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3 훈민정음 언해본에 대하여
훈민정음 번역본(언해본)
훈민정음을 한글로 번역한 것을 언해본이라고 합니다. 한글로 번역한 것을 세종이 남긴 책이나 자료는 없습니다. 세종은 살아계실 때 <나랏말싸미~>라는 책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배달말 나랏말싸미 번역한 사람은 희방사 주지 필현입니다.
훈민정음 한문글을 처음 번역한 사람은 조선 명종 시대 희방사 주지 필현입니다. 희방사는 선조시대에는 지질방사(池叱方寺) 즉, 짓방사였습니다. 짓방사가 희방사입니다.
이 책은 선조1년 10월에 처음으로 간행한 목판본입니다. 이 목판본에는 간기(刊記)가 기록되어 있는데,
隆慶二年戊辰十月日慶尙道豐基地小伯山池叱方寺開板 刻手 印天 恩湜 靑風衲子韓善大化主弼玄
륭경이년무진시월일경상도풍기지소백산지질방사개판 각수 인천 은식 청풍납자한선대화주필현
이 책은 <세종어제 훈민정음>이라는 글 다음에 <월인석보1권2권>이 나옵니다.
| 현대어 풀이 |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서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가엾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지은이는 누구인가?
<석보상절>을 보고 세종이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고 하지만 이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임금이 글을 짓거나 노래를 지으면 실록에 기록을 하는데 실록 어디에도 <월인천강지곡>이나 <월인석보>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세조가 월인석보 서문을 지었다는 글이 세조실록에 없습니다. 이 책을 지은 사람이 신미가 아니었을까 추정은 합니다.
예종실록에 예종 1년 기축(1469) 6월 27일에 “중[僧] 신미(信眉)가, 임금이 중들에게 《금강경(金剛經)》과 《법화경(法華經)》을 강(講)하여 시험해서 능하지 못한 자는 모두 환속(還俗)시키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언문(諺文)으로 글을 써서 비밀히 아뢰기를, ‘중으로서 경(經)을 외는 자는 간혹 있으나, 만약에 강경(講經)을 하면 천 명이나 만 명 중에 겨우 한둘뿐일 것이니, 원컨대 다만 외는 것만으로 시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묻기를, ‘이 법은 아직 세우지 않았는데, 어디서 이 말을 들었느냐? 내가 말한 자를 크게 징계하려고 한다.’ 하니, 신미가 두려워하며 대답하기를, ‘길에서 듣고 급히 아뢴 것이니, 노승(老僧)에게 실로 죄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신미를 졸(卒)한 광평 대군(廣平大君)의 집에 거처하게 하고, 병졸들로 하여금 문을 지키게 하여 사알(私謁)을 금하게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미는 언문 즉 훈민정음으로 글을 지을 줄 아는 스님이었습니다. 려증동 선생은 “신미가 배달말로 글을 지었다고 그 실력과 그 버릇에 눈이 머물게 됩니다. 신미가 지니고 있는 배달말글 실력을 인정하게 되니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하는 불교 언서가 승려 신미의 손에서 이룩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다. (려증동 지음 <배달문학 통사2> 124쪽~125쪽. 형설출판사)
최근에 소설가 정찬주가 쓴 <천강에 비친 달>은 범어(梵語)에 능통했던 신미대사가 어떻게 세종의 한글창제에 가담하고 있는지를 밝힌 소설입니다. 그리고 조철현 감독은 영화 <나랏말싸미>에 신미대사를 등장시켜 한글 창제를 둘러싼 역사왜곡 논란이 있기도 했습니다. 조철현 감독이 '훈민정음 창제 신미대사 주도적 역할설'을 바탕으로 '나랏말싸미'를 만든 것은 한글로 된 최초의 불서(佛書)로 추정되는 <원각선종석보(圓覺禪宗釋譜)>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전합니다. <원각선종석보>는 1999년 입적한 일타(日陀) 스님이 중국에서 구해 가지고 온 책이라고 합니다. 일타 스님이 1999년 7월에 제1권을 복사하여 려증동(呂增東) 전 경상대 교수에게 연구 자료로 기증했고, 대전보건대학 교수와 백불대학윈장을 역임한 노태조 교수가 다시 이를 복사하여 연구 발표를 한 적이 있습니다.
소창진평이 통문관 주인 이겸로에게 팔고, 이겸노는 서강대학에 팝니다. 서강대학교는 1972년에 이 책을 인쇄하여 해제를 답니다. 해제는 서강대학교 교수 정연찬이 했습니다. 정연찬 교수는 간기가 없는 이 책을 세조 5년에 간행한 책이라고 말했습니다. 통문관 주인 이겸로는 월인석보 1,2권을 소창진평에게 구입했다고 발표를 했습니다. 월인석보는 희방사에서 처음 찍었고, 그 해가 선조1년 1568년입니다. 그런데 세조 5년 기묘년(己卯年) 1459년 실록을 검색해 보아도 월인석보를 간행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결론: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지은이와 간기가 분명하지 않은 책입니다.
<석보상절>을 보고 세종이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다고 하지만 이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임금이 글을 짓거나 노래를 지으면 실록에 기록을 하는데 실록 어디에도 <월인천강지곡>이나 <월인석보>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세조가 월인석보 서문을 지었다는 글이 세조실록에 없습니다.
월인석보에 관한 통설과 반박
일설에는 세종이 수양대군에게 명하여 석보상절을 편찬하게 했다고 합니다. 1446년 9월에 창제된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이용하여 그 이듬해인 1447년 7월25일경에 원고를 완성하고, 1448년 연간에는 전체 24권을 모두 간행한 것으로 추정하지만 실록에는 이러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승우(僧祐)·도선(道宣) 두 율사가 펴낸 두 편의 보(譜=석가보釋迦譜)를 합치되 중요한 내용은 자세히(상詳) 쓰고 그렇지 않은 것은 줄이기도 하여(절節] 석보상절(釋譜詳節)을 만들고, 이를 대중이 이해하기 쉽도록 정음(正音)으로 번역했다”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번역한 석보상절을 진상하니 세종께서 보시고 곧 찬송을 짓고 ‘월인천강’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셨다고 합니다.
수양대군이 <석보상절>을 편찬하고➠세종이<석보상절>을 보고 <월인천강지곡>이라는 부처 찬송가 580장을 지었고 ➠ 나중에 이 두 책을 참고하여 세종이 <월인석보>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종실록이나 세조실록에 이러한 내용에 대하여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석보상절 서문이 날조되었다는 논문을 려증동 선생이 배달말 학회지에 발표합니다.
<세종어제훈민정음>+<석보상절 序>+<어제 월인석보 序>+<월인석보 1권>+<월인석보2권>+<刊記>
소창진평이 경북 영주군 풍기면 희방사에 월인석보 1권 2권 목판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서 인출한다. 끝장에 간기를 넣지 않고 실끈으로 묶어서 책으로 만들었다. 이 책을 통문관 주인 이겸노에게 팔았고, 이겸노는 서강대학에 팝니다. 서강대학교는 1972년 7월에 인출하면서 해제를 답니다. 해제는 서강대학교 교수 정연찬이 했습니다. 간기가 없는 이 책을 세조 5년 간(1459년 기묘년) 이라는 거짓말을 합니다.
이 책은 선조1년(1568년 무진년) 10월에 처음으로 간행한 목판본입니다. 이 목판본에는 간기(刊記)가 기록되어 있는데,
隆慶二年戊辰十月日慶尙道豐基地小伯山池叱方寺開板 刻手 印天 恩湜 靑風衲子韓善大化主弼玄
륭경이년무진시월일경상도풍기지소백산지질방사개판 각수 인천 은식 청풍납자한선대화주필현
이 책은 간행시기가 1568년입니다. 지질방사개판(池叱方寺開板)이라고 한 것이 중요한데, 개판(開板)은 처음 나무판에 새겼다는 뜻입니다. 일본말로 초판과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세조 5년 1459년에 찍었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석보상절 序에<正統十二年七月二十五日➊首陽君➋諱序>라는 글이 나옵니다. 수양군과 휘서라는 것은 수양대군이 쓰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수양대군이 이 책을 지은 것이 아닌데, 거짓으로 수양대군이 지은 것처럼 꾸민 것입니다.
➊수양군(首陽君)
왕비가 낳은 아들은 대군(大君), 후궁이 낳은 아들은 군(君)이라 합니다. 수양은 왕비 심씨의 둘째 아들이기 때문에 대군(大君)이라고 해야 합니다. 만일 자신이 수양군이라고 하면 후궁의 아들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어머니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➋ 휘서(諱序)
예기에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은 명(名)이라 쓰고 죽은 사람의 이름은 휘(諱)라고 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휘(諱)라고 쓰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어제 월인석보 서문>을 세조가 지었다고 하지만 어떤 승려가 날조한 것이다. 그 근거는 세 가지이다.
첫째, 소헌왕후(昭憲王后)라는 말을 잘못 사용하고 있다. 소헌왕후는 세조의 어머니이다. 어머니를 부르는 말은 모후 소헌이라고 불러야 한다. 남들은 소헌왕후라 불러도 자식은 소헌왕후라 부를 수 없다.
둘째, 세종위여(世宗謂予)라는 말이다. 예기(禮記)에 아버지 앞에서는 자식은 이름을 말한다. 세종위여는 “세종이 나에게 이르기를”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다. 세조가 서문을 지었다면 <선왕세종명소자유(先王世宗命小子柔)>라고 했을 것이다. 유(柔)는 세조의 이름이다. 선왕 세종이 소자 유에게 명하시길... 이라고 해야 맞다.
셋째, 장사요망(長嗣夭亡)이라는 말을 잘못 사용했다. 장사요망이라는 말은 “나의 아들이 일찍 죽었다.”는 말인데 이 말은 본인이 쓰는 말이 아니다. 장사(長嗣)라는 말은 남이 불러주는 말이다. 따라서 세조가 썼다면 장아요망(長兒夭亡)이라고 써야 한다.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대부와 사의 아들이 감히 자신을 일컬어 말하여 “사자 아무개”라고 하지 못한다. 대부사지자 불감자칭왈 사자모(大夫士之子 不敢自稱曰 嗣子某) 세조가 자신을 장사라고 할 수 없다.
마무리
국어를 가르치며 훈민정음을 가르친지 30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훈민정음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면서 판본에 대한 정확한 기록과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나름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어떤 연구를 할 때 책과 기록에 근거하여 연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서지학적 접근을 먼저 해야 합니다. 그래서 책의 판본에 대한 이해를 해야 하고, 목판과 활자, 어미와 판심, 장정의 침안의 특징, 제본방법, 종이 지질, 글씨나 글꼴 등 여러 상황을 검토해야 합니다.
(1) 한문본 : <훈민정음 혜례본>은 국보제 70호로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해례본을 상주 배익기라는 사람이 훔쳐 감추고 있어 그 내용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본은 세종실록에 실린 훈민정음 관련 자료입니다. 현종 9년(1668)주조 <배자예부운략본>도 있습니다. <열성어제본>은 숙종 때 낭선군 이 오가 편찬한 것인데, 세종실록에 있는 오탈자를 고쳐 쓰기도 했습니다. <경제훈민정음도설본>은 숙종 때 최석정이 필사한 것입니다.
(2) 언해본 : <월인석보본>은 서강대본은 위서임이 밝혀졌고, 1568년 희방사 주지 필현이 간행한 <희방사>본 卷1ㆍ2의 목판이 전해졌으마 6ㆍ25때인 1951년 1월 13일 미군에 의해서 건물 5동이 소실됐고 월인석보 21권과 그 판목 222장, 훈민정음 판목 400여장, 예술적 가치가 풍부한 불상과 중요문화재가 거대한 사찰과 함께 한 줌의 재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