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윤리 45]

6. 종교인의 말하기

by 백승호

6. 종교인의 말하기

종교는 말로 이루어집니다. 보이지 않는 상상에서 비롯된 믿음을 말을 통해 전하고, 지혜와 깨달음을 전하기 위해 말을 합니다. 종교가 자신의 믿음과 신념만 고집할 때 종교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종교의 말은 더 윤리적이고 더 많은 배려를 하는 지혜의 말씀입니다. 목회자의 말을 듣고 교인이 그 말을 믿는 과정 속에 자유의지와 옳은 판단으로 더 지혜롭게 살아가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요즘 일부 종교인의 말에는 인간의 자유의지나 비판, 판단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믿습니까?”라고 하면 “믿습니다.”라고 대답해야 집단 속에서 평온함을 느끼고 돈독한 신앙인으로 인정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상징 속에 불교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언행 속에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의 영원한 승리와 구원의 상징입니다. 십자가의 본뜻은 위로는 하늘에 대한 경배와 아래로는 늘 겸손한 마음, 그리고 양 옆으로는 이웃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박애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연민과 관용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 나라, 종교에 대한 관용을 베풀 때 종교의 품은 넓어집니다. 이웃에 대한 연민과 관용은 넓게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한국의 언론이 약자와 서민의 편에서 서서 보도하기보다 강자의 호위무사가 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종교라도 약자의 편에 서서 따뜻한 품을 내놓아야 하는데 일부 종교인은 더욱더 강자의 편에 서서 호위하거나 약자를 이용합니다.

종교 세력이 약자를 이용하고 정치권력이 종교를 이용하면서 정치와 종교, 언론이 서로 호위무사를 자처하거나 호가호위하면서 종교의 기능을 상실하고 교인들의 지성을 마비시킵니다. 설교자는 자신이 하는 말에 대해서 사실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스스로 많은 검증을 해서 말을 해야 합니다. 설교자의 말이 끝나면 ‘아멘’ 하거나 침묵하며 무조건 따른다고 하여 아무렇게나 말하면 목회자의 나태함과 책임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설교자의 말을 검증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 사실을 왜곡하거나 일정한 사실을 호도하여 자신의 암묵적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면 하나님을 팔아 죄를 짓는 것이고 지성을 마비시키는 것입니다. 영성을 강조하여 지성을 마비시키는 것은 독성을 주입하는 것입니다. 일부 개신교 목사는 자신의 피해의식을 교인들에게 전가하고 교인들의 마음속에 있는 손해 의식을 부채질합니다. 이렇게 되면 목회자와 교인은 하나가 되고 서로 집단 광기에 빠져 듭니다. 이성을 마비시키고 반지성주의에 빠집니다.

반지성주의와 확증편향에 빠진 종교인이 자신의 신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광장에서 대중을 선동하기도 합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많은 사람에게 호소하고 지지를 받고 지지 하는 사람이 많으면 확증편향에 쉽게 빠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을 확대 재생산하는 정치인과 언론이 뒷받침될 때 집단 광기는 더 큰 힘을 얻어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많은 사람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반지성과 광기가 결합합니다.

반지성주의는 이성과 합리성을 배제하고 오로지 믿음과 순종을 요구합니다. 또한 분노와 증오, 복수와 응징을 말하면서 종교의 관용과 사랑은 사라지고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갈등을 심화합니다. 교인들은 목회자의 속내를 모르는 것인지 알면서도 동조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반지성주의와 집단 광기, 다수의 무비판과 침묵을 이용하는 일부 목회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미국의 반지성주의>라는 책에서 “자기 성찰이 결여된 지성이나 지성을 부적절하게 사용하는 특권계층을 반지성주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반지성주의와 매카시즘에 대하여 비판합니다.

미국 상원 의원 조지프 매카시는 1950년 2월 9일, 미국 공화당 당원집회에서 “나는 국무부가 공산주의자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내 손에는 그 205명의 명단이 있습니다.”라고 주장한 사건을 계기로 일어납니다. 미국의 매카시즘 광풍은 시민들을 자유와 사상을 억압하며 4년 정도 지속되며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줍니다. 수백 명이 수감되었으며 1만~1만 2천 명이 직업을 잃기도 합니다. 배우 찰리 채플린, 극작가 아서 밀러,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시인 겸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이 피해를 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승만은 친일파의 잘못을 덮고 그들을 내세워 권력의 위기 때마다 빨갱이로 낙인찍어 국민을 억압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보수정권은 국가보안법을 내세워 간첩을 조작하고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박성철 기자는 ‘한국교회는 왜 반공주의에 빠지게 되었나’는 글에서 편집증적 반공주의라고 말합니다. 그는 “공산주의를 극단적으로 두려워하여 현실 자본주의를 비판한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개인·집단을 무분별하게 공산주의자로 낙인찍는 사회병리적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한국교회가 자본주의 신격화를 수용하고 신성화된 자본주의와 편집증적 반공주의가 ‘하나님의 뜻’이 되었고, 기독교적 가치로 둔갑했다고 말합니다. 한국교회는 물신주의 물욕 주의가 지나치게 강합니다. 신도의 수를 늘리고 대형교회를 짓는데 집중하고 교세를 확장하는데 매몰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신성은 없고 물성만 가득합니다. 돈 없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멸시하고 외면하는 것이 비일비재합니다.

종교(宗敎)는 으뜸 가르침을 말하고 마음속의 신앙을 말하기도 합니다. 종교는 낮은 곳에서 고통의 소리를 들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과 힘이 되고 관용과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종교는 생명에 대한 사랑을 소중히 여기고 생명을 아프게 하는 모든 것에 대한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최근 일부 종교나 종교인에 대하여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는 시대”라고 말합니다. 종교가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람의 정을 느끼게 하고 공동체의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걱정을 끼치기도 합니다.

종교는 혐오와 배타적인 것을 넘어 화합과 포용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배타적 종교보다 포용적 종교일 때 종교는 사람들 사이에 더 가까이 다가옵니다. 조계사는 2010년부터 매년 성탄절을 앞두고 조계사 일주문에 종교 간 화합과 평화를 기원하는 성탄절 축하 연등을 설치합니다. 다른 절에도 성탄절에 펼침막에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글을 전합니다. 또한 수직적 권위주의를 버리고 수평적 소통을 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사회를 등지고 깨달음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를 사회에 베풀어야 합니다.

법정스님과 김수환 추기경의 훈훈한 만남은 종교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었습니다. 1997년 12월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에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 나란히 앉아 모습과 1998년 5월, 명동성당 축성 100주년 기념 미사에 법정스님과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은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넓고 큰 마음을 직접 보여준 두 어른의 모습이야 말로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보여 준 것입니다. 모든 종교의 본질은 사랑과 존중이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종교의 본모습입니다. 공자의 어진 마음이나 예수의 박애, 부처의 자비 등은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 줍니다. 자신의 신념과 가치가 중요하듯 다른 사람의 신념과 가치도 소중하기 때문에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셰익스피어는 “본질적으로 좋고 나쁜 건 없다. 우리의 생각이 어떤 것을 좋거나 나쁜 것으로 만든다.”라고 말했습니다. 불교의 경전 금강경에서 말하는 어떠한 상도 만들지 않고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고 걸림이 없는 마음이 열린 마음이고 자유로운 마음입니다.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의 말은 남을 진심으로 배려하여 다른 사람의 말을 빛나게 하고 우리 주변에 묵묵히 남을 배려하며 따뜻한 말로 많은 위로와 격려하는 말은 언제나 훈훈하고 뭉클하게 했습니다. 참된 종교인의 삶을 살았던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의 말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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