, H는 전화하지 않았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에도 그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아무도 H와 연락이 된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날, 안치환의 콘서트홀에서 그 노랫말들 사이로 H도 나도 어렴풋이 느꼈다. 안개비처럼 뿌옇게 돼버린, 가슴만 아리게, 우리는 그렇게 될 것이라는. 그리고 우리는 미련하게 오랫동안 그렇게 그리워하겠지.
H는 뭔가 하고픈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끝내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끝끝내 그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리고 그날 밤은 설렘과 아픔이 동시에 내 가슴을 파고들어 몹시 힘들었다. 콘서트가 끝나고 집에 가는 2호선 지하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검은 창문에 비친 H와 나의 모습은, 바보같이, 바보같이, 그렇게 가야 할 길을 가야 하는 지하철의 차갑고 둥근 양쪽의 쇠바퀴처럼 선명했다.
‘하늘이 없는 공간, 측량할 길 없는 시간’과 싸우면서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했다.
평행선 – 안치환
하루종일 비바람 그치지 않던 그날
우리는 약속한듯이 교외선 기차를 탔지
삐그덕 거리는 구닥다리 삼등 열차는 가고
희뿌연 창밖에 이는 가녀린 빗줄기들
타오르는 햇살로 목마른 이세상에
그대 웃음처럼 촉촉한 해갈을
어느덧 기차는 이름모를 간이역에 멈추고
낯설은 너와 나를 떨구고 떠나갔지
그치지 않는 비를 맞고 들어선 작은 까페
여기저기 연인들의 사랑은 익어가는데
작은 촛불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우리는
어색한 웃음밖엔 건넬 수 없었지
하나뿐인 우산에 너의 어깰 감싸고
들판에 풀잎처럼 우린 비에 젖었네
저 멀리 뵈는 하나의 작은 끝점을 향해 걸었지
아무말없이 녹슨 철길을 따라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시지프스 삶처럼
어쩌면 우리의 사랑 라라라...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서로 다가갈 수 없는 선
우린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 평행선......
올해가 이렇게 가는구나. 도서관 게시판에 더 이상 H의 쪽지는 없었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그다음 날도. 이제 더 이상 도서관에 가지 않아야겠다. 더는. 그만, 그만 가야겠다. 그 사람은 더 이상 도서관에 오지 않는다.
T가 같이 가보자고 했던 영상번역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영상번역이 사실 어려운데, 내가 초보임에도 꽤 퀄리티와 완성도가 높다고 했다. 대사가 아무리 길어도 말하는 속도가 짧으면 해당 장면에 그 대사를 다 번역해 넣기는 힘들다. 한 화면에는 정해진 글자 수 13자씩 두 줄을 지켜야 한다. 영상번역회사 실장은 T와 내가 재능이 있다며 내부작가로 들어올 것을 제안했다. 영화를 좋아했고, 먼저 영화를 볼 수 있는 것도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T와 나는 대학 시절부터 영화도 좋아하고, 글 쓰는 것도 좋아해서 영상번역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혼자서 몰두하고 일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기 때문에 T와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밑바닥부터 해보자. 박봉이지만 언젠가 내 이름 걸고 번역하는 작가가 될 수 있겠지. 번역 일을 하느라 며칠 잠을 못 잤다. 눈은 퀭하니 들어가고 충혈되었다. 머릿속은 몽롱하고 내가 어디를 걷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 두 뺨 위로 차가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비, 그 사람의 냄새, 흙길에 금방 뿌려진 비 냄새가 올라왔다. 현기증, 어지러웠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아니 잊으려고 애쓰고 있던, 그 사람과의 기억이 비와 뒤섞여 흙냄새와 함께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