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1-01】 1/260 하필왈리(何必曰利) - 이익보다 정의
맹자가 양혜왕을 뵈었다.
왕이 말했다.
“어르신께서 천 리를 멀다 않고 오셨으니, 또한 장차 우리나라를 이롭게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맹자가 말했다.
“왕께서는 어찌 이익에 대해서만 말씀하십니까? 또한 인의(人義)가 있을 뿐입니다. 왕께서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까? 하시면 대부들은 어떻게 하면 내 집안을 이롭게 할까? 하며, 선비와 서민들은 어떻게 하면 내 몸을 이롭게 할까? 하여,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이로움만 취하려 한다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만 대의 수레를 가진 나라에서 그 군주를 시해하는 자는 반드시 천 대의 수레를 가진 제후의 집안이요, 천 대의 수레를 가진 나라에서 그 군주를 시해하는 자는 반드시 백 대의 수레를 가진 대부의 집안입니다. 만 대의 수레를 가진 나라가 천 대의 수레를 가진 나라를 취하며, 천 대의 수레를 가진 나라가 백 대의 수레를 가진 나라를 취하는 것이 적은 것은 아닙니다만, 만일 의리를 뒤로 하고 이익만을 앞세우면,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어진데도 자기 어버이를 버리는 자는 있지 않으며, 의로운데 자기 임금을 경시하는 자는 있지 않습니다. 왕께서는 오직 인의(人義)를 말씀하셔야지 하필이면 이익만 말씀하십니까?”
01-01-01 孟子見梁惠王하신대 王曰叟不遠千里而來하시니 亦將有以利吾國乎잇가 孟子對曰 王은 何必曰利잇고 亦有仁義而已矣니이다 王曰何以利吾國고하시면 大夫曰 何以利吾家오하며 士庶人이曰何以利吾身고하야 上下交征利면 而國이 危矣리이다 萬乘之國에 弑其君者는 必千乘之家오 千乘之國에 弑其君者는 必百乘之家니 萬取千焉하며 千取百焉이 不爲不多矣언마는 苟爲後義而先利면 不奪하야는 不饜이니이다 未有仁而遺其親者也며 未有義而後其君者也니이다 王은 亦曰 仁義而已矣시니 何必曰利잇고.
맹자견양혜왕하신대 왕왈수불원천리이래하시니 역장유이리오국호잇가 맹자대왈 왕은 하필왈리잇고 역유인의이이의니이다 왕왈 하이리오국고하시면 대부왈 하이리오가오하며 사서인이왈 하이리오신고하야 상하교정리면이국이위의리이다 만승지국에 시기군자는 필천승지가오 천승지국에 시기군자는 필백승지가니 만취천언하며 천취백언이 불위부다의언마는 구위후의이선리면 불탈하야는 불염이니이다 미유인이유기친자야며 미유의이후기군자야니이다 왕은 역왈인의이이의시니 하필왈리잇고,
【해설】
1. 맹자가 살았던 시대는 온 천하가 싸우는 전국시대(戰國時代)였다. 합종연횡으로 이합집산하고 권모술수로 정의가 사라진 시대였다. 맹자의 첫머리에 인의를 강조한 것은 이러한 시대에 국민과 나라를 살리는 희망의 빛과 같았다. 임금은 부국강병과 국익을 도모하고 백성들은 서로 이기적 욕망을 추구하며 한시도 평화로울 때가 없었다. 국익을 도모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인간의 이기적 욕망으로 서로를 불신하며 살아갈 때 새로운 전환이 필요했다.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을 넘어 인과 의를 바탕으로 왕도정치를 해야 국민이 살 수 있다.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의 탐욕을 극복하고 하늘이 준 본성대로 착하게 살아가야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 맹자는 인간의 욕심을 버리고 하늘의 이치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늘이 직접 우리의 성품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공명정대한 하늘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 본성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추구하면 개인은 경쟁과 다툼이 심해질 것이고 국가는 분쟁과 전쟁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개인끼리 다투거나 싸우고 나라가 전쟁을 일삼는다면 국민은 편안한 날이 없을 것이다.
전쟁은 무력과 폭력의 전쟁도 있고 총성 없는 전쟁이 있다. 자본주의는 총성 없는 전쟁을 한다. 소득 양극화로 인한 빈부격차, 경쟁 심화로 인한 피로 증가, 인간소외로 인한 심리적 스트레스 증가 등 이로 인한 질병 증가는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다. 사람은 정말 이기적 동물인가? 이윤 추구로 인하여 다수를 불행으로 몰아가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문제점을 극복할 방안은 무엇인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합리화하고 자신의 탐욕을 정당화하는 ‘이기적 동물’이라는 구호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기적 욕망으로 가득한 오늘날, 새로운 삶의 전환을 위해 인과 의를 바탕으로 우리의 잃어버린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하필왈리’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2. 맹자의 ‘하필왈리’는 인간의 갈등 원인과 탐욕에 대한 통찰이다. 사람들이 이익을 추구하면 인간의 본성이 타락하고 사람 관계가 무너지며 사회적 갈등이 심화하여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이다. 이익만 추구하는 사회는 개인이 행복할 수 없다.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모술수를 부리거나 거짓말로 남을 속이고 다른 사람을 이간질한다.
맹자는 이익보다 인과 의를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맹자의 통찰은 자본주의의 문제점과 같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에게 물질주의를 추구하고 장려하여 탐욕과 쾌락을 만연하게 하여 인간의 본성을 상실하게 했다.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을 상품화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이다.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나쁘다고 할 수 없지만 이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나쁘다. 이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면 모든 가치가 뒤로 밀리게 되고 인간이나 인간 본성도 배제된다.
이러한 인간 본성과 거리가 먼 나쁜 짓을 하면 마음이 불편하고 부끄러워하며 몸과 마음이 병들고 불행해진다. 맹자는 착한 인간 본성을 사랑하며 사회적 존재로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착한 본성을 간직하고 타인도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을 꿈꾸었다. 공자가 대동(大同) 사회를 꿈꾸듯 맹자도 공동체가 더불어 즐겁게 살아가는 삶을 꿈꾸었다.
3.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본성을 발휘하며 살아가기 어렵다. 자본가의 이윤추구 사회구조가 더 굳건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살아간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 풍요와 기술의 혜택을 누리고 살아간다. 하지만 사람들이 서로 믿고 사랑하며 자신의 본성을 발휘하고 하는 것은 아니다. 부조리한 사회제도나 정책을 바꾸어 인간의 본성을 발휘하여 서로 믿고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데 자본주의의 체제 안에서 경제의 노예, 소비적 인간으로 살아가며 지구환경을 끊임없이 파괴하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구속과 억압을 벗어나 해방을 꿈꾸지만 이윤추구의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경쟁하며 탐욕적으로 살아간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설국열차는 구조에 갇혀 사는 현대인을 상징한다. 자본주의라는 사회구조,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구조다. 마지막 칸에서 한 칸 한 칸 위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설국열차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오는 것이 감독이 말하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우리의 삶도 설국열차의 모습과 닮았다. 부조리한 사회 구조 속에 갇혀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설국열차가 파괴되어 탈출한 후 요나(고아성) 앞에 나타난 북극곰은 사람들을 바보라고 여기듯 바라본다. 우리도 우리가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현실의 구조속에서 단백질 조금 먹으려고 싸우는 비루한 마지막 칸의 사람들처럼 한 칸 더 가려고 아우성치고 있는지 모른다. 누군가가 만든 보이지 않는 손에 따라 우리는 조정당하며 맹목적으로 살아간다.
가령 부동산 문제만 해도 그렇다. 집값이 올라가면 건설사는 비싸게 분양하여 이익을 올리고, 은행은 이자 수입이 늘어나고 중계업자는 높은 수수를 받아서 좋아한다. 건설사 지분이 많은 언론사는 광고 수입과 건설사 수입 증가로 이익을 본다. 또한 이익에 눈 밝고 발 빠른 사람들은 부동산으로 이익을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 무주택자와 가난한 사람들은 피해를 본다. 이익을 추구하는 부패 카르텔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사회구조를 만들어 집이 없는 사람은 주택 가격 폭등과 전세 폭등으로 분노하면서도 ‘똘똘한 한 채’를 바라며 ‘영끌’을 하며 영혼을 상실하고 살아간다. 사회 부조리를 바로 잡아야 할 검찰과 사법부는 부패 카르텔과 한 몸이 되고 언론은 이들을 두둔하고 여론을 조작하여 현실의 문제점을 덮거나 호도한다. 재벌은 이들의 호위를 받아 이윤 추구를 아무 어려움 없이 하고 사회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고 사람들의 삶은 황폐해진다.
4. 자본주의 이윤추구 사회에서는 서로 경쟁하고 비교하면서 인간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동물적 감각과 본능에 따라 <기생충>처럼 살아가도록 강요당한다.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경쟁을 유도하는 상대평가 체제 속에서 비교당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비교는 불행의 씨앗이라 했는데 우리는 ‘비교 왕국’에서 비교하며 치열하게 살아간다. 비교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끊임없이 경쟁하고 살아야 하는 ‘피로사회’의 숙명이다. 무한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그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 오로지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있다. 그러면서 피나는 경쟁을 한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모르면서 인간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살아간다.
경쟁이란 같은 목적 혹은 동일한 대상을 두고 사람들이 겨루거나 다투는 행위를 말한다. 각종 대회나 시험의 점수 경쟁, 컴퓨터·차의 속도 경쟁, 각종 다양한 우열 경쟁, 등 우리의 삶은 경쟁의 연속이다. 진정한 경쟁은 무엇인가? 경쟁의 목적이 성공인가 성숙인가? 진정한 의미의 경쟁이란 무엇인가? 등을 생각하면서 경쟁의 의미를 생각했다.
'경쟁'이라는 라틴어의 어원은 '최선의 결론을 얻기 위해 함께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즉, 선의의 경쟁을 의미하는 것으로 공정한 규칙이나 규율에 따라 서로 겨루고 패배자가 승자를 인정하고 축하하는 것이 경쟁의 본래 의미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정한 규칙이나 규율에 의하지 않고 경쟁의 출발선과 과정, 그리고 결과에 대한 공정성이 결여되면 선의의 경쟁이라 할 수 없다.
경쟁을 긍정하는 사람은 경쟁이 인류 발전에 기여했다고 본다. 경쟁을 통하여 눈부신 기술 진보를 이루고 생산성을 향상해 더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하였고 효율적으로 목표를 달성해 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경쟁은 유익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 인간이 타고날 때부터 경쟁을 한 것은 아니다. 사회 구조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이 경쟁이다. 경쟁의식은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사회의 강요에 의해 만들어졌거나 후천적으로 학습된 것으로 본다. 경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경쟁 사회에서 모든 동료는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고 격려하며 협력하는 것을 못 배운다고 말한다. 상호 협력을 통하여 이해와 타협을 하고 공공선을 추구하며 연대의식을 형성해야 사회 발전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많은 사람이 경쟁은 사회 진보와 발전을 가져왔다고 생각하며 경쟁을 긍정한다. 경쟁이 없는 사회는 정체되고 도태되는 것으로 본다. 시장경제의 원리도 인간의 경쟁 심리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러한 원리를 교육과정과 사회 전반에 적용한다. 경쟁이 없으면 학업 능력이 향상되지 않고 하향 평준화를 조장한다고 한다. 기업과 기업 간의 발전도 경쟁이 있어야 하고 스포츠도 경쟁이 있어야 발전한다고 한다. 경쟁은 유용한 점이 있기는 있다. 열심히 노력하여 더 많은 성과를 낸 사람이 많이 분배받아야 하는 것은 누구나 부인하기 어렵다. 자유 경쟁 체제가 사회를 발전시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경쟁으로 말미암은 폐해가 훨씬 더 많다. 경쟁은 인간을 도구화하고 인간관계의 긴장을 초래하며, 강자의 논리를 정당화하고 불평등이 고착화되어 공동체 연대와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현실적으로 경쟁을 피할 수 없다면 경쟁의 폐해를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 경쟁의 기회와 조건을 평등하게 하고 공정한 경쟁을 하도록 제도적으로 보완해야 한다. 그러한 제도적 보완 장치 없이 자율적 경쟁을 조장하거나 유도한다면 경쟁에서 패한 많은 사람은 우울한 미래를 맞이할 것이고 소수 승자 중심의 악순환은 계속될 것이다. 개인끼리 경쟁을 최소화하면서도 사회 전체의 공적 차원에서는 협력을 해야 한다. 경쟁의 원래 어원처럼 '함께 추구한다'는 의식을 가질 때 진정한 의미의 경쟁이라 할 수 있다.
5. 이제 인간의 본성대로 살아갈 수 없게 하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경쟁과 상대평가의 구조 속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한다. 서로 경쟁해서 성공을 목표로 하는 경쟁이 아니라 함께 협력해서 성숙해지는 열린 사회로 가야 한다.
어느 회사의 광고 카피라이터처럼 모두가 성공보다 성숙해질 때 많은 그림자를 지우게 된다.
“꽃은 푸른 꽃도 예쁘고 붉은 꽃도 예쁘다.”
“자신에게 없는 모습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당신은 충분히 아름다우니까요.”
우리는 우리의 각자가 가지고 있는 빛깔과 결을 찾아 모두 아름답게 빛나야 한다. 무지개는 7가지의 색깔이 모두 빛나 이루어진 아름다움이다. 각자의 색이 있어 아름답다. 우리의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결을 발견하고 다른 사람의 빛깔을 인정해야 모두가 행복하고 눈물과 슬픔을 치유하고 서로 믿고 사랑하며 인간 본성을 실현하며 살아갈 수 있다.
맹자의 ‘하필왈리’의 삶은 에리히 프롬이 말한 ‘혁명적 인본주의’와 유사하고 ‘소유보다 존재의 삶’을 지향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프롬은 “사람은 권력과 자본의 주인이 됨으로써 최상의 높이에 있어야 하고, 이웃과 공동체를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하고, 양심적으로 살 때 가장 높은 사회적 평가를 받아야 하고, 모든 허위와 불의를 비판하고 마음껏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고, 사람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건전한 문화생활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하고, 사회에 기여할 기회를 보장 받음으로써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구속되고 얽매인 삶이 아니라 양심에 따라 삶의 주인이 되어 본성을 실현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정의를 지향하며 호연지기를 발휘하여 당당하게 살아가라는 맹자의 가르침과 유사하다.
인간의 본성을 실현하며 나와 우리 모두가 행복할 때 함께 해방할 수 있다. 맹자의 ‘하필왈리’는 자본주의의 시장경제와 이윤 추구 사회구조에서 ‘해방’되어 ‘편안함’에 이르러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국태민안(國泰民安)’은 ‘하필왈리’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성취할 수 있다. 맹자가 이익보다 인의(人義)를 중시한 삶은 에리히 프롬이 말한 건전한 사회(Sane Society 혹은 건강한 사회)와 같다. 즉 자본이 중심이 아니라 사람이 중심이 되는 인본주의 세상이다. 인본주의 삶은 소유적 삶을 버리고 존재의 삶을 추구하는 인간이 중심이 되어 지구 환경을 살리고 기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이 각성하여 인식 전환과 공동체 연대를 통해 사회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독점 자본가의 권력과 이에 기생하는 검찰, 판사, 언론 등을 개혁해야 ‘나의 해방 일지’를 넘어 ‘우리 모두의 해방 일지’를 쓸 수 있다.
잃어버린 우리의 착한 본성을 되찾아야 개인의 몸과 마음이 건강해져 해방될 수 있다. 인간 본성을 신뢰하고 사람을 신뢰하여 본성을 지키며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컴퓨터와 인공지능 등에는 반도체가 필수이듯 사람에게는 인성이 필수이다. 인성을 회복한 시민이 연대하여 사람을 중시하고 존중하며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사회구조를 만들고 필요한 소유를 최소화하며 존재의 삶을 추구하여 지구환경을 살려야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