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이는 서촌 산책자

파인더스가 고른, 영감을 주는 시선

by 파인더스 FINDERS

※[파인더스의 시선]에서는 매주 한 번 '수상한 여행가'를 꿈꾸는 이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수상한 시선을 소개합니다. 이번 주 '파인더스의 시선'이 선택한 수상한 시선은 서촌 거주 10년 차 주민이자, 서촌에서 10편 이상 촬영을 진행김종관 감독입니다.


CA109853.jpg 서촌 동네를 서성이며 산책하는 김종관 감독의 모습. Ⓒ FINDERS


김종관 감독은 서정적 영상미로 호평받은 단편영화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 이후, <조금만 더 가까이>(2010) <최악의 하루>(2016) <더 테이블>(2017) <조제>(2020) <아무도 없는 곳>(2021) 등 저예산 영화와 상업영화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독자적인 필모그래피를 차곡차곡 쌓아왔습니다. 영화 작업 틈틈이 쓴 글을 모아 <골목 바이 골목> <나는 당신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등 에세이도 펴냈지요.


스케일이 크지 않은 그의 단정한 영화에 유독 자주 등장하는 동네가 있는데요. 영화 <최악의 하루>에서는 낯선 이방인이 골목을 배회했고, 영화 <더 테이블>의 주인공들이 다른 시간에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주고받고, 영화 <아무도 없는 곳>의 소설가가 꿈인 듯 현실인 듯 부유하는 골목은 모두 서울의 서촌입니다. 김종관 감독이 만들어낸 영화의 인물들은 서울의 서촌 어딘가를 서성거렸습니다.


종로에서 유년기를 보낸 김종관 감독은 자신이 애착하는 기억의 단서들을 쫓아 서울의 바랜 골목들을 찾아다녔고, 시선이 오래 닿는 곳에서 영화를 촬영하곤 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에세이 <나는 당신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좋아하고 또 매일 지나는 골목에 배우와 스태프를 부르고 큐 사인을 준다. 골목은 원래 있던 모습대로 서 있고 원래 흐르던 시간대로 흐르고, 그 안에서 배우는 이야기를 만든다.”


김종관 감독의 영화 속에 유독 서촌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서가 자명해집니다. 감독 본인이 매일 같이 산책을 하는 익숙한 동네에서 영감을 받고 이야기의 퍼즐을 맞추며 하나둘 작업을 이어온 것이지요. 김종관 감독과 함께 인왕산이 굽어보는 나지막한 담장과 골목이 미로처럼 이어지는 서촌에서 그가 쌓아온 이야기들의 실마리를 찾아 산책에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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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테이블>에 등장한 체부동의 작업실. Ⓒ FINDERS



김종관 감독의 산책에는 정해진 행로가 없는 듯 정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익숙한 길에서 벗어나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가 길을 잃은 듯 서성이고, 어떤 우연이 만들어낸 정경을 가만히 응시하고, 근사한 전망이 있는 자리에 잠시 멈춰가길 반복하지요. 그리고 그 안에서 차곡차곡 쌓은 작은 인연과 영감들은 영화 속 이야기로 마법처럼 되살아나고요. 마법 같은 순간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에세이 <골목 바이 골목>에 잘 담겨 있습니다. 인상 깊은 문장들을 공유해볼게요.



내가 주로 산책하는 곳은 작은 골목들이다. 서울에서 가장 천천히 시간이 흐르지만 그럼에 조금씩 변해가는 장소들. 가지 않았던 곳과 가보았던 곳 전부. 아는 골목이라 하더라도 계절과 시간을 흘려보내며 조금씩 낯선 모습을 보여준다. 가던 길의 다른 시간과 계절에서, 익숙한 길 옆으로 난 샛길을 발견하는 것으로도 낯선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때문에 산책은 가끔 여행이 된다. 여행은 발견과 자극을 준다. 새로운 자극을 받아들이고 땀을 흘리며 걷노라면 이리저리 흩어졌다 모이는 생각의 흐름을 얻게 된다.

- <골목 바이 골목> 프롤로그 중


영화는 때로 실제의 공간에서 가상의 역사를 만들어준다. 나 또한 ‘분주한 도시의 곁에서 흐르는 이 길들에 또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길 위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도시의 새로운 설계자가 된 듯 만들어진 기억으로 길의 인상을 덧대어 보는 일이다. 이미 우리 옆에 있었던 아름다움을 사람들이 새롭게 발견할 수 있기르, 그 장소에서 배우들이 걷고 연기하는 그 순간에 가졌던 바람이다.

- <골목 바이 골목> ‘동네에서 찍은 영화’ 중


그곳에는 아직 높지 않은 담으로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 있는 벽들이 있다. 무언가를 흘려보내는 수로처럼 골목길의 줄기가 이어지고 그를 둘러싼 벽들이 있다. 그 벽 너머에는 머물고 싶어 하거나 변화를 기다리는 땅들이 있다. 시간을 견디고 있는 벽들의 세계가 아직 거기에 있다.

- <골목 바이 골목> ‘벽들의 세계’ 중


내가 산책하는 조용한 골목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성장을 하고, 살고, 늙는다. 골목을 벗어나 큰길로 접어들며 세상을 넓히는 시절로 떠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다시 그 골목으로 돌아와 늙어가는 이들도 있다. 노인들은 어릴 때처럼 자신의 세상을 골목 안으로 축소시킨다. 볕이 드는 자리에 의자를 두고 조용히 앉아 지나가는 산책자를 지켜본다. 노인과 골목을 뒤로하고 산책자인 나는 이 작은 여행에서 더 넓은 항로를 꿈꾼다. 누군가가 성장을 하고, 살고, 늙는 타국 혹은 도시에서 아이와 노인을 만나고 그들을 기억한 채로 나의 골목으로 돌아오는 것을. 가까운 곳에서 낯섦을 찾고 먼 곳에서 익숙함을 찾는 여행을 끝내고 언젠가 내 자리로 돌아온다면 볕이 드는 자리에 책상을 두고 여행에서 가져온 좋은 문장들로 이야기를 만들어볼 것이다.

- <골목 바이 골목> 프롤로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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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인시장 누각 옆으로 4층 빌딩 꼭대기 층에 들어선 복합문화공간 어피스어피스에서의 김종관 감독. Ⓒ FINDERS


사직동에서 옥인동까지 반나절 남짓 서촌 동네 산책을 마치고 김종관 감독이 최근 지인과 운영을 시작한 어피스어피스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통인시장 누각 옆으로 4층 빌딩의 꼭대기 층에 들어선 어피스어피스는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과 흥미로운 협업을 진행하는 복합 문화공간입니다. 4월 중순 개관전으로 김종관 감독의 <만들어진 이야기>를 선보였는데요. 두 배우가 어피스어피스에서 나눈 대화를 촬영하고 이를 동일한 공간에서 상영하는 방식으로 전시를 진행했습니다.


어피스어피스에서 내다보이는 전망도 참 인상적인데요. 이에 대해 김종관 감독은 "창 밖으로 뭔가를 바라보는 것에서 깊은 만족을 느끼고, 창작의 영감을 얻고, 마음을 열어두게 되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인왕산 자락의 서촌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통유리 전망과 운치 있는 테라스가 공간의 운치를 끌어올립니다. 10년 이상 서촌에서 살고 있는 김종관 감독이 계속해서 서촌 골목을 서성이며 산책하고 영화를 촬영하고 복합 문화공간까지 운영하는 이유는 서촌살이가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것이겠지요. 서촌에서 만들어갈 김종관 감독의 앞으로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궁금해집니다.



파인더스의 시선이 머문 한 마디

저는 헤매는 여행자입니다.

능동적으로 어떤 새로움을 찾는 유형의 여행자는 아닌 것 같아요. 그저 눈에 보여서 끌리는 골목을 들어가 보고, 때로 인연을 맺는 장소나 관계를 발견하기도 하죠. 여행 중에는 기억의 어떤 단면을 들춰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낯선 곳에서 익숙한 곳을 더 찾게 되는 경향이 강한 것 같아요.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점에서 여행은 제게 창작의 영감을 주는 셈이죠. 그런 반면 여행을 다녀오면 내가 아는 공간도 낯설게 보일 때가 많아요. 호기심을 갖고 세상을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 본 콘텐츠는 'FINDERS 파인더스 Issue01. 수상한 여행가'의 수록 콘텐츠 일부를 재편집하여 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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