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람, 이유라도 알려주고 사라지지. 그 밤에 그렇게, 흙길에 금방 뿌려진 비 냄새를 나에게 남기고, 더 이상 11시 전화도 없이, 그렇게 사라지다니. 왜 나는 스스로, 그 사람에게서 멀어지기로 약속해놓고 또다시 기다리고, 기다리고. 왜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다시 생각하고, 생각하고.
하늘이 없는 공간, 측량할 길 없는 시간과 싸우면서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했다.
해가 바뀌고 이제 나는 영상번역 일이 꽤 익숙해졌다. 영화를 번역하고 한참 후 영화가 개봉되는 것을 보면 무척 뿌듯한 마음이었다. 사실, 어떤 영화들은 분명히 나는 번역을 했고, 나는 돈도 받았지만, 영화는 개봉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내 이름이 아직 정식 번역가로 올라가지 않아서 씁쓸하긴 하지만, 몇 년 더 이렇게 초벌 번역을 하다 보면 번역 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고 했다. T와 나의 공통된 장점이라면, 우리는 잘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지금 바로 큰 보상이 없어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갈 수 있다는 말을 믿고, 아무 말 없이 인내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그렇게 기다릴 수 있었다.
그리고 3월, 아직 쌀쌀함이 느껴지던 날. H와 친구인 K에게서 연락이 왔다. 같이 병 문환 가지 않겠냐고. 그 사람은, H는 하얀 침대에 누워있었다.
“왜 왔어. 난 아무렇지도 않아. 곧 퇴원할 거야.”
그 사람이 우리나라 최고라고 하는 대기업에 합격했고, 잘 다니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사실, 난 애써 관심 두지 않으려 했다. 언젠가 H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책을 흘깃 본 적이 있다. 알 수 없는 공식들을 몇 장씩 써 내려간 흔적,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들이었다. 너무 반듯했고, 너무 차가웠고, 너무 정확해야만 하는 그런 글자들, 숫자들이었다. H가 하는 일이 H를 병들게 했는지, H가 원래 그런 병이 있었는지, 그런 건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기 전, K는 커피를 마시고 가자고 했다.
“H는 너를 기다리는 것 같았는데. 왜 너는 H를 받아들이지 않은 거야?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거니?”
“아뇨. 저는, 어. 저는 H오빠를 좋아했어요. 하지만, H오빠는 저를, 저를 후배로만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넌, 바보구나. 아니면 눈치가 진짜 없던지. 실은 몇 명이 너에게 마음은 있었지만, 아무도 표현하지 못했어. 네가 H를 바라보는 것을 점차 눈치챘고, H도 너네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데, 너를 굳이 불러내서. 우리는 다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K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저는, 저는 힘들었어요. 오빠가 저를 밀어냈다고 생각했어요.”
“진짜 바보네. 남자는 여자에게 괜히 불러내고, 뭘 사주고 가르쳐주고 그러진 않아.”
혼란스러워하는 나에게 K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둘 다 답답하기는. 그런데 말이야. H가 아파서 그런 건 아니었나? 혹시 말이야. 난 잘 모르지만.”
또르르, 커피잔 커피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그런 바보 같은. 나는 펜 끝에서 그의 이름을 놓아주었는데. 이제 와, 병원이라니.
“먼저 가세요. 저는 H오빠에게 못한 말이 있어서 다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카페에서 나와 다시 병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차가운 빗방울이 두 뺨에 느껴졌다. 두 손으로 비를 가리고 서둘러 뛰어 들어가야 했지만,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로 가득한 내 가슴이 너무 무거웠을까.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병실까지 가는 그 길이 끝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H가 누워있는 병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숨이 가빠왔다.
“오빠, 저, 오빠 좋아해요. 계속 좋아했어요. 퇴원하면 꼭 다시 연락해요. 기다릴게. 토요일 도서관 벽다방 거기에서 기다릴게요.”
4월, 서초역에서 이어지는 도서관 길은 노랑, 분홍 봄꽃으로 현기증이 났다. 또각또각, 나는 하얀색 블라우스에 분홍색 치마를 입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치맛자락이 하늘거리고 사각거렸다. 봄꽃 탓이었을까. 괜히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걷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 눈부셔. 오늘 번역을 1/3은 해야 하는데 이런 날씨라니. 어지러워.’
도서관 열람실 61번. 61번. 그 사람이 자기 번호라고 주장하던 번호. 숫자 6은 히읗. 61은 ‘히’, 기분 좋아 웃는 소리, 웃음소리를 나타내는 숫자라고. 그땐, 유치하다며 놀리고 웃었는데. 그때는. 오늘은 그걸 생각하는 순간, 가슴 한켠이 깊이 아려왔다.
‘커피 마셔야지.’
2층, 벽다방 미스자. 그 사람이 머물던 곳. 거기, H가 앉아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이래서 공부가 되겠니?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데. 오늘은 어차피 너무 늦어서, 공부는 못해. 나가자. 동대문시장에서 꼭 사고 싶은 백팩이 있어. 꼭 네가 골라줘야 해.”
“뭐라고요? 갑자기 동대문시장이라니요.”
“알았어. 알았어. 일단 가자. 2호선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야 해. 너는, 너는 똑같구나.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오늘 밤에는 그동안 밀린 시를 읽어주라. 너무 오랫동안 안 들어서, 내가 좀 삭막해진 기분이야. 하하.”
그와 내가 정확히 무슨 말들을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말들이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도서관에서 지하철역까지 가는 내내 H는 유난히 많은 말을 했다. 여태껏 이렇게 횡설수설 많은 말을 하는 H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따사로운 봄빛 햇살, 진달래꽃 분홍빛, 내 분홍빛 치맛자락 끝에서 그 사람의 목소리가 매달렸다. 그리고 웃음소리, 나와 H, 그 사람의 웃음소리가 오랫동안 4월, 그 길가에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