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의 풍경 “폐허를 걷는 나직한 속삭임“
붕대를 감은 채 독일 국경으로 들어온 아우슈비츠 생존자 넬리는 훼손된 얼굴을 복구하는 수술을 받고 원래의 삶을 찾으려 한다. 레네의 말에 따르면 가족 모두가 사망했고 남편인 조니는 이혼 신청을 했고 행방을 알 길이 없다고 한다. 포기하지 않고 그를 찾던 넬리는 피닉스라는 바에서 재회를 하게 된다. 얼굴이 달라진 아내를 조니는 알아보지 못한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조니는 아내의 유산을 타내기 위해 ‘아내와 비슷한 느낌’의 그녀에게 살아 돌아온 아내인 듯 연기를 해줄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 넬리는 그 연극에 동참하기로 한다.
< 잿더미를 해 집는 페촐트 >
피닉스는 타고 난 잿더미에서 부활한다. 인간이 이룩한 모든 것 역시 그렇다. 욕망은 건물처럼 쌓아 올려지고 도시처럼 번지다 불처럼 태워져 버렸다. 그 욕망의 정점에 전쟁이 있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망각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넬리는 폐허가 된 자신의 집에서 과거를 되짚으려고 하지만 깨진 거울 속에 자신의 모습은 의사의 말처럼 새로운 삶을 살라고 하고 있다. 고문과 총탄 자국으로 망가진 얼굴은 이제 지난 시간 속의 것이 되었다. 찾아야 할 것이 있다고 믿는 것은 흔적의 부스러기 일까? 잠시 두었던 자신의 일부 일까?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피닉스>는 홀로코스트 이후 남겨진 잔해에서 건져낸 파편들을 모아 인물에게 덧씌워 기억의 조각보를 만들었다. 흑백의 사진에서 붕대에 감긴 얼굴로 다시 화장으로 가려지는 영화의 러닝 타임은 역사라 불리는 분기점을 상기하게 하고 있다. ‘피닉스’는 사라진 얼굴과 의상으로 입혀진 현재, 자신을 연기해야 하는 인물이 보여주는 잊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 경계의 빛에 관한 이야기 >
수용소의 경계에서 살아 돌아온 자에게 가장 먼저 도달한 것은 강렬한 빛이다. 경계 소의 병사가 붕대로 휘감은 넬리에게 들이댄 빛은 밝음이 아닌 직설적이고 날이 선 시선이었다. 영화는 그 후로도 의도적으로 빛을 피하는 인물을 그리고 있다. 불을 켜지 말고 이야기를 하자고 하는 장면이나 어두운 밤거리에서 자신의 흔적을 찾을 때 역시 맹인의 바이올리니스트에서 방향을 묻는 것은 난반사되어 왜곡된 진실이 아닌 모두가 외면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빛이 있을 때 인물들은 자신을 숨기고 서로를 속인다. 드러난 것은 진실에 다가가지 못한다. 지나간 삶은 되돌릴 수 없으나 그들은 거기에 매달린다. 빛은 지나온 것과 지나갈 것의 사이에만 비친다. 시야는 거기에 닿지만 보이지 않는 자들의 소리가 있는 곳엔 진실이 있다.
< 옷이 말하는 것들 >
넬리가 성형을 통해 홀로 코스트의 흔적을 지우는 것을 도운 것은 르네다. 재산을 정리해 주고 생활의 전반을 복원하도록 돕는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제는 독일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나치가 무너뜨린 것들을 복원할 때까지 라고 말한다. 넬리가 입을 옷 역시 영국에서 공수한 옷들로 마련해 준다. 잊어야 하는 것은 독일인이라는 사실과 과거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 옷을 입고 밤을 배회하는 넬리를 통해 드러낸다. 르네가 넬리에게 입히려 했던 것이 재건과 개척이라면 슬픈 연극을 함께한 조니는 검은 상의와 붉은색 원피스를 입니다. 금발인 그녀의 머리카락 역시 염색을 통해 변화를 주려 한다. 검정과 노랑 그리고 빨간색은 독일이다. 유대인인 그녀를 독일이라는 옷으로 감싸고 거짓된 연기를 해도 팔에 새겨진 아우슈비츠의 흔적마저 지울 수는 없었다. 옷을 입히며 시작된 연극 역시 맨살에 새겨진 진실로 막을 내리는 것이다.
르네와 조니 그들은 모두 넬리에게 자신들의 정체성이라는 옷을 제시했다. 예전의 얼굴은 이미 흑백 사진 속에 갇혔고 이제는 자신을 연기해야 했던 넬리는 자신의 노래를 부른다. Speak low를
< speak low >
독일 출신 미국 작곡가 쿠르트 바일이 재즈 씬에 남긴 명곡으로 추앙받는 speak low는 영화 속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흐른다. 이 곡은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운명처럼 들린다. 어쩌면 이 노래는 나를 만들었던 곳에서 나를 잊어야 했던, 불타버리고 다시 태어나야 할 모든 이들을 위한 곡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